
죄가 없어도 때리고, 때릴 때 꿈틀거리며 소리 지르고, 괴로워하며 죽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 살기가 가득하지만 그들에게는 그저 잔인한 오락일 뿐이다. 본문의 재판도 그랬다.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무이한 엄청난 재판이 마치 게임이나 오락처럼 진행되고 있다.
첫 대면부터 예수께 아무 죄가 없음을 알아본 빌라도, 절기에 죄수 하나를 사면하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사면하고 석방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자 다른 길을 모색한다. 예수님을 매질하고 학대하고 조롱하며 ‘군중들의 구경거리’로 내보인 것이다. 유대인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며 그들의 명분을 세워주면서 자기가 죽이고 싶지 않은 사람을 살리는 실리를 얻기 위한 절묘한 타협안이다. 그때 빌라도가 했던 말 중 하나가 “보라 이 사람이로다”(5절, Behold the man!), 한글개역판에서 “이 사람을 보라”라고 번역했던 유명한 말이다. 어떤 의미였나?
이런 사람이 임금감?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군중들 앞으로 끌고 나온다(1-2절). 로마 황제가 머리에 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사람들로부터 “황제 폐하, 만수무강하소서” 인사받는 것을 흉내낸 고문이자 조롱이지만 빌라도는 “이래도 어쩌지 못하지 않냐? 이 정도면 되지 않았냐?”, 마치 잔인한 오락처럼 조롱하며 유대인들과의 타협으로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한다. 그저 예수님을 조롱하는 게 아니다. 이건 유대인들을 비웃는 교묘한 제안이기도 하다.
“이 사람을 보라”, 이렇게 폭행당하고 조롱거리가 된 무기력한 자가 무슨 임금감인가 생각해 보라는 의도, 그리고 동족인 유대인들이 이 정도면 동정심이 발동할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찌하든 반감을 누그러뜨리고 무죄한 예수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에서 던진 계산된 승부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 했던 빌라도의 “이 사람을 보라”는 말, 라틴어로 ‘에케 호모’(Ecce Homo)인데 빌라도가 ‘그냥 이런 사람이잖아, 불쌍하지 않냐?’ 그런 말투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 ‘에케 호모’가 유명한 말이 되어 이 제목으로 명화들이 쏟아지고, 책이 나오고, 지구촌 곳곳에서 연극도 했다. 그 가운데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는 군중들 가운데 고통스럽게 서 있는 불쌍해 보이는 예수님을 그렸고, 카라바지오(Caravaggio)도 1605년에 에케 호모라는 그림을 그렸다. 또 귀도 레니(Guido Reni)는 가시 면류관을 쓰고 하늘을 쳐다보는 우리에게 친숙한 ‘에케 호모’를 그렸고, 캥탱 마시(Quentin Matsys)는 수난받는 그리스도와 그 주변 인물들의 냉담함과 악마성이 잘 대비되는 걸작으로 평가받는 ‘에케 호모’를 그렸다.
그리고 무신론 철학자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에케 호모』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무신론자, 그는 이 책에서 자기 인생의 작품과 사상을 변호했다. 먼저 자기가 썼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라는 책을 자찬한다. “이 책으로 나는 인류에게 지금까지 주어진 그 어떤 선물보다 가장 큰 선물을 주었다. 수천 년간 퍼져나갈 목소리를 지닌 이 책은 존재하는 것 중 최고의 책이다. 인간의 만사가 이 책의 밑에 아득하게 놓여 있다.” 엄청난 자부심, 니체는 이 책을 제 5복음서라 부르며 “두레박을 내리기만 하면 황금과 선의가 담겨 올라오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상찬했다. 서문은 가관이다. 자기가 마치 예수님 같다. “이제 너희에게 말하니, 나를 버리고 너희를 찾도록 해라. 그리고 너희가 모두 나를 부인할 때 나는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그러면서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나는 왜 하나의 운명이 되었는가”라는 소제목으로 글을 쓴다. 자부심이 대단했던 것 같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 이것이 에케 호모의 메시지다.
하지만 하나님께 도전하는 게 인간다움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누가 무시한다고 무시당할 분이 아니고, 재판을 받을 분도 아니다. 그런데 에케 호모라는 이름의 그림들과 책들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자, 가장 큰 권능을 가진 하나님을 가장 연약하고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그렸다. 놀라운 것은 어떤 심정으로 그렸는지와는 상관없이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이 그림들을 보며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는 거다. 주님의 고난에 깊은 슬픔을 느끼고 가슴을 치며 은혜받는다. “저 분은 내 고통도 아실 것”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 거다.
그러나 현대에 오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사람들은 에케 호모를 보며 신의 무력함을 본다. 빌라도의 생각대로 저렇게 무력한 신을 믿어야 하는가? ‘신은 죽었다’라는 생각까지 한다.
물론 요한의 생각은 다르다. 요한은 복음서 서문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선언을 했는데 빌라도가 “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을 한 이 순간이 성육신의 절정이라는 생각이다. 가장 무력한 처지처럼 보이는 이 순간,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이 순간, 가장 비참한 것 같은 이 순간이 인간이 가진 한계와 연약함을 가장 잘 드러낸 순간이라는 거다. 이제야 예수님이 진짜 성육신, 진짜 인간이 되셨다는 것, 예수님이 진짜 인간이 되신 이 순간부터 진짜 신뢰받는 분이 되셨다는 거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같은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답을 찾아 나선 분으로 부각시킨다.
빌라도는 조롱하며 ‘이 사람을 보라’고 했지만 무언의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발견한 구원의 길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래서 ‘이 사람을 보라’, 무기력한 모습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 호소력이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우리가 받아야 할 수모를 대신 받으며 끝까지 참아내신 분, ‘이 사람을 보라’, 요한은 예수님을 진짜 신뢰해야 할 분으로 그리고 있다.
예상외의 반응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채찍질하고, 피투성이가 된 무기력한 모습에 자색옷을 입히고 무리 앞에 끌고 갔지만 유대인들의 반응은 빌라도의 예상과 다르다. 그들의 반응은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Crucify him)였다. 섬뜩하다. 군중의 광기랄까? 동정심이라고는 1도 없다. 도대체 자기들에게 무슨 해를 끼쳤다고 이렇게까지 성이 났을까? 강도였던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난리다. 완전 극형으로 처벌받아야 할 공공의 적 취급이다.
도대체 반응이 왜 이럴까? 요한복음을 보면 군중들이 원하는 실제 빵이 아니라 영생을 주겠다고 하신 것 때문일 수 있다. 그들은 빵 한 조각을 더 얻기 위해 눈물 젖은 삶을 사는 사람들, 그래서 때로는 치사하게 굴기도 하고, 비겁하게 굴기도 하고, 속이기까지 하며 그저 빵 더 얻기 위해 살고 있는데 알아듣기 힘든 딴소리만 하는 예수,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6:27)는 등 성질 돋우는 것 같은 말만 하는 것, 그게 화나게 했을 수 있다. 먹고 살기 위한 자신들의 숭고한 투쟁을 그저 썩고 배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구하는 사람 취급하며 하늘 양식, 영원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애매한 말씀만 하신 것이 밉다. 화가 난다.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빵을 풍성하게 주는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아니라는 실망감, 그 실망감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는 무시무시한 아우성으로 발전한 것이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14절에 보면, “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유월절의 준비일’, 요한이 즐기는 시간 표시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유월절 전 날’이라는 의미보다 ‘수난주의 금요일’을 말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다면 마가가 예수께서 ‘제 3시’(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한 것과 다르다(막15:25). 그런데 요한은 제 6시경이라 했다. 정오 가까이 되었다는 것, 그때까지 아직 재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기록이 맞을까? 레온 모리스는 시계가 없던 시절, 마가나 요한이 시간을 대충 말하는 것 같다며 여기서는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문제는 빌라도가 예수님을 밖으로 끌어내 세웠고 자기는 재판석에 앉았지만 사형 선고를 내리지 않고, 석방 선고도 내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가 한 말은 “보라 너희 왕이로다!”(Here is your king), “이 사람을 보라”라는 말처럼 이 말도 요한의 풍자로 보인다. 빌라도는 재판 중에 유난히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을 많이 했다. 무려 다섯 번을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십자가 형틀에는 아예 히브리어와 로마어,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팻말을 붙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읽게 한 거다. 대제사장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21절)고 요구했지만 “내가 쓸 것을 썼다”(22절)며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선언한다.
그렇다. 요한은 빌라도가 어이없는 재판을 진행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그린다. 빌라도의 말대로 예수님은 실제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다. 물론 빌라도가 “보라 너희 왕이로다”라고 한 것은 “너희 뜻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너희가 너희의 왕을 못 박는 것”이라는 유대인들을 향한 빌라도의 조롱일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본문 속에 빌라도가 두려워했다고 표현한 것이다(8절). 때린 사람은 빌라도인데, 재판관이 빌라도인데 이미 두려워하더니 지금 더 두려워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빌라도가 묻는다. “너는 어디서부터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9절). 예수님의 침묵 속에 엄청난 말씀이 있다. 이미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18:36)라고 대답하셨다. 그래서 말해봐야 알아듣지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할 말 없다는 거다. 그리고 그 침묵은 고난받는 종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거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53:7).
빌라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알 길이 없다. 세상에 취한 사람, 권력에 취하고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 수 있겠나? 빌라도의 눈에는 아무리 봐도 예수님이 아리송하다. 그래서 두려움 속에 한 말이 ‘이 사람을 보라’였고, ‘이 예수는 너희 왕’이라 했다. 진짜 아리송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빌라도였던 거다. 일단 유대인들의 비위를 맞추어 소요사태를 예방하고, 예수님을 죄없고 훌륭한 분이라 보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두고두고 쏟아질 비난을 피해보자는 의도였지만 그의 행동은 진리와 양심과 정의를 유린한 것, 결국 탐욕과 거짓과 위선과 살기가 이기게 한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냉혹한 행동이었다.
빌라도의 이런 행동은 군중들을 더 흥분시켰다.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Kill him, Kill him, Crucify him). 광란하듯 소리쳤다. 그 분위기 속에서 대제사장들은 흥분해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한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15절), 이게 대제사장들이 할 말인가? “하나님만이 우리 왕”이시라는 전통적 신앙고백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엄청난 고백을 한 거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준다(16절). 비겁하다. 이제는 자기가 할 일이 없다는 것, 패배를 자인한 꼴이다. 끝까지 예수를 석방시키려 한 것 같지만 아니다. 자기가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라는 비난을 받을까봐 두렵다. 추호도 그렇게 희생할 생각이 없다. 괜히 이 무력한 갈릴리 시골뜨기를 변호하다가 오해를 자초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살리든 죽이든 마음대로 하라고 예수를 넘겨준다. 빌라도는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는 분, 그래서 죽음 앞에 담담하고 고요하시다. 조금도 어두운 그림자가 없으시다. 어떤 구차한 변명도 하시지 않는다. 살아보려는 몸부림을 치시지도 않는다.
하지만 묻는다. 유대인들 처형법에 십자가형이 있나? 아니다. 또 유대인들에게 사형집행이 허락되는 시절인가? 그것도 아니다. 요한은 지금 누가 사형을 집행하였느냐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하게 다룬 건 ‘죽임당하도록 누가 넘겨주었나’였다. 유대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넘겨준 사람이 빌라도였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주면서도 끝까지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하는 이중 인격자, 요한은 빌라도를 고발하며 심판한다. “어쩔 수 없었다”는 자세는 안된다는 것이다.
빌라도가 살길을 찾은 것 같지만 아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이 이겼나? 그것도 아니다. 그들의 운명은 얼마 가지 못했다. 특히 빌라도는 2천 년 이상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이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그의 이름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이름이 되고 말았다.
마무리한다. 빌라도 법정, 이것은 오늘날 이 세상의 축소판 같다. 이런 일은 지구촌 곳곳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상사, 심지어 교회마저 빌라도의 법정이 되는 경우가 있다. 빌라도가 되면 안 된다. 대제사장들이나 유대 군중들처럼 되어서도 안 된다. ‘이 사람을 보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나? 혹시 유대인들처럼 가이사 같은 권력자를 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관심이 하나님 맞나? 정말 진리를 찾는 건 맞나? 혹시라도 메시아를 힘센 권력으로 생각하고 맘몬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어떤 경우에 처하든 항상 진리 편에 서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