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하우스 평택 정재우 목사
세인트하우스 평택 정재우 목사 ©세인트하우스 평택

사람은 누구나 과거를 그리워한다. 그러나 내가 그리워하는 과거는 내가 살지 않았던 시간들에도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이런 정서를 설명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아네모이아(Anemoia)"다. 이 단어는 우리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시대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가리킨다.

해마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서점에 등장하는 미래도서가 있다. 김난도 교수를 비롯한 집필진이 출간하는 새해 소비트렌드를 소개하는 책이다. <트렌드코리아 2026> 에서 새해 소비자 트렌드 중 10번째로 소개한 '근본이즘'이라는 트렌드를 설명하면서 '아네모이아'를 말하고 있다. 신세대들의 관심이 디지털 이전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징후가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내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 보면, 나는 이미 어릴 때부터 이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극장 앞에 걸리는 대형 영화 간판을 그리던 분이었다. 수백 번 그 작업 현장을 바라보며, 나는 페인트 냄새와 붓을 씻던 휘발유 냄새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림을 그릴 때 아버지의 입술은 늘 굳게 다물려 있었고, 커다란 캔버스를 향한 집중은 분명 내가 태어나기 전 누군가의 시대를 견디던 순간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 냄새와 손놀림은 단지 개인적 기억을 넘어 대형 간판이 도시의 얼굴이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살지 않았던 시대의 숨결을 이미 내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또 다른 기억들도 그러했다. 일본에서 살던 소녀시절, 나고야성의 벚꽃 축제에 갔었던 이야기, 주말마다 도시락을 싸서 영화 세 편을 연속으로 보러 갔던 시절, 그리고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남편 덕분에 다양한 영화를 봤다”는 자랑스러운 회상은, 내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시절을 내 안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나는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음에도 마음으로는 이미 거기 있었던 사람 같다.

비단 이것만이 아니다. 가족과 함께했던 주말의 풍경은 우리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집단적 기억의 리듬이었다. 주말이면 네 아들과 작은 산을 오르고, 하산 후 재래시장에서 장을 본 뒤 불고기를 굽던 가족의 점심, 진해 군항제에서 일곱 식구가 벚꽃 아래서 함께 웃고 놀던 풍경은, 지금은 사라진 공동체적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그 속에서 함께했고, 이제는 그 자체가 잃어버린 생활문화에 대한 아네모이아적 향수가 되었다.

집 안에는 사소하지만 강렬한 매개체가 남아 있다. 아버지가 그려 남긴 유화 성화, 어머니가 정성껏 짜 만든 무지개색 골무, 그리고 최근 파이오니아 오디오로 듣는 클래식 음악의 웅장한 잔향. 이 물건들은 단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감각으로 저장된 오래된 시간이다. 소리는 시절을 불러오고, 촉감은 손의 온기를 전달한다.

이러한 기억들은 단지 추억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나의 취향-고전문학을 사랑하고 소설과 시집이 많은 서재, 미술과 전시회, 영화와 연극에 대한 애정, 합창단과 성가대 경험-은 모두 아네모이아가 나의 정체성으로 스며든 결과다. 이는 과거를 단순히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미학을 현재의 삶의 방식으로 살아내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감정을 처음으로 이름 붙인 존 쾨닉(John Koenig)은 이렇게 썼다.
“아네모이아는 겪어보지 못한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다. 이미 존재는 했지만, 우리가 직접 살지는 못한 시간들에 대한 마음의 향수다.”

그의 문장은 내가 항상 느껴온 감정을 정확히 꿰뚫는다. 살아보지 않은 시절을 향한 그리움-그것은 결코 비현실적 도피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의 정서적 결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오늘도 나는 오래된 소리와 이야기 속에서 하루를 산다. 그것은 뒤로 가는 삶이 아니라, 잊히지 말아야 할 시간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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