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예수님의 재판에 관한 기사다. 그런데 요한은 유대인의 재판과 로마인의 재판을 대조적으로 다룬다. 유대인의 재판인 안나스의 심문은 간단한 면접 기록 정도로 처리하고, 가야바의 심문도 그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겼다는 제보 정도로 가볍게 처리한다. 반면에 빌라도의 재판은 기사가 매우 충실하다. 요한의 의도는 빌라도가 예수님이 무죄였음을 증언하였다는 것(18:38, 19:4,6)과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 상당히 노력했음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 같다.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동의한 것도 대제사장의 강경한 요구 때문이었음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요한은 누누이 강조했지만 예수님이 받으시는 이 재판을 수난사로 다루지 않는다. 체포되고, 심문받고, 죄인으로 정죄되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 가운데 죽으신 이 일련의 과정이 틀림없는 수난이기는 하지만 본문은 읽으면 읽을수록 수난 분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패배당하고, 정죄당한 예수님이 심판자이시다. 건축가의 버린 돌 취급 당하신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형국이다. 또 인간이 하나님을 재판한다는 것도 가당치 않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가 “신은 죽었다”고 했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죽으셨나? 오히려 니체가 심판받은 것, 그래서 앞서 ‘체포당하시다(?)’라고 제목을 붙였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제목을 ‘재판받으시다’라고 정하면서 물음표(?)를 넣었다.

누가 심판받고 있나?

빌라도의 재판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때 두 가지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하나는 고발자가 출석하지 않았다는 거다. 고발자는 유대 지도층과 유대인들인데 그들은 법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가기는 했지만 법정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한은 그때를 ‘새벽’이라 했다(28절).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 ‘새벽’이란 단어를 “특징이 있는 시간 언어”라 했다. 만일 이 단어가 4경을 가리킨다면 오전 6시 이전인데 유대인의 법률에 사형 선고하려는 재판은 밤중에 할 수 없게 되어 있기에 이보다는 늦은 6-7시쯤일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그 날 일찍이’라는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여하튼 유대 지도자들이 유월절 행사에서 격리될까봐 부정과의 접촉을 꺼려 총독 관정에 들어서지 않았다는 것은 “이방인들의 거처는 부정하다”는 율법 때문이었다. 빌라도는 총독일지라도 이방인, 그래서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방인의 거처에 들어가면 즉각 부정과 접촉되는 것, 한 번 접촉하면 1주일 격리돼야 한다. 문제는 그들이 이 율법은 중시하면서 정작 재판으로 살인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것이다. 참 얄궂다.

또 한 가지 웃기는 것은 졸지에 기사 속에 등장하는 빌라도 총독이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유대 지도자들, 다시 말하면 고소인들과의 판결 조율을 위해 들락거렸다는 것이다. 로마법에 저촉된 것도 아니고, 원래 빌라도는 이 일에 관여하지 않는 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는 사실 재판할 생각도 없었다(31절). 그런데 재판을 맡을 뿐 아니라 판사가 고소인들을 만나기 위해 들락날락한다. 웃기지 않나? 재판관 빌라도, 총독이기도 하며 예수님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자, 그런 자의 움직임이 요상하다. 초조하다고 할까? 안절부절못한다. 밖으로 나가 고소인들과 대화하다가 안으로 들어와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인지 묻고, 또 나가 고소인들과 타협한다. 판결 타협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19장에도 이런 움직임이 포착된다. 들어와 예수님을 채찍질하다가 다시 밖으로 나가 고소인들에게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한다. 그러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는 듣고는 다시 안으로 들어와 예수님께 사실이냐고 묻고, 결국 최종적으로는 밖으로 나가 고소인들에게 예수님을 넘겨준다. 양심의 소리는 들었지만 양심의 명령에 따를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죄를 찾지 못했기에, 대역죄나 반란죄 같이 아주 중한 죄목을 발견하지 못했기에 사형 선고를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진퇴양난(進退兩難),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다. 마태복음에서는 이런 빌라도를 재미있게 손을 씻었다고 표현했다(마27:24). 하지만 유대인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준다. 이게 빌라도의 불행이다. 아마 빌라도는 이 순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음을 몰랐을 것이다. 절대 다수의 교회가 2천년 이상 매주 예배 때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도신경으로 그의 이름을 거명한다. 역사상 최악의 악명 높은 사람이 된 것, 그러니 심판받는 자는 오히려 빌라도였던 셈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인가?”

빌라도 재판에서 첫 쟁점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인가’ 여부였다. 곧 사형 선고할 대상과의 쟁점, 빌라도는 사형 선고를 내릴 명분을 찾기 위해 안달났다. 당시 유대는 로마의 속국, 유대 왕은 로마 황제가 임명한다. 그런데 만일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이라 한다면 황제 권한을 찬탈하는 것이나 도전으로 여길 수 있다.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중죄, 사형 선고할 충분한 명분이 된다. 그래서 이 질문은 4복음서 모두에서 다 첫 질문으로 채택된다.

요한복음에서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절) 물었고,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하자 또 “네가 왕이 아니냐?”(37절) 묻는다. 빌라도는 참 교활하고 능수능란한 자다. 이어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부르더니(39절) 결국 십자가의 명패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새긴다. 그러니 이 질문은 스스로 유대인의 왕이라 시인하기를 유도하는 질문이었다. “이 사람이 왕이라고?”라는 뜻, 의심 많은 빌라도가 볼 때 혁명가도 아닌 예수가 유대인의 왕일 수 없다. 그래서 빈정거린 말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였다.

사람의 속생각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이 그 유도질문에 말려드실 분이 아니다. 그래서 애매하게 대답하신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37절), 원문을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고 있다”라는 말씀, 이 말씀은 ‘당신 말일 뿐이다’라는 부정적 뉘앙스와 ‘맞다’는 긍정적 뉘앙스 둘 다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왕으로 오셨고 왕이시라는 것, 예수님이 애매하게 대답하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왕을 권력자로 생각하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전혀 빌라도에게 말려들지 않으신다. 그러면서도 왕 되심의 의미를 분명히 하신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절), 예수님의 나라는 하늘나라라는 말씀이다. 빌라도가 당신에게 대역죄나 반란죄를 씌울 확실한 명분을 주지 않으신 것, 빌라도는 아마 답답했을 것이다. 이 세상이 아니라 진리에 속한 나라, 그 진리를 전하고 진리를 증언할 주권자로서의 왕이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세상권력자가 주는 빵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이다. 진리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변하고 낮고 낡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고 높고 고상하고 영원한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예수님은 왕이시다. 우리가 경배하고 찬양해야 할 분, 우리를 영원히 다스릴 분, 예수님이 왕이 되셔야 진짜 행복을 누린다. 그래야 진짜 안전할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어리석은 세상은 예수님 대신 바라바 석방을 선택한다. 강도를 석방시키라는 것, 선한 목자를 버리고 강도이자 삯군을 선택한 것이다. 아마 무리 중에 바라바 석방운동을 펴는 사람들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이 외치는 “바라바”를 군중심리로 따라 외친다. 마가는 바라바가 다른 혁명가와 함께 감옥에 있었는데 그들이 살인한 자들이라 했고(막15:7), 누가는 바라바 자신도 그런 일을 했다고 추가했으며(눅23:18-), 마태는 바라바가 ‘유명한 죄수’였다고 말한다(마27:16). 바라바가 로마에 저항운동을 한 대원일 가능성이 있고, 유대인들에게 영웅시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이 범죄자인 바라바를 석방하며 죄 없으신 예수님을 담보로 불법자를 풀어줄 것을 요구하도록 군중을 선동한 것은 그들 나름의 묘수였다.

그런데 이게 도둑맞을 선택,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이다. 강도의 관심이 우리의 행복인가? 아니다. 우리 재산을 노리는 강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바라바가 진짜 석방되었는지는 성경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 선택이 화근이 되어 이스라엘은 AD 70년에 로마 디도 장군에게 패망한다. 마치 교회가 신사참배에 무너지면서 6.25가 터졌던 것과 다를 바 없다.

묻는다. 당신을 다스리는 왕은 누구신가? 예수님인지 맘몬인지, 권력이나 이념은 아닌지 대답해야 할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

듣고 싶은 대답을 듣지 못한 빌라도, 그래서 한 말이 “진리가 무엇이냐”(38절)였다. 혼자 중얼거리듯 한 말인 것 같은데 여하튼 화제가 바뀐다. ‘진리가 무엇이냐’가 두 번째 쟁점, 아니 쟁점이 아니라 비아냥에 가깝다. 의심 많은 사람이자 진리에 대해 냉소적인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 묻는 형식으로 “진리가 밥 먹여주냐?” “진리가 있기는 하냐?” 비아냥거린다. 빌라도는 이걸로 대화를 끝낸다.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예수님의 생각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의 관심은 세상 권력이지 진리가 아니다. 그래서 이 질문은 그저 화제를 회피하기 위한 것이거나 비아냥거림일 뿐이라는 것이다.

대화가 졸지에 토막이 났다. 하지만 주경학자 레온 모리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답변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기사, 다시 말하면 예수께서 행동으로 대답하셨다는 것,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빈 무덤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의 논조를 볼 때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진리를 아는 지름길, 예수님은 진리이시다(14:6). 예수님은 스스로 진리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고 하셨다.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빌라도, 그는 진리를 모르는 사람이다. 혹시 알았다 해도 진리를 따를 생각이 없다. 마치 자기 인생에 대한 진지함 같은 철학이 없는 사람 같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 것, 진리의 소리를 듣고도 듣지 못한 거다. 그저 자기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자기 마음대로 조소하고 비아냥거린다. 이게 빌라도의 불행이다.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결국 음흉한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만다. 묻는다. “옳게 살고 있나?” “행복한가?” “혹시 허상을 좇고 그림자에만 매여 있는 것은 아닌가?” 열심히 달려 정상에 올라간 후 “여기가 아닌가봐” 그러면 너무 허망하지 않겠나?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은 마귀가 기뻐할 만한 일만 했다면 어떻게 될까? 진리에 관심 갖자. ”진리가 무엇이냐?“ 우리 인생을 보람 있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몸부림으로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이다.

진리에 관심이 없지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기억하라. 중간지대는 없다.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 10장에서 강조했던 말씀이다. 양은 자기 목자의 소리를 듣고 그 목소리에 따른다. 문제는 참된 목자의 소리가 있고, 삯군의 소리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건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다.

별소리가 다 들리는 시대다. 가만히 있다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악마가 소리친다. 세상의 소리가 내 마음을 흔든다. 자기 생각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아니다. 나도 모르게 그 소리들의 지배를 받는다. 이 어려움 속에 덮친 탄핵 정국, 국민을 대표한다는 지도자들은 나라의 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을 잡으려고만 한다.

문제는 세상의 소리가 우리의 행복과 내 삶의 가치를 결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진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세상의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이용만 당하는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빌라도를 보라. 진리에 냉소적이 되거나 회의적이 되면 진리에서 멀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악의 도구가 된다. 미혹당한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로 넘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주범이 된다. 그리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교회사에 두고두고 나쁜 이미지, 영원히 불명예스러운 이름, 저주받은 이름으로 남는다.

진리를 알아야 한다. 감사한 것은 진리 또한 길거리에서 소리치고 있다는 것이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 그가 길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에 서며 성문 곁과 문 어귀와 여러 출입하는 문에서 불러 이르되 사람들아 내가 너희를 부르며 내가 인자들에게 소리를 높이노라”(잠8:1-4), 진리가 소리친다는 거다. 고난당하고 있나? 그 현장에서 들리는 진리의 소리를 들으라. 진리를 찾고 구하고 두드리면 진리가 응답할 것이다.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 고난의 현장에서 대제사장과 빌라도, 바라바와 무리들이 진리의 초청을 받았다. 그들은 응답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진리의 초청에 응답하고 진리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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