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의 급작스러운 관세 인상 움직임을 막기 위해 방미에 나섰던 통상 당국이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귀국했다. 미국 측이 문제 삼고 있는 대미투자특별법에 대해 한국 정부의 이행 의지를 설명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관세 인상 조치를 실제로 중단하거나 유예할 구체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협상이 교착 국면에 접어들면서 조선업에 이어 원전 산업이 새로운 협상 지렛대로 활용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방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며 현 단계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로 대미투자특별법의 조속한 처리를 꼽았다. 여 본부장은 국회 논의가 지연되는 상황을 두고 미국 측이 한국 정부의 정책 이행 의지를 오해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법안 처리 속도를 정부 의지의 척도로 인식하고 있는 만큼, 제도적 기반을 신속히 마련하는 것이 향후 협상의 출발점이라는 인식이 공유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앞서 미국을 찾았던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방미 성과 역시 제한적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관세 이행을 강하게 압박하는 가운데 급파된 김 장관은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이틀 연속 회담을 가졌지만, 기존 한미 관세 합의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전달하는 데 그쳤다. 관세 인상 철회나 유예와 관련한 구체적인 진전은 도출되지 않았다.
◆ 관세 인상 절차 돌입…시점 조정 두고 물밑 협상 지속
미국 정부는 이미 관세 인상을 위한 관보 게재 절차에 착수한 상태다. 김 장관은 관세 인상 조치가 사실상 실행 단계에 들어갔다고 언급하며, 조만간 화상 회의를 통해 추가 협의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여 본부장 역시 관세가 실제로 적용되기까지 시점 조정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보고 미국무역대표부(USTR)와의 협상을 지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관보에 게재되더라도 즉각 인상될지, 일정 기간의 유예를 거쳐 시행될지에 따라 협상 여지가 달라질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 같은 상황이 이어질 경우, 지난해 15%까지 낮춰졌던 관세율이 다시 25%로 환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관세 인상 가능성이 현실화할 조짐을 보이면서 이를 막기 위한 대미 투자 프로젝트 논의에도 속도가 붙고 있다. 특히 한미 조선 협력 사업인 ‘마스가(MASGA)’에 이어 원전 협력 사업인 ‘마누가(MANUGA)’가 새로운 협상 카드로 부상하고 있다.
◆ 조선 협력 전례 속 원전 협력 ‘제2의 돌파구’ 기대
지난해 한미 관세 협상 과정에서 조선 협력이 돌파구 역할을 했던 전례를 감안하면, 원전 협력 역시 유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가 나온다. 당시 한국은 3500억 달러 규모의 투자펀드 가운데 1500억 달러를 국내 기업의 미국 조선업 진출에 활용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했다. 조선업 전반에 걸친 밸류체인을 보유한 한국만이 제안할 수 있는 차별화된 협상 카드였다는 평가가 뒤따랐다.
이러한 맥락에서 김 장관은 이번 방미 기간 동안 러트닉 상무부 장관뿐 아니라 크리스 라이트 미국 에너지부 장관과도 만나 에너지·자원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양측은 실무 협의 채널을 개설해 한미 간 협력 논의를 가속하기로 했으며, 원자력 분야 역시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김 장관은 대미투자특별법이 통과돼야 공식적인 절차가 가능하지만, 그 이전 단계에서도 논의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있는지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AI 시대 전력 수요 확대…미국, 원전에 다시 주목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AI) 확산이 가속화되면서 미국은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전원으로 원전에 주목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원전 르네상스’를 선언하며 2030년까지 신규 원전 10기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고, 원전 발전 용량을 현재 100기가와트(GW)에서 2050년 400GW까지 확대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다만 미국은 2013년 이후 사실상 신규 원전 착공이 중단되면서 원전 산업 전반의 밸류체인이 크게 약화된 상태다. 원천 기술은 보유하고 있지만 실제 건설과 공급망 측면에서는 제약이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면 한국은 원천 기술은 없지만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다수의 원전 건설 경험을 축적하며 실질적인 사업 수행 역량을 쌓아왔다.
◆ 한미 상호 보완 구조…원전 협력 ‘윈윈 모델’ 가능성
이 같은 상호 보완적 구조를 바탕으로 한미가 협력할 경우, 양국 모두에 이익이 되는 ‘윈윈’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한미 전략적 투자 업무협약(MOU)에 따라 양국 정부는 상업적으로 합리적이면서도 공동의 이익에 부합하는 투자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원전 협력이 첫 번째 한미 투자 프로젝트로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문주현 단국대학교 에너지공학과 교수는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원전 기술을 도입해 온 역사적 배경을 언급하며, 양국 간 원전 협력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 교수는 미국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은 자국 원전 건설 사업을 함께 추진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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