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신앙과 부활 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

김경재 박사
김경재 박사

십자가 신앙 없는 부활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신화로 전락하고 영지주의적 기독교로 변질된다. 부활 신앙 없는 십자가 신앙은 고상한 윤리적 영웅주의로 전락하든지 아니면 율법주의적 교리체계로 변질된다. 십자가와 부활은 손등과 손바닥 관계요 빛의 이중성처럼, 역사적 예수와 케리그마 그리스도는 불가분리적 진리의 양면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렇게도 중요한 십자가 신앙과 부활신앙은, 17-18세기 이후 세속화 과정과 합리적 이성 중심의 시대사조에 침윤 당하면서 인간 이성에 맞게 요리되고 변질되었고, 교회의 생명력은 약화되어왔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교리 신조만을 입으로 암송하는 껍데기 신자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갈파한 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본질은 ‘헬라인의 지혜 종교’도 아니고 ‘유대인의 기적 종교’도 아니다(고전 1:22-25). 인간 이성의 지식이나 종교적 영성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에 닻을 내리고 있는 역설적 종교요 진정한 신비적 체험신앙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사도바울 신학의 이해에서, 행함을 강조하는 유대교적 율법주의에 맞서는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즉 믿음으로 구원받는 ‘칭의 신앙’에 역점을 두어왔다. ‘칭의 신앙’은 바울 신앙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요, 종교개혁자들의 바울신학 해석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사도바울 신앙의 일차적 특징은 율법적 법리적 논리가 아니다. “은총을 통하여, 믿음에 의한 구원”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체험”이 더 본질적인 바울 신앙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는 학자들이 많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인간 영혼 안에서 체험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영적 능력과 은혜의 체험 없이는 경직된 율법주의 종교, 교리적 신학 이론 종교, 감상적 심리 흥분 종교에로 전락하고 만다. 사도바울의 부활 신앙은 그의 실존적 신비체험을 깊이 이해하지 않은 채로 보면 쉽게 오해할 수 있고, 비기독교적 신앙에로 전락할 수 있다. 사도바울을 단순한 유대교에 정통한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하고 당시에 풍미하던 헬라 철학에 영향 받은 학승일 뿐이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그는 도리어 심원한 신비체험가였다. 그가 체험한 신비체험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고, 그의 목회 편지 곳곳에 증언되어 있다.

바울 자신의 신비 체험에 대한 간증

미국의 저명한 종교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신비체험의 특징으로서 4가지를 든다. 언어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 많은 내용을 체험하지만 신비체험 시간 길이는 순간적이거나 매우 짧다는 것,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해가 되는 초논리적 성격이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비체험은 신비가에게 주어지는 성격의 피동적 체험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신비체험 증언도 그와 같은 성격을 나타낸다.

첫째 간증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음성을 듣고 신령한 밝은 빛으로 인해 육신의 시력을 잃은 뒤에, 아나니아의 기도로 치유 받아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을 벗은 후 이방 선교의 사도로 소명받은 사건’이다(행 9:1-9, 22:6-16, 26:12-18).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을 체험한 초대교회 명단을 거명한 후에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다”(고전 15:8)고 하는 간증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둘째 간증은 바울이 비몽사몽간에 경험한 ‘셋째 하늘 곧 낙원에로 이끌림 받아 체험한 놀라운 계시 체험’(고후 12:1-10)이다. 바울은 이 경험을 14년 전에 했다고 간증하면서 마치 제3 자를 지칭하듯이 말한다. 그 신비 경험할 때 육신의 몸 밖에 있었는지 몸 안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주님은 아실 것이라고 간증한다.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는데 사람들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다”(고후 12:4)라고 간증한다.

셋째 간증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능력과 사랑 안에 있다는 체험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바울 사도 편지 내용 중 핵심적 어휘인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라는 말은 교리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은 신비체험의 표현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은 곧 부활하신 그리스의 보편적 임재인 그리스도의 영과 하나 되는 경험이었다. 인간의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느낌’인 것이다(고후 6:16).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3가지 바울 사도의 신비체험은 그의 삶의 방향과 가치관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그가 체험한 신비체험의 핵심인 ‘십자가의 도(道)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남은 생애 30년 가까이 그는 스스로 천막 수리공으로 노동하면서 지중해 연안에서 복음 전파자로서 살았다. 바울이 간증한 3가지 신비체험이 단순한 개인의 심리적 환각이거나 비정상적인 신경증적 착란 증세라면, 그런 병적인 체험이 그의 편지 13가지 속에 그렇게 높고 숭고한 윤리적 힘과 영적 감화력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치 애완 강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모차르트나 베토벤의 명곡 악보를 연필을 입에 물고 써내더라는 황당한 이야기를 믿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바울의 신비체험은 진실한 것이고, 그의 신앙이 뿌리 내린 근본적 지반이었던 것이다.

부활한 몸은 질적 차원이 다른 영적 몸, 이 땅의 논리로는 설명 불가능

복음서,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 사도의 편지들이 증언하는 ‘부활한 몸’에 대한 증언들에 대하여는 다음 3가지 사항에 특히 유념해야 한다.

첫째, 부활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적 능력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다는 점이다. 인간적인 가능성이나 이성적 논리로서 설명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행 2:24)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부활장’에서 강조하듯이 부활의 몸은 죽은 자의 시체 소생도 아니고, 정신적인 영혼만의 영생도 아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새롭게 덧입혀주시는 전혀 다른 새로운 형체 곧 ‘영적인 몸’으로 다시 지음 받아 살아나는 사건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고전 15:35-44).

둘째, 부활 사건은 철저한 형태 변화라는 것이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데서 있는 것을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창조 사건에 기초하지만, “심은 대로 거둔다”(갈 6:7)는 하나님의 창조법칙에 따르기 때문에 ‘육의 몸’으로 살아갈 때 뿌린 속사람의 행함이 중요하다. 마치 분자생물학에서 말하는 식물 종자 씨앗은 흙 속에 묻혀 썩어 없어지지만, 종자 속의 유전자(DNA)가 새로운 싹의 형체를 이루며 형체로서 발현(發現)되듯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고전 15:44).

그러나,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법”(고전 15:50) 때문에, 사도 바울의 부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변화됨’(고전 15:52)이 강조된다.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던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땅 위에서 육신의 몸으로 살아가던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체로 변화시키리라”(빌 3:21)고 말했다.

셋째, 그리스도의 재림사건 이전에 죽음을 맞이하는 성도들은 이러한 ‘영적 몸의 덧입음과 형체 변화’를 언제, 어디서, 어떻게 덧입게 되는가? 바울 사도의 신앙증언에 의하면 그러한 사건, 곧 이 땅의 장막집이 무너지고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과 그에 걸맞은 몸으로의 변화를 덧입는 사건은, 각자 지상에서 생명체 죽음 직후에 일어난다고 말한다(고후 5:1-4). 이러한 놀라운 기적적 부활 생명을 덧입는 것,” 이것을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고후 5:5)라고 다시 모든 것을 하나님 신앙에로 바울사도는 귀착시킨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이 믿는 ‘부활 신앙’은 인간의 이성적 논리와 사유체계가 기초하고 있는 ‘존재철학’이나 인간학적 가능성에 조금도 근거하고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그리고 한 줌 흙덩어리로서 찰나를 살고 가는 연약한 피조물에게 ‘영원한 생명’을 덧입혀주시리라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느냐의 신앙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란 것이 인간 두뇌의 인식체계로서 파악가능한 자연과학적 시공 4차원의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 지성이 지금 논리로서는 파악 불가능한 실재계 곧 차원이 전혀 다른 실재계가 존재 가능함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신앙에 달려있다. 예수님은 불안해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 14:1-2).

부활을 증언하는 바울을 심문하던 베스도 총독과 아그립바 왕은 바울이 많은 학문 때문에 미쳤다고 했다. 그러나 도리어 그들이 권력정치와 물질욕과 탐욕에 미친 상태였던 것이 아닐까?(행26:24-29). 오늘 우리는 무엇에 미쳐있는가? 목숨 걸고 증언하던 바울의 ‘십자가와 부활 신앙’이 입만 살아있는 싸구려 ‘속죄론 교리’로 변하고, 거대한 교권 세력이 왕권을 옹위하는 찬양집단으로 변해간다는 세상 사람들의 따가운 비판이 2024년 부활절을 맞이하는 우리 신앙 양심의 창문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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