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 합동총신 직전총회장 최철호 목사
한교연 다음세대교육위원장, 예장 합동총신 증경회장 최철호 목사 ©합동총신

Ⅰ. 들어가는 말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반복으로 발전해 나가고, 그 과정에는 항상 위험과 위기가 도사리고 있다. 교회도 과연 그러하다. 오늘날 교회는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위기에 봉착해 있었던 바이다. 교회의 위기는 문명의 발전과 더불어 사람들의 인식과 가치관의 전도에서 비롯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가 이어갈 그 세상이 두렵고, 그리고 그 세대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교육의 막중함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을 느낀다. 이 글은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에 대하여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짚으면서 몇 가지 부분을 언급하는데 있다.

Ⅱ. 정반합의 자연 질서

정(正, These)이 그것과 반대되는 반(反, Antithese)과의 갈등을 통하여 조화로운 합(合, Synthese)을 이룬다는 정반합의 원리는 사실 하나님의 창조 질서, 자연 질서이다. 자연은 한 방면만 존재하는것이 아니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이 있고, 밤이 있으면 낮이 있고, 추위가 있으면 더위가 있고, 산꼭대기가 있으면 골짜기가 있고, 호경기가 있으면 불경기가 있다. 양 방면을 통해 자연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인간은 여기에 적응하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인간 내면의 영혼, 영적인 세계,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개신 교회는 1517년을 종교개혁이 선포된 날로 기억한다. 그 날을 기점으로 기존의 교회 질서인 가톨릭과는 다른 형태의 개신교가 출현하였다. 하지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종교개혁 운동은 창조와 자연 질서의 한 과정일 뿐이다. 우리가 보편적으로 인식하는 종교개혁은 그것이 처음이자 끝이 아니라, 영원한 시간 속의 한 점처럼, 한 부분이다. 그리고 부분들이 이어져 시간과 함께 교회의 역사를 이룬다.

그 종교개혁의 핵심을 회상해 보자. 성직자가 성경을 독점한 가운데,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질되어버린 교회는 어느덧 내면적이고 영적인 것보다 외면적이고 물질적인 것에 치중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외면적으로는 행위를 무척 강조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물질을 중심한 인간 탐욕의 발호에 다름 아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것을 지적한 것으로, 다시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하자는 운동이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외침은, 외면에 치중한 것에서 다시 잃어버린 내면을 되찾음으로써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를 소구할 수 있었던 자연 질서의 흐름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이미 200여 년 전부터 역사의 변곡점을 찍은 사건들-1347년에 발생한 페스트와 그 직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활동한 새로운 기독교 영성, 1400년대 에 시작된 르네상스-에 뒤이은 것이다. 1700년대 산업혁명과 1900년대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교회는 그러한 흐름의 한 가운데서 역사와 함께 굴러왔다. 산업혁명 이후 신, 구 교회 모두가 역사 속에서 행하였던 일들을 보라. 소수의 강대국이 배를 타고 온 세상을 휘저으며 식민지를 건설할 때, 교회는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순기능과 함께 원주민들의 삶을 피폐케 한 역기능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세계를 내 교구로!”란 구호가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 함의는 물량주의와 성장신학에 다름 아니다. 교회는 어느덧 종교개혁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목회자이든 일반 성도이든 비신자이든 불문하고 대형교회의 당회장을 성공한 목회자로, 작은 교회와 미자립 교회의 목사는 실패한 목회자로 인식하는 시각이 고착화되지 않았는가?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과연 그러한가? 이와 관련하여 엄중한 이 시기에 우리는 세 가지 방면에 주목해야 한다.

Ⅲ. 다음 세대의 교육을 위해 주목해야 할 부분

1. 신행일치의 삶

첫째, 교회는 사람들이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강조해야 한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교개혁은 정반합의 자연 질서 속에서 믿음의 지나친 강조가 신행일치의 균형성 상실을 초래하였고, 믿음의 본질을 왜곡시킨 것은 사실이다. 균형성 상실은 이미 루터에 의해 예견된 바로, 그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약 2:26)이 가르침의 요체인 야고보서에 대해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훼하였다. 하지만 야고보서는 복음의 진리, 그리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하여 보낸 서신서이다.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 그분 자체이시다. 그분의 경륜, 그분의 계시, 그분의 뜻, 그분의 말씀 등으로 아주 포괄적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란 말씀을 현대인들은 어떻게 인식하고 적용하는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란 말씀을 과연 올바르게 인식하고 있는가? 우리는 이 가르침을 신행일치와의 삶과는 무관하게, 그리고 무엇이든 “믿습니다!”라고 하면 모두 이루어진다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하지만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信念)이다. 마치 정신일도하사불성(情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처럼 말이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의 그 전제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 즉 하나님 안에서 이다. 예수께서 친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요 15:7)하고 전제조건을 달으셨던 것처럼 말이다. 이 말씀은 신명기 28장에 기록된 그 유명한 복들을 받기 위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것을 제대로 향유하기 위한 방법을 올바르게 제시하고 지속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교회는 믿음의 실천적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성경은 도덕책이 아니라는 말은 궤변이다. 물론 도덕책이 아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 내용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그 완성을 위해(고후 7:1 ; 빌 2:12)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과정, 곧 성화(聖化)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책무이다. 그래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교회는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막 7:21-23 등), 옛사람과 새사람의 성품(골 3:1-11), 가정생활 지침(엡 6:1-9 ; 골 3:18-25 ; 벧전 3:1-7) 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여 몸에 베여서 삶을 통해 나타나도록 이끌어야 한다. 이러한 삶은 참된 믿음을 소유한 자라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능히 할 수 있다.

2. 동성애 문제

둘째, 동성애는 단호히 “아니요”라고 교회가 외쳐야 한다. 앞의 것이 포괄적인 것이라면 이 문제는 구체적인 한 사안이다. 현재 수많은 국가들이 동성애 및 동성결혼을 법제화하여 보호하는 추세에 있다. 따라서 동성애를 법제화 한 국가를 헤아린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버렸다.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2003년 8월 5일 미국 성공회 게이 주교가 탄생한 보도, 2005년 12월 5일 영국 정부의 ‘시민동반자법’에 따라 동성애 부부가 최초로 탄생한 보도, 2006년 1월 5일 미국 뉴욕시 의회가 처음으로 여성 동성애자를 의장으로 선출한 보도, 2008년 5월 영국 성공회 소속 신부 2명이 동성 결혼식을 올린 보도, 미국장로교(PCUSA)가 33년간의 논쟁 끝에 결국 2011년 5월 10일 동성애자의 성직 임명을 허용한 보도 등등은 이제 먼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동성애․동성결혼 법제화의 파도가 지금 한국 사회에 거세게 몰아치고 있다. 다행히 한국 교회는 다른 나라의 교회들과는 달리 모두 힘을 합쳐 거세게 저항한다. 동성애 옹호자들은 자유와 인권을 내세우며 ‘포괄적 차별금지’란 멋있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입법 활동을 강행한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도 명료하여 부연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경은 두 가지 역사적 사건(창 19:1-29; 삿 19-21장)과 시내산 율법(레 20:13)을 통하여 경계하고 있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는 서신서를 통해 그것이 가장 중한 죄악임을 규정하며 마지막 심판 때까지 회개할 기회를 부여할 요량으로 ‘유기’ 상태에 둔다고 한다. 하나님의 유기(遺棄)는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저주이다(롬 1:24-32).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생육하고 번성하고, 이를 통해 구원 받은 수를 늘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생성하는 자연 질서이다. 그러므로 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동성애는 인간의 비뚤어진 성욕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으로, 에덴 동산에서 뱀이, 오늘날 사단이 인간을 유혹하여 심는 죄악이다. 따라서 교회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 단호히 대처해야 하고, 성도들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명확히 선포하여 정욕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해야 한다. 동성애자들이 교회를 향하여 ‘혐오 세력’이라고 공격할 때, 교회는 혐오 세력이 아니라고 소극적으로 변명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것이 죄악임을 지적해야 한다. 혹시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 중 동성애자가 있을까 싶어서, 그들이 교회를 떠날까 염려하여 침묵한다면, 그것은 비겁함이다. 성직자가 이런 악한 풍조를 옹호하고, 동참하고, 법제화에 앞장서고, 퀴어신학을 주창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단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인류의 고고한 보편적 가치를 선포하고 수호할 책임이 있다.

3. 아나키즘과 주사파사상

셋째, 아나키즘(Anarchism)과 주사파사상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타파해야 한다. 흔히 세상의 이념을 두 가지로 분류할 때,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진보’로 명명하는 것은 전혀 사실에 부합되지 않는다)로 나눈다. 일반적으로 ‘좌파’란 “평등을 추구하고 사회계급과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려 하는 정치적 입장”으로 정의된다. 사회적 약자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으로, 정반합의 자연 질서에도 부합된다. 따라서 이 글에서 그런 좌파를 폄훼하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잘못된 이념을 경계하는 것으로, 그 대상이 바로 아나키즘과 주사파 사상이다.

아나키즘이란 좌파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극좌파를 말한다. 이는 “사회를 아나키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철학적 사상으로, 아나키의 상태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세상은 망상에 불과하다. 주사파사상은 80년대 대학생 운동권이 추구했던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말한다. 이 두 사상의 공통점은, 겉으로는 국민을 위한 이념으로 포장하지만, 사실은 극소수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이들은 국민으로부터 막중한 세금을 수탈하여 그 돈으로 국민의 마음을 탈취한다. 천문학적 국가 부채를 짊어지면서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여 국민을 노예화시킨다. 그렇게 하여 절대 권력을 향유한다. 그들은 자유와 민주라는 말을 싫어한다. 북한의 김씨 3대 왕조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주체사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아나키즘과 주사파사상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6,70년대 경제개발의 필연성과 역사적 업적을 폄훼하고,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통하여 현대사를 왜곡한다. 이런 세력이 현재 정치, 사회, 문화, 언론출판, 예술, 교육, 노동 등 한국 사회 전반에 포진하여 사람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의 문제, 보수적 가치와 진보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다. 아나키즘과 주사파사상이 왜 경계하고 타파해야 할 대상인가? 그 해답은 그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들의 삶은 자기모순과 이율배반, 내면의 가치전도(價値顚倒)로 점철되어있다. 그들은 양심과 부끄러움을 모른다.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실을 왜곡하고 부정하고, 허구를 실체로 둔갑시키고, 타인의 행위를 비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행위를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한다. 그것은 불행이고, 사회악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인간, 죄 용서함을 받아 구원을 얻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천국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성경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상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에 주목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인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는 곧 악한 사단 마귀이다. 하나님의 일을 대적하는 사단 마귀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사람, 하나님 나라 백성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미혹시켜서 그들의 종으로 만든다. 아나키즘과 주사파사상은 바로 이런 세력 아래 있음을 교회는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하고 타파토록 해야 한다. 교회는 그런 세력과 결코 동반할 수 없다. 교회가 그들을 용납하는 것은 공중 권세 잡은 악의 세력을 교회에 초청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Ⅳ. 나가는 말

중세 사람들이 페스트를 겪으면서 삶의 방식이 송두리째 변화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는 코로나를 겪으면서 유사한 변혁을 맞이하였다. 세상은 급격히 요동치는데, 어떤 식으로 변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 교회도 그 영향을 오롯이 받는다. 코로나 와중에 부득이하게 등장한 ‘비대면 예배’는 우리에게 예배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격변의 전주곡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격랑 속에서 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이 글에서는 우리의 신앙 자세와 가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몇 가지만 언급해 보았다. 다음 세대를 위한 교육의 올바른 제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영역으로, 그분께서 때를 따라 역사하실 것이다. 그리고 귀 있는 자들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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