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욱 교수
신성욱 교수

[1] 최근 한 달 반 전후로 가슴 졸인 경험을 두 번씩이나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아침에 자고 일어나보니 새벽 5시 30분쯤 전화가 와 있었다. 새벽엔 아무도 전화를 하지 않는다. 미국의 지인들이나 아이들도 국내 전화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카톡으로라도 여기 잠든 시간에 전화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지인이 새벽같이 전화를 했다면 한 가지 외에는 가능성이 없다. 부고 소식 말이다. 하지만 부고라 해도 가족의 일 외엔 그 시간에 전화를 하지 않는 법이다.

[2] 약 한 달 반 전 아침 7시 반쯤 자고 일어났더니 전화가 한 통 와있었다. 바로 총신대 전 총장을 역임하셨던 김인환 교수님 이름이 찍혀 있었다. 평소에 친하기도 했지만 고등학교 선배이기도 하신 분이다. 그간 폐암으로 투병 중이셨지만 석 달 전쯤 만났을 땐 그 몇 달 전에 뵈었을 때보다 더 건강하셨기에 웬 일인가 싶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드렸더니 다행히 그분 목소리였다.

[3] 그런데 그 소리는 죽음을 눈앞에 둔 듯한 사람의 목소리임을 단박에 감지할 수 있었다. 몸속 기운이 다 빠져나간 유약하고 깡마른 소리였다. 발음이 제대로 되질 않아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그토록 당당하셨던 이의 목소리가 전혀 아니었다.

“신 교수, 나 머리가 너무 아프네. 이젠 삶을 정리해야겠어요!”라고 하셨다. 그리곤 “초죽.., 초죽.., 초죽..”이라고 계속 연발하시는 것이었다.

[4] “‘초죽’이 뭐죠?”라고 물었더니, “단어가 생각나질 않는다”시며 ‘초죽음’이란 말이 그리도 생각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 하셨다.

그 후 약 1주일 뒤에 그분은 세상을 떠나셨다. 다른 교수 두 분과 같이 병원에 면회 가려했는데 그 전에 훌쩍 떠나버리셨다. 사실은 가시기 전에 면회 갈 예정이었으나 내 개인 사정으로 며칠 늦추는 바람에 얼굴을 대면하지 못한 채 천국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5] 지금도 죄송하고 아쉬운 마음 금할 길 없다. 평소 내가 아는 김인환 총장님은 친화력도 있으시지만 성격이 아주 강하고 불같은 사나이기도 하셨다. 총장이 되시고 한 번은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총장님은 신학교 교수보다는 육군사관학교 출신 장군이 더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랬더니 실은 고등학교 때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해서 1차에 합격을 했는데, 신원조회에서 가까운 친척에게 문제가 있는 바람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해주셨다.

[6] 그 일 아니었으면 육군 장성이나 국방부 장관 김인환을 볼 수도 있었을 텐데, 아무래도 신학교에서 사역하라신 하나님의 뜻이 계셨던 것 같다.

장례식장에 가서 사모님으로부터 임종 시 총장님의 모습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내 주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라는 찬송을 부르시다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라”는 말씀을 남긴 채 머나먼 아버지 집으로 떠나셨다 한다.

[7] 한 주 전 통화하며 목소리 들었던 분이 이 땅을 떠나 천국에 입성했다 하니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 지금으로부터 두 주 전, 아침에 깨서 핸드폰을 봤더니 이번엔 또 다른 사람이 아침 7시쯤에 전화를 했다. 이종 사촌 동생이 한 것이다. 그 시간도 큰 일이 아니고선 연락할 타이밍이 아니었다. 깜짝 놀란 나는 ‘혹시 이모가?’라는 불길한 맘이 들었다.

[8] 그래서 다급하게 전화를 했더니 동생이 울먹이면서 “~~가 갔어!”라는 것이었다. 누가 갔다는 건지 제대로 듣지 못한 나는 “누가 갔단 말야?”라고 했다. 그랬더니 지 동생이 갔다는 것이었다. 깜짝 놀랐다. 혈액암으로 몇 년 간 고생하면서 골수이식도 받고 이젠 다 나아간다고 생각했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일예배에 축도까지 하고선 다음날인 월요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9] 서울에서 부목사 사역을 하다가 수년 전 익산에 내려가 담임 목회를 하고 있던 목사 동생이었다. 그 전날까지 난 익산에서 가까운 전주의 한 호텔에 있었다. 주일예배를 익산에 있는 동생 교회에서 가서 드리고 얼굴도 보고 올까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친구 목사님 교회서 설교해달라 하는 바람에 가질 못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거길 갔었을 텐데…’라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10] 이번에는 착하고 순진하기만 하던 동생은 우리 앞서 천국으로 떠나갔다. 사랑하는 제수씨와 2남 2녀와 모친과 형제와 친척들과 성도들을 남기고 말이다. 남은 가족은 어쩌라고 저 혼자 천국엘 갔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이제 다음 주면 성탄절, 성탄주일, 송구영신, 신년 첫 주예배가 다가온다. 그저께 익산의 제수씨가 전화를 했다.

[11] 남편 대신 성탄절에서부터 신년 첫주예배 설교까지 내려와서 대신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학생들 성적 내느라 바쁘긴 하겠지만 평생 처음 제수씨한테 받는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담임 목회한 지도 20년이 지났는데 절기설교를 네 편이나 해야 한다. 그것도 담임을 잃고 슬픔에 빠져 있는 유족과 성도들이 있는 교회에서 말이다. 가겠다고 대답했지만 꽤 부담이 크다.

[12] 며칠 전, 페이스북에 동생 이름으로 아이들이 올린 영상이 올라왔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찬양하고 말씀 전하는 모습인데, 마지막에 큰 아들이 임종 직전에 있는 자기 아빠에게 한 마디 남겨달라는 얘기가 나왔다. 어떤 말이 나올지 슬픔을 참으면서 들어봤다.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인데, 밑에 자막이 나왔다. 사랑하는 동생 목사가 남긴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하나님 밑에서… 하나님 밑에서(의존해서) 잘 살아라!”

[13] 과거 “45분 만에 죽는다!”라는 의사의 사형 선고도 받고 미국서 매주 통학하다가 네 번씩이나 차 사고가 나는 바람에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가본 경험이 있는 나로선 생각이 깊어졌다.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별을 가까이 경험하면서 다시 한 번 이 땅에서의 삶이 순간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절감하게 됐다.

[14] 다음엔 내 차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진하게 들었다. 순간 즐겨 암송하는 골 3:1-2절이 떠올랐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여러 번 사선을 넘었음에도 여전히 이 땅에 미련과 생각이 많은 내 모습을 본다.

[15] ‘이 지긋지긋한 코로나19는 언제 종식될 것인지?’ ‘차기 대통령은 누가 될 것인지?’ ‘앞으로 이 나라는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 앞서 본향으로 떠난 두 사람과 성경은 이렇게 도전한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이다.

매일 매순간 주님 재림과 개인 종말이 더욱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젠 땅의 것보다 위의 것에 더 신경 쓰는 삶을 살아야겠다 다짐해본다.

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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