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6.25의 기적들' 시리즈를 연재하는 중에 다소 엉뚱한 주제가 떠올랐다. 전쟁 이야기 대신에 문화·예술계에서 알려진 '6.25의 기적'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전에 읽었던 김은국의 <순교자>나 황순원의 <학>과 같은 문학 작품도 생각나고, 이중섭이나 박수근의 미술 작품도 떠올랐지만 '기적'이라는 컨셉과는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필자에게도 추억이 있는 작곡가 나운영(1922-1993)의 안타까운 가족사가 떠올랐다. 나운영은 우리의 전통 음악과 서양 음악의 융합을 시도하여 한국적 음악세계를 개척한 작곡가이자, 한국교회 음악사에서 가장 많은 찬송가를 쓴 작곡가다. 나운영에 대해서는 나운영기념사업회 홈페이지(www.launyung.co.kr) <나운영의 생애와 작품>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그의 작품 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안겨 준 사건이 바로 6.25전쟁이다.

1922년 3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난 나운영은 미동보통학교와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1940년 일본 동경제국고등음악학교에 유학하여 작곡을 전공했다. 1942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조선정악전습소에서 민완식 선생에게 양금을 사사하는 한편 첼로 주자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1945년 4월 모교인 중앙중학교 음악 교사를 시작으로, 그해 9월에는 중앙여전(현 중앙대), 그리고 1948년부터는 서울대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1945년 6월에는 동경 유학시절에 만난 성악가 유경손과 결혼식을 올렸다.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운영 유경손 부부의 결혼 사진 ©김형석 교수 제공

1950년 6.25가 발발했을 당시에는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음악부 전임강사로 활동하며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 있던 탓으로 낮에는 마루 밑에 들어가 숨었다가 밤이 되면 방으로 올라와 사는 힘든 세월을 보내야했다. 이 같은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떨리는 심정으로 작곡한 작품이 10월 22일 작곡한 성가 독창곡 <주기도 1>이다. 그런데 9·28 수복으로 승승장구하던 아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남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나운영은 12월 해군 군악대 군악대장 김준덕의 도움으로 해군본부 군악대 문관에 취임하여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나운영 부부는 부산 영주동에 있는 허 립 교장의 집에 방을 얻어 본격적인 피난 생활을 시작했다. 유경손은 길거리에 좌판을 깔고 앉아 피난 가면서 가져간 물건들을 팔았고 나운영은 국민 개창운동을 위해 각 지역을 돌며 활동하였다. 1953년 해군 정훈학교 채플에서 찬양대를 지휘할 때의 일이다. 당시 군목이던 정달빈 목사가 그에게 '외국의 유명 성가곡도 좋지만, 한국인이 만든 성가는 없는가? 만약 없으면 나선생이 작곡해서라도 한국의 정서가 깃든 음악으로 찬양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산 피난시절의 나운영 가족 ©김형석 교수 제공

그날 저녁 나운영은 네 식구가 생활하는 단간방에서 기도하는데, 시편 23편 구절과 함께 곡조가 들려왔다. 오선지를 펴고 들려오는 곡조를 베꼈다. 3분 남짓한 시간에 반주곡까지 완성되었는데, 이후로도 단 한 번도 수정을 한 적이 없는 작품이다. 그 날이 1953년 5월 3일 일요일이었다. 보통 때는 악보를 보면서 멜로디만 베껴도 3분 이상 걸릴텐데 반주까지 다 붙이고도 3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이 때문에 나운영은 늘 입버릇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구로 삼으셔서 탄생한 '영감(靈感)에 의한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나운영이 이 곡을 3분만에 작곡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 이면에는 피난살이의 고통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겨내려는 강한 신앙심이 자리한다. 이 곡이 해군 교회에서 알토 유경손에 의해 초연되었을 때 연주자와 교인들은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피란시절의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절박함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젊은 음악가의 마음에 공감하였기 때문이다. 나운영이 한국적인 성가를 작곡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1950년대 진해 해군통제부교회(좌) 독창하는 유경손(우) ©김형석 교수 제공

이렇듯이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6.25전쟁의 와중에 탄생한 노래로 오늘날까지 교회와 성당의 예배(미사)에서 널리 애창되는 성가곡이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곡 배경에 대한 잘못된 주장이 있어서 지적한다. 김진홍 목사는 2014년 <크리스천투데이>에 기고한 글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6.25전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진해에 잠시 머물던 피난시절에 연세대 나운영 교수가 작곡하였고,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참석한 첫 주일예배에서 초연되었다"(크리스천투데이, [김진홍의 아침묵상]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2014.7.28)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2020년 7월 7일자로 <크리스천투데이>에서 동일한 기사를 재게재한 후에 인터넷 상에서는 김진홍 목사의 설교문으로 널리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왜곡된 부분을 지적하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는 1950년 6.25전쟁의 발발 초기에 작곡된 노래가 아니고, 1953년 5월 6.25전쟁이 끝나가던 시절에 작곡된 노래이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나 1950년 9월 초량교회에서 열린 구국기도회와도 전혀 관련이 없는 노래이다.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부산 피란 시절의 판자촌과 아이들 ©김형석 교수 제공

1953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로 환도하면서 나운영도 부산 피난시절을 마감하고 서울 청파동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9월 24일에는 이전에 <아흔 아홉 양>이라는 작곡집을 보내 자문을 구하였던 국립 파리음악원의 메시앙 교수로부터 입학 초청을 받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운영: 대한민국 부산시 남부민동 22번지에 살고 있는 한국인 작곡가, 예술대 교수.

"노래와 피아노를 위한 멜로디를 주의 깊게 읽어 보았습니다. 몇 개의 한국식 반음계로 이루어진 5음 음조로 쓰여진 멜로디 곡선들로 인해 멜로디들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노래 성격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반주 또한 그러했습니다. 당신은 면학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어와 서양 음악기술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인들에게 한국 음악을 알리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당신이 파리예술학교 우리 학과의 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것을 기꺼이 환영하는 바입니다. 1953. 9. 24. - 올리비에 메시앙(파리국립음악원 음악분석 교수)"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파리 국립음악원 입학 허가서 ©김형석 교수 제공

이에 감격한 나운영이 프랑스 유학을 위해서 여권 수속을 시작하자 여행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연좌제 때문이었다. 그의 셋째 형인 나순영(1919-2005)은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미생물학교실 조교수로 근무하던 기생충학 전문가였다. 이와 함께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에 나오는 잉글리쉬 혼(일명 오보에)을 불 수 있는 전문 연주가로 경성제대 관현악단과 고려교향악단 등에서 오보에 주자로 활동하던 음악 애호가였다. 그런데 이유도 알 수 없이 6.25 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었다.

이로 인해 나운영은 신원조회에서 걸린 것이다. 당시는 월북하거나 납북된 가족에 대한 연좌제가 있어서 해당자는 유학은커녕 해외여행도 금지되던 시대였기에 그의 프랑스 유학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나운영은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유학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불가 판정이 내려졌다.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사무친 한이 되었는지 나이가 50대 후반이던 1978년에도 이태리 유학을 시도하였으나 그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오보에를 든 라순영 박사 ©김형석 교수 제공

2000년 4월 초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필자는 중국을 거쳐 귀국하는 비행기에서도 온통 구충제 생각뿐이었다. 당시 한민족복지재단 사무총장으로 북한어린이돕기 사업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필자는 조선의학협회 장도경 치료예방부장으로부터 어린이 집단 구충사업을 요청받고 공동으로 추진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귀국한 후 수소문 끝에 한국건강관리협회 임한종 회장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 단체의 옛 이름은 한국기생충박멸협회로서 필자가 학창시절 학교에서 봄과 가을에 기생충약과 채변 봉투를 나눠주면서 집단구충사업을 시행하던 곳이다.

필자를 만난 임한종 회장은 자신과 협회에 관한 얘기부터 꺼냈다. 평양 출신인 임 회장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기생충을 전공하고,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평생을 기생충만 연구한 학자로 한국기생충박멸협회 설립부터 참여하여 회장에까지 이르렀다. 한국건강관리협회는 1960년대 일본으로부터의 지원을 기반삼아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역량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뒤이어 임 회장은 책상 위에 걸린 지도를 가리키며 북한의 기생충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전주 예수병원을 찾은 9세 여아에게서 나온 기생충 1,063마리 (1963.10) -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건강관리협회가 설립되었다 ©김형석 교수 제공

"WHO에서 발행한 지도를 보면 기생충이 박멸된 국가는 흰색 바탕이고, 그렇지 못한 국가는 빨강색으로 칠했는데, 주로 선진국은 흰색이고 후진국은 빨강색입니다. 한반도의 남측은 흰색, 북측은 빨강색으로 그동안 북한에서 구충사업을 시행하려고 WHO와 러시아, 중국을 통해 여러 방면으로 접촉해도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대신 중국 라오스 등 여러 국가에 구충사업을 지원하고 있는데, 박사님을 통해 북한에 길이 열린 것이 기적입니다. 북한 어린이 집단구충사업은 우리 협회와 WHO의 당면 현안이자, 나의 필생의 소원입니다."

역사학자로 기생충에는 문외한이던 필자는 구충사업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 방문한 한국건강관리협회로부터 북한 어린이 집단구충사업을 함께 진행키로 합의하는 뜻밖의 성과를 거두었다. 합의를 마치자 임 회장은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둔 얘기를 꺼집어냈다. 1949년 경기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대 의대 조교수이던 나순영 박사의 지도로 개구리 기생충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낸 것이 전국과학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기생충 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한국의 해외 기생충 퇴치사업 현황(북한은 2000년의 오기)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런데 이듬해 6.25가 일어나고 나순영 박사가 전쟁 중에 납북이 된 후에 북한에서 활동하면서 기생충에 관한 연구 논문을 국제적인 학술잡지에 계속 발표하는 것을 보고 꼭 다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면서 생사 여부라도 확인해주기를 당부하였다. 필자가 라순영 박사의 존재와 라운영 교수의 가족사를 알게 된 사건이었다.

4월 19일 나와 만나 집단구충사업을 펼치기로 약속했던 임한종 회장은 신풍제약의 도움으로 기생충약 200만정과 검사에 필요한 도구 일체를 마련하였고, 이것을 전달 받은 한민족복지재단에서는 북한으로 반출한 뒤 9월 19일부터 한국건강관리협회 대표단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였다. 일행은 필자와 한국건강관리협회 대표단 5명, 동아일보 문철 기자 등 7명이었다.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한국건강관리협회의 구충약품 전달식(2001.9.20) ©김형석 교수 제공

방북 다음 날 한국건강관리협회와 조선의학협회는 향후 5년간 집단구충사업을 공동으로 진행하는데 대한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이번 일정의 하이라이트는 임한종 회장이 그토록 간절히 찾던 스승 나순영 박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이 날의 장면을 동행 취재한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50년 만에 평양서 北 스승 - 南 제자 상봉. 21일 밤 평양 고려호텔에서는 남북 기생충 학자들 간에 뜻 깊은 만남이 있었다. 북한어린이돕기사업(한민족복지재단 동아일보 공동 주최)을 위해 방북한 남측 학자들이 250만 북한어린이구충사업을 위해 북한 학자들과 처음으로 머리를 맞댄 것. ... 이 자리에는 남북으로 갈려 반세기 동안 만나지 못했던 스승과 제자도 있어서 의미가 더 깊었다. 임한종(69·고려대 명예교수) 한국건강관리협회장은 스승인 조선기생충학회장 나순영 박사교수를 만나 감격의 포옹을 했다.

해방 직후 서울대 의대 조교수였던 나 교수는 일본 학자들이 돌아가고 국내에 기생충 학자가 전무한 상태가 되면서 전공이었던 소아과를 포기하고 기생충학에 몸을 던진 한국 기생충 학계의 1세대 학자. 그는 임 회장의 경성제1공립고등학교(경기고의 전신)와 서울대 의대 14년 선배로 임 회장으로 하여금 기생충 학자가 되도록 만들었던 인물로 북에서도 기생충 박멸의 공로로 남쪽의 학술원 후보회원에 해당하는 후보원사에까지 올라 있었다.

임 회장은 나 교수를 보고도 처음에는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혹시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해서다. 다행히도 나 교수와 함께 나온 조선의학협회 인사가 "나 선생은 서울대 의대에서 교수를 하신 분"이라고 소개를 해 두 사람은 사제지간임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임 회장은 나 교수를 만나고 난 뒤, 나 교수가 북으로 가게 된 일화를 이렇게 들려줬다.

"학창시절 선생님은 영국인 교수로부터 선물 받은 클라리넷을 애지 중지했다. 6·25가 나자 서울에 들어 온 인민군이 악주단에 클라리넷이 필요했던지 선생님께 클라리넷을 잠시 빌려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생명과도 같은 클라리넷을 빌려줄 수가 없어서 차라리 내가 직접 가서 불어주겠다며 나갔다. 이후 선생님을 뵐 수가 없었다."(2000.9.22, 평양 = 문철 기자)

6.25의 기적들⑦ -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50년 만에 상봉한 남 제자 임한종 박사(좌), 북 스승 나순영 박사(중) ©김형석 교수 제공

필자는 나 박사의 곁에 앉아 사제지간의 대화를 듣고 있노라니 하고 싶은 얘기도, 묻고 싶은 얘기도 많았다. 연세대 음대 교수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성곡을 작곡한 동생 나운영 교수의 소식은 아는지? 당신의 유복자가 지금 뉴욕에서 소아과 의사로 활동하는 사실은 아는지?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 었지만 혹시 나순영 박사에게 누가 될까봐 한 마디도 꺼낼 수가 없었다.

나순영 박사와의 회동을 마친 일행은 호텔 내의 찻집에서 잠시 환담을 나누었다. 필자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한국건강관리협회를 만나 북한어린이 집단구충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은 기도의 응답이자 기적이라고 말하자, 경동교회 장로이기도 한 임한종 회장은 임기를 마치기 전에 필생의 숙원이던 북한어린이 집단구충사업을 시행하고 꿈에 그리던 은사를 50년 만에 상봉한 모든 것이 예상도 못한 축복이고 기적이라고 응답했다.

이렇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종교음악가 나운영의 작품세계는 6.25전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그의 대표작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도 6.25전쟁의 고난 가운데서 탄생한 기적이었다. 더욱이 다른 사람들은 3년 만에 끝이 났던 6.25의 상처가 그에게는 연좌제로 인해 30년 동안이나 더 지속되었다. 1993년 나운영이 세상을 떠나고 7년이 지난 후에야 필자는 임한종 교수와 함께 또 다른 비극의 주인공 나순영 박사를 만날 수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마치 한 편의 잘 짜여진 드라마처럼 다가왔다. 나운영 형제에게 나타난 6.25의 기적은 그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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