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김형석 목사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1593년 2월 전라순찰사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에서 왜군 3만여 명을 격퇴한 행주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김시민 장군의 진주성 싸움'과 함께 ‘임진왜란 3대첩’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행주대첩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권율 장군의 철저한 준비와 뛰어난 전략에 부응한 조선군의 용맹함이 빛났을 뿐 아니라, 성안의 모든 백성이 힘을 합쳐 싸워 승리한 전투라는 점이다. 이때 여자들이 긴 치마를 짧게 잘라 허리에 두른 뒤에 돌을 담아 나른 데서 ‘행주치마’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6.25전쟁 때도 이와 비견할만한 사례가 있다. 행주대첩처럼 군과 민간인이 힘을 합쳐 북한군을 크게 무찌른 전투가 바로 문경 적성리전투이다. 그런데 문경전투라고 하면 1950년 7월 12일부터 7월 31일까지 경북 문경의 이화령 지역에서 국군 제6사단이 북한군 제1사단과 벌인 ‘이화령 전투’와 영강 상류지역에서 벌인 ‘영강지구 전투’도 있다. 따라서 이들 전투와 구분해서 적성리전투라고 불러야 한다.

이 전투가 특별한 이유는 국군이 아니라 미군 예하 한국인 특수전부대가 북한군을 상대로 싸웠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주민들이 1971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전승비와 순국위령비를 세우고 이 사실을 보전하였다. 그러던 중 2001년 6일 25일 문경시가 현재의 전승기념비와 순국위령비를 새롭게 제작한 것을, 2003년 12월 국가보훈처에서 현충시설로 지정하여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2020년 2월 경북 북부 보훈지청에서 '우리 지역 보훈시설'로 지정한 것을 계기로 언론에 알려지게 되었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김형석 교수 제공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미군 예하 한국군 특수전부대(Special Activities Group)의 존재다. 이 부대는 미 제10군단장 예하의 직속부대로 1950년 일본에 있는 미군 비밀캠프에서 기초적인 무기 다루는 법부터 공수훈련까지 강도 높은 교육을 받았다. 12월 15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흥남철수작전에 투입되었으나, 적군과의 교전은 없이 마지막에 철수한 부대로 24일 오후 함남 연포비행장에서 부산 수영비행장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다음 날인 25일부터 곧장 부산 북방 50㎞ 지점인 경남 울주군 상북면의 1,209고지(신불산)로 전진하여 공비 잔당 소탕작전에 참가하였고, 경주와 영천을 거쳐 1951년 1월 10일에는 안동에 이르렀다. 이렇게 계속된 강행군으로 인해 매우 지쳐있었지만, 일반 보병 부대보다 화력과 장비가 월등하게 우세했다. 개인 장비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M-2 칼빈자동소총과 경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로켓포 등 중화기 반원들은 권총까지 이중으로 무장하였다. 이 때문에 특공대대는 제10군단 특수전부대(S.A.G)의 단장인 하네스 중령의 통제 하에 있었다.

당시 전황은 중공군이 1월 1일을 기해 38선 부근에서 전면적인 공격을 전개함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두 번째로 서울을 포기하고 안동선까지 밀리던 중이었다. 이와 같은 전선의 위기를 타개하고자, 미 제10 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한국군 특공부대를 신설하고 배동걸 소령을 대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갑작스럽게 특공대대가 편제되면서 1중대장 윤성모 대위, 2중대장 손장래 중위, 3중대장 정창화 대위 등 300명이 다른 부대에서 전속되어 왔다. 따라서 대대장 배동걸 소령과 미 고문관 3명, 통신 하사관 등 극소수 인원을 제외하면 급조된 부대였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낚시배까지 동원한 배를 타고 흥남항을 떠나는 북한 피란민과 흥남철수 작전일정과 철수방향/이동로 ©김형석 교수 제공

<山河: 恩惠의 삶-김진휴 회고록>에는 미 10군단 예하 특수전부대(S.A.G)에 관해 보다 구체적인 증언이 나온다. 일명 '레인저(Ranger) 부대'라고 불렸는데 비정규전을 주로 수행하는 소 부대로 주 저항선 바로 후방에서 사령부에 대한 측방 경계를 담당했다. 일반적으로는 적의 패잔병을 소탕하고 주요 보급로를 확보하면서 피난민을 정돈하는 등의 단편적인 임무를 담당하지만, 필요에 따라서는 수색과 정찰 임무도 수행했다. 지휘 체계는 미군의 베테랑 직업군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미 10군단 예하 특수전부대는 3개 제대로 편제되었다. 제1제대는 미군들과 일본에서 훈련받은 국군 사병(카츄사의 전신)으로 구성하고, 제2제대는 배동걸 소령이 지휘하는 한국군에다가 미군 고문관이 배치되었다. 그런데 배동걸의 <장교자력표>를 보면 1950년 9월 11일 미군에 편입(육본특명 148호)되었다. 따라서 이 자료를 토대로 유추해보면 배동걸은 미군 예하 한국군 특수전부대 책임자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훈련을 받고 제1제대 지휘관으로 함흥 전선에 투입되었으며, 적성리전투를 앞두고 제2제대가 신설되자 대대장으로 보임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해서 제3제대는 미군 지휘관 아래 주요 보직은 미군이 담당하고, 병력은 서울시 경찰국에 소속된 경찰관들이 1.4후퇴 때 대구에 재집결한 경찰이었다. 김진휴가 본 배동걸 소령의 모습은 미군 소령 계급장에 무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주일 미군사령부에서 교육받은 특수부대의 한국군 책임자였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레인저부대 출신의 6.25참전용사 랄프 대령 훈장수여식에 무릎 꿇은 한·미 대통령(2021.5.21) ©김형석 교수 제공

적성리전투의 개황에 대해서는 많은 글이 나와있기 때문에 필자는 <문경 향토 역사관>에 수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소개한다. 1월 11일 안동에서 차량으로 점촌에 도착한 특공대대는 12일 미명에 동로면 적성리를 향하여 행군을 시작했다. 적이 단양에서 남하하려면 이 계곡을 통과하지 않고는 자유롭게 침투할 수 없는데다가, 적성리는 단양, 영주, 문경, 점촌, 예천 등을 연결하는 원주상의 구심점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첨병부대인 2중대(중대장 손장래 중위)가 수평리를 지날 때, 동로 지서 소속 경찰과 청년 방위대원 60여명이 합류했다. 이들은 단양에서 피난 온 주민들로부터 '북한군이 대구 남쪽의 경산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받고 적성리로 전진한다'는 정보를 전해 들었다. 2중대는 이들의 안내로 적성리까지 안전하게 이동해할 수 있었다.

오후 2시경 본대가 도착하자 대대장 배동걸 소령은 동로면 경찰지서 뒤편 적성리 언 땅에 진지를 구축하고 야영할 것을 지시했다. 작전장교 겸 2중대장 손장래 중위(육사 9기)로부터 적정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받자 사주경계를 강화하면서 야전에서 숙영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예상대로 밤이 깊어지자 단양 고개에 파견 나간 매복조와 북한군 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북한군 제10사단 예하 1개 연대의 포위 속에 눈이 수북히 쌓인 전선에 북소리, 꽹과리 소리와 함께 총성이 진동했다. 그렇지만 매복조는침착하게 대응한 결과 30여분의 교전 끝에 적을 격퇴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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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공대대 작전장교 겸 2중대장이던 손장래 장군이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김형석 교수 제공

날이 밝자 2차 공격이 재개되었고 한때 2중대 정면이 돌파되었지만 1중대와 3중대가 좌우에서 협공하여 물리쳤다. 3차 공격은 3중대 정면으로 돌진해왔지만 경찰지서의 견고한 방벽에 의지하여 물리칠 수 있었다. 다음날에는 4차 야간공격이 있었지만 특공부대는 조준사격 거리까지 접근을 기다렸다가 격퇴시켰다. 이때 미 고문관의 유도 아래 적진에 헬기에서 기총 소사와 네이팜탄을 투하하고, 아군에게는 식량과 탄약을 보급해주어 사기가 높아졌다. 15일 5차 공격을 끝으로 북한군은 단양 방면으로 완전히 퇴각했다.

16일 특공대대는 북한군 제10사단의 1개 연대가 완전히 섬멸된 것을 확인하고, 이날 미 제10군단의 명령에 의하여 충주 방면으로 전진하였다. 집계된 북한군의 사망자는 1,247명, 포로 79명(대좌 등 7명의 군관 포함), 부상 900여 명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아군은 국군 9명, 민간인 4명, 청년 방위대원 7명이 희생된 것에 불과했다. 전투에 참전한 미 제10군단 예하 특공대대 병력 300명이 북한군 제10사단 예하 연대 3,000명을 상대로 거둔 대첩이었다. 군경과 방위대원, 지역 주민들이 함께 이룬 승리였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김형석 교수 제공

전투가 끝나고서야 증원부대가 도착했는데, 특수전부대 단장 하네스 중령은 공전의 대대적인 전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심지어 특공대대 장병들조차 자신들이 거둔 전과를 확인하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승전 보고를 받자 흥분한 상태에서 참모진을 대동하고 헬리콥터로 날아왔다. 대대장 배동걸 소령으로부터 전과를 보고 받는 자리에서 '가장 훌륭한 장교'라고 극찬하였다. 한편 육군 본부에서도 부관감 이지형 준장이 현지에 내려와 전과를 일일이 확인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1월 31일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은 또다시 특공대대장 배동걸 소령 앞으로 찬사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찬사! 1. 미 제10군단에 의한 북한군 제2군단 격멸에 있어서 특공부대가 성공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으므로 이에 그 공적을 찬양하는 바입니다. 2. 특공부대는 그보다 수배나 되는 큰 부대가 담당해야 할 지역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기동성과 탁월한 지휘정신으로 숫적으로 훨씬 우세한 적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것입니다. 3. 본관은 특공대대가 맡은 바 사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성공적이었음을 치하하는 바입니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인천상륙작전 당시 맥킨리 호 함상에서 맥아더 장군(1열 중앙)과 알몬드 장군(우측) ©김형석 교수 제공

2015년 6월 24일 국방TV는 '6·25전쟁 65주년 특별 기획' 시리즈 두 번째로 「문경전투, 전선의 운명을 바꾼 그날」을 방송하면서 당시의 전황과 문경 적성리전투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하였다.

"1951년 1월,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평택-원주-삼척을 잇는 'D라인'까지 후퇴했다. 그런데 12일에 문경으로 북한군 최정예 사단이 침투했다. 문경은 'D라인'보다 70㎞ 후방이며 전략적으로 대구로 가는 요충지이다. 이때 3백명의 정찰대 병력으로 북한군 정예사단 3천여 명과 싸워서 승리한 전대미문의 전사이다. 만약 이 전투에서 패했다면 한반도는 남북이 아닌 동서로 분할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인천상륙작전, 1.4후퇴 등의 굵직한 역사의 변곡점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 적성리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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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TV가 '6·25전쟁 65주년 특별기획'으로 방영한 「 문경전투, 전선의 운명을 바꾼 그날」(2015.6.24) ©김형석 교수 제공

그야말로 기적(?) 같은 승리였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필자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분석한다.

첫째, 대대장 배동걸 소령을 비롯한 지휘부의 정확한 판단과 특공대대 장병들의 강인한 전투력이다. 12일 적성리에 도착한 배동걸 대대장은 긴급 작전회의를 열었다. 다수의 의견은 전술임무 수행에 불리한 저지대 지역인 이곳에서 철수하자는 주장이었다. 아군의 역할은 적정 탐색 임무를 띤 부대이기 때문에 수많은 희생을 강요당하면서 적군과 대치할 필요가 없고, 계속 싸우다가는 전멸할 수도 있지만 남쪽으로의 퇴로는 개척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배동걸 소령도 위기를 벗어나고 싶은 심정이었고 미군 고문관들도 대대장의 결심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막대한 희생을 치룰 수 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대대장이 독단적으로 진지 사수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증원부대가 올 것이다"고 부하들을 격려하면서 생사를 건 전투를 치루었고, 그 결과는 한국전쟁사에 길이 남을만한 승전으로 나타났다.

그뿐아니라 적성리 야산에서 숙영하는 문제를 결정할 때도 그는 행군에 지친 병사들을 고려하여 동로국민학교에서 유숙할 생각이었지만, 첨병부대로 정찰 업무를 수행하면서 먼저 도착한 작전장교 손장래 중위가 적정이 불명확한 상황이고 언제 어느 방향에서 침공해 올지 모르는데 대비하여 참호를 파고 야영할 것을 건의하자 그 의견을 따랐다. 자신의 판단이나 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부하의 생각을 존중한 그의 열린 태도가 그날 밤 북한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유능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을 보여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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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배동걸 대령과 6.25전쟁 때의 전공으로 한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무공훈장들(차남 배영훈 제공) ©김형석 교수 제공

둘째, 적성리 주민들의 확고한 애국심과 적극적인 참전 활동이었다. 당시 적성리 주민들은 피난을 가지 않고 오히려 청년 방위대를 통해 특공대대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청년 방위대원들은 지서 병력과 함께 소련제 보총 또는 99식 소총으로 무장했는데, 실탄이 5발 뿐이었기 때문에 함부로 쏘지 못하고 적군을 죽일 수 있을 때만 사격하였다. 미군 헬기가 동로국민학교에 보급품을 투하하자 방위대원들은 총탄이 빗발치듯 쏟아지는 가운데도 보급품을 군인들에게 운반하는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적성리전투가 행주대첩에 비교되는 이유이다.

이 과정에서 직접 교전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아군을 돕다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주민이 다수 발생하였다. 이런 안타까운 사정을 고려하여, 2001년 6월 25일 적성리 전투승전비와 순국위령비를 건립하였다. 영남대학교 미술대학 오용환 교수가 만든 조형물의 높이는 570㎝로, 상단의 두 손이 갈라지는 모양은 받드는 두 손을 상징, 중상단부분의 검은 테두리는 순국하신 영령들의 이미지를 상징한다. 그 앞에는 위령비와 전승비가 나란히 서 있는데, 비문에 새긴 글과 사상자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위령비 비문> 해방 이후 우리 겨레와 이 고장을 수호하다가 많은 청년이 붉은 도배들과 싸워 장열하게 전사 또는 순국하였으니, 특히 6.25를 전후한 어지러운 시기에 이 고장에 벌어진 전투 중 1951년 1월 13일부터 1월 16일까지동로로 남하를 기도하던 적 사단규모의 대병력과 대적하여 우리 젊은이들은 군과 경찰을 도와 일기당천의 용맹으로 크게 용전분투하여 대성을 거두었으니, 이 어찌 장하지 않으리. 황장산을 전투장으로 이 고장을 간성으로 지켜 주시다가 순국하신 거룩한 넋이시여 고이 잠드시라.

<대한청년단 동로면 단부 전몰용사 명단> 김동한, 김사룡, 김을룡, 김자현, 김창식, 김정기, 김정의, 김정태, 김태진, 강명수, 강덕수, 김윤식, 민재홍, 박종호, 박기화, 박노익, 손병룡, 손효원, 손일성, 이윤재, 이양배, 이강백, 정한영, 최명록 <전상자 명단> 장환덕, 이승우, 김중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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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걸 소령의 차남 배영훈(65)이 적성리 순국위령비를 찾아 경례하고 있다.(2021.6.5)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배동걸 소령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필자가 고인의 차남인 배영훈(65)에게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1926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로 이사하였다.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5기생으로 입학하였다.

1948년 4월 6일 소위로 임관한 5기생들은 6·25가 발발했을 때 소령이나 대위로서 대대장이나 연대 참모로 진출해 있었다. 임관한지 2년이 갓 지났으나 전국에서 발생한 잇단 반란사건과 무장공비 토벌로 쌓은 실전 경험을 갖추고 전투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이 2/3나 되었던 탓에 공산당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던데다 최일선 부대의 지휘관이었던 만큼 희생도 컸다. 3년동안 전쟁을 치르며 380명의 동기생 가운데 1/3에 가까운 97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되었다.

배동걸은 미군 특수전부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수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렇지만 적성리전투가 끝난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록만 발견할 수 있다. 7월 20일 육본 특공대 소속으로 27명의 특수전 요원을 이끌고 김제 정읍 등지에서 해병대 및 전남 경찰과 합동으로 '호남 서부전선 지연전'을 전개했다. 중령으로 진급한 후에는 2사단에서 김웅수 사단장 휘하 참모장 특별보좌관으로 근무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동아일보(1953. 9.4)에는 "국군 882부대장 배동걸 중령이 미 10군단장으로부터 동성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는 기사도 등장한다.

1962년 7월 15일 배동걸 대령은 자원 전역하였다. 정확한 사유는 알 수가 없지만, 일설에는 부사단장으로 근무하던 중에 5.16에 참가한 동기생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병력 동원을 거절한 때문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5.16에 참가한 공로로 입신출세한 동기생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사회활동도 제한적이었던 것 같다. 배영훈의 증언에 의하면, 동기생 가운데 정승화 장군(전 참모총장)과 가장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1950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 10군단 산하 보병 7사단에서 훈련 받는 국군 훈련병들 ©김형석 교수 제공

동기생들은 배동걸에 대해 "의리가 강한데다가 영어와 일어에 능통하고 노래와 춤솜씨가 뛰어나서 사교성이 많은 성격이었다"고 증언한다. 그의 상관이었던 제2사단장 김웅수 장군도 2008년 미주 한국일보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배동걸 중령은 명랑한 성격으로 사람들을 잘 웃겼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그의 성품이 급조된 특공대대를 이끌고 낯선 적성리 주민들과 화합하면서 나흘동안이나 단합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것이 적성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배동걸의 군 생활에 아주 특별한 경력이 등장한다. 1953년 7월 배동걸 대령은 유엔군 측 적십자단 한국 수석 대표로 북한을 방문하고 포로수용소를 시찰한 사건이다.(조성훈, <6.25전쟁과 국군 포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4) 이것은 1971년 중앙일보가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3년>을 연재하면서「남과 북의 포로수용소⑾ - 적십자의 수용소 시찰」편에 보다 구체적으로 소개한 적이 있다.(중앙일보, 1971.8.25)

그 내용을 살펴보자.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된 후 유엔군과 공산군 측의 적십자 대표단이 합의에 따라 호혜적으로 상대방의 포로수용소를 방문했다. 양측이 각각 30명의 대표단을 파견해서 포로수용소의 실태와 포로에 대한 대우 등을 살폈는데, 이때는 이미 부상병들은 4개월 전에 송환되었고 일반 포로들도 대부분이 송환장소를 향해 떠난 뒤였다. 이 시찰단에는 한국 측에서도 9명의 위원이 동행했는데, 이들을 통해서 악명 높은 북한의 포로수용소 실태가 전 세계에 상세히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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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수용소 상호 방문 시 공산군 측 대표단이 방문한 거제 포로수용소 ©김형석 교수 제공

당시 한국 측 수석대표이던 배동걸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7월 29일 국방부의 차출을 받고 부산에 도착해서야 '북한 포로수용소 시찰단'에 선정된 사실을 알았다. 배동걸·박재옥·신제범·박재식·정도순·장익진·장시죽·최종산·김영욱 등 9명이 대표단에 선정되었다. 이밖에 미국 10명, 덴마크 6명, 캐나다·호주·영국·터키·필리핀에서 각각 1명씩을 합쳐 모두 30명이었다.

8월 4일 오전 10시에 쌍방의 대표단이 판문점에 도착했고, 얼마 후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갔다. 유엔군 측 대표단은 15대의 소련제 지프에 분승하여 개성으로 들어간 후 저녁 6시에 열차편으로 평양으로 떠났다. 5일 새벽 3시 50분에 대동강역에 도착한 후, 임시로 가설된 인도교를 건너 평양 시내로 들어갔다. 오전 8시 20분 만포진을 향해 평양역을 떠났는데, 밤10시가 되어서야 만포진에 도착했다. 개성에서부터 무려 30시간이 걸린 기차여행이었다.

당시 국군 포로는 만포진에, 유엔군 포로는 벽동에 수용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 측은 국군수용소를 안보여 주려고 "만포진의 국군 포로들은 이미 송환 장소로 떠났으니 벽동만 보라"고 억지를 부렸다. 이에 배동걸은 시찰단장이던 영국 대표와 상의하여 장시죽·박재식·정도순·박재옥·신제범·최종산·김영욱 등 한국 대표 7명을 만포진에 잔류시킨 채, 다른 유엔 대표단과 함께 벽동으로 떠났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8천 3백여명의 국군 포로가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는 모습 ©김형석 교수 제공

유엔 대표단은 9일 아침 옥계 제1포로수용소를 시찰하고, 미군 포로 7명을 만나 위문품을 전달하면서 송환 절차를 알려주었다. 포로들은 영양실조에다가 복장과 머리가 거지떼 같았다. 수용소 내부를 살펴보니 민가의 방에 나무를 베다가 3층으로 칸막이를 설치하고 가마니를 깔아 놓았다. 다음날 창성 제3수용소를 방문했는데 이곳도 인민학교 건물을 며칠 사이에 급조한 흔적이 뚜렷했다. 방공호와 민가에 억류한 포로들을 데려다놓고 시찰단에 눈가림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었다.

포로 면담은 각 수용소에서 데려 온 30명 씩을 대상으로 질문하는 형식이었다. 거의가 철저히 훈련받은 탓으로 하나 같은 거짓말이었지만, 장교 한 명은 사실대로 토로했다. 그가 수용된 포로수용소의 경우 어떤 때는 2, 3일동안 밥을 전혀 주지 않았고 전염병에 대한 대책이 없어 자기가 처음 수용소에 왔을 때는 5백여 명이던 포로가 지금은 대부분전염병과 굶주림으로 죽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시찰단 대표들은 일반 민가로부터 30리쯤 떨어진 산 중턱에 텐트를 치고 숙박했다. 대표단을 안내한 중국측 적십자 요원은 "당신들이 진짜 포로인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회의장에서도 공공연히 '이승만 괴뢰정권'하며 위협했다. 이렇게 거의 연금 상태에서 20여 일의 힘든 일정을 보낸 시찰단은 8월 25일 판문점을 통해 무사히 귀환했다. 배동걸 대령이 인솔한 한국 측 적십자 대표단은 <북한 포로수용소 시찰보고서>를 작성해서 대한적십자사와 제네바의 국제적십자사 본부에 제출하는 것으로 임무를 마쳤다.

1971년 중앙일보와의 취재에 응한 배동걸(한국해외기술협회 이사장)은 "내가 2사단 연대장 요원으로 부임한지 12일 만의 일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집으로 돌아오니 몸무게가 10여㎏이나 줄었다. 그러나 좀더 일찍 우리가 북한에 갈 수 있었으면, 포로 희생이 조금이라도 적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웠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적십자 대표단(단장 배동걸)의 북한 포로수용소 방문을 다룬 중앙일보 ©김형석 교수 제공

그런데 중앙일보에 이 기사가 보도되기 10년 전인 1962년 8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신간 소개에 배동걸 저, <북한 포로수용소를 찾아서>(비매품)라는 기사가 소개되었다. 필자는 이 책자를 구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금까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편 배동걸은 묘동교회 장로로서 4대 째 내려오는 신앙 가문이었기에 노년에는 신앙생활에 귀의하여 여생을 보내다가 2004년 2월 10일 사망했으며 국립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사현과의 슬하에 대훈(67, LA 거주), 영훈(65), 정미(64)의 2남 1녀가 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국군포로는 8천3백여명이었지만, 돌아오지 못한 국군포로는 6만 여명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이토록 많은 국군 포로를 송환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분석이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1952년 9월에 정전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2만7천명의 국군포로를 비밀리에 인민군으로 편입시켜버린 사실이 <구 소련 외교문서>를 통해 드러났다. 애초부터 국군포로를 전부 송환시킬 생각이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2014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이때 미 송환된 국군포로들은 대부분 북한 최북단 지역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1956년에 민간인으로 전역된 후에는 탄광촌으로 보내졌는데, 작업 환경이 극도로 열악하여 죽거나 중상을 당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뿐아니라 국군포로라는 출신성분 때문에 아들 손자도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같은 내용은 금년 6월 25일 영국 BBC TV에서 「6.25: 잊혀진 국군포로의 잊혀진 딸들... 그들은 최하층민의 삶을 살았다」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다.

필자는 6.25전쟁 71주년을 지나면서,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대령의 흔적을 찾는 도중에 국군포로 문제의 심각성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북한은 "강제 억류한 국군포로는 단 1명도 없고, 북한에 있는 국군포로들은 모두 귀순해 정착했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억지 주장은 잇단 국군포로의 탈북으로 거짓임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그뿐아니라 국군포로의 소련지역 이송설이 수 차례나 국내 언론에 보도되었던 적도 있다.

6.25의 기적들⑥ - '문경 적성리전투'의 영웅 배동걸 소령과 숨겨진 일화들
돌아 온 국군포로들 - 1998년 귀환한 장무환(좌)과 2003년 귀환한 전룡일(우) ©김형석 교수 제공

1994년 조창호 소위(1930-2006)의 귀환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국군포로 문제는 2019년 기준으로 귀환한 국군 포로가 80명이었고 이 가운데 56명은 사망했다. 북한 인권단체의 주장에 따르면, 국군포로 대부분이 85세를 넘긴 고령이어서 생존자는 200명 미만일 것으로 추정된다.(조창호 소위에 관해서는 <김형석의 역사산책>에 게재된, 「현리전투와 조창호 소위 생환」참조)

우리 정부는 유족들에게 보훈 혜택을 주기 위한 취지에서 전쟁 중에 발생한 행방불명자를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전사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군 인사법'에 근거해서 모든 미귀환 국군포로를 '전사자'로 처리했다. 그래서 유령이 된 그들이 한 사람, 두 사람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국군포로 문제를 외면하는 정부의 행태는 비판 받아 마땅하다. 정부의 변화된 국군포로 정책을 기대한다. 그것이 북한의 포로수용소 시찰을 위해 방북하면서 느낀 배동걸 대령의 안타까운 심정일 것이다.

김형석 목사(전 총신대 역사학 교수,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사)대한민국역사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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