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협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
한복협 월례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가 12일 경동교회에서 개최됐다. ©장지동 기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최이우 목사)가 12일 오전 7시 서울시 중구 소재 경동교회(채수일 담임목사)에서 ‘3.1운동과 오늘의 한국 기독교’라는 주제로 조찬기도회 및 발표회를 개최했다.

1부 기도회는 임석순 목사(한복협 부회장, 한국중앙교회 담임)의 인도로, 박종화 목사(한복협 자문위원, 경동교회 원로)의 설교, 채수일 목사(경동교회 담임)의 ‘한국교회를 위하여’, 정현구 목사(한복협 중앙위원, 서울영동교회 담임)의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를 위하여’ 기도 인도, 합심 통성기도, 최정헌 집사(경동교회)의 클라리넷 특주 순서로 진행됐다.

설교를 맡은 박종화 목사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요 8:32)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박 목사는 “오늘 우리는 3.1운동 102주년을 맞이한다. 우리의 선조들은 일제 식민지에 저항하여 분연히 일어섰다”고 했다.

이어 “온 민족의 이름으로 발표된 ‘3.1 독립선언서’에서 일제 식민통치에 강탈당한 조국의 자유와 독립, 민주와 복리, 평화와 상생의 봄을 기어코 다시 이 땅에 심고 가꾸고 열매 맺게 하겠노라고 세계만방에 선포했다”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사건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역사개입의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듯이, 3.1운동은 한반도에서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역사가 출범하는 신호이다. 그것은 이 백성을 자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담고 있는 진리”라고 덧붙였다.

이후 2부 발표회는 박명수 교수(한복협 교회갱신위원장, 서울신대 명예교수)의 사회로, 김용직 교수(성신여대 정치외교학)가 ‘세계사 속에서 본 3.1운동’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김용직 교수
김용직 교수가 12일 한복협 월례 발표회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장지동 기자

김용직 교수는 “1919년 3.1운동이 한반도 전역에서 대대적인 독립시위와 봉기로 발발하여 두 달 동안 전국을 뒤흔들어 놓은 지 1세기가 됐다. 1세기 전의 이 사건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또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가”라며 “당시 세계는 유럽이 중심이 된 세계대전쟁을 치른 직후였고, 조선은 전승국 반열에 오른 일본의 제국주의 압제 하에 10년째 놓여 있었고, 한민족은 나라를 잃게 되면서 정치적 자유와 독립을 상실한 비참한 상태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바로 그러한 절망적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킨 것”이라고 했다.

이어 “3.1운동은 1919년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우리 민족 종교 지도자들에 의하여 고안되었는데 그것은 독립을 선언하였지만 이를 위한 폭력 사용보다는 비폭력적 방식의 투쟁을 주문한 것”이라며 “그것은 구시대의 반란이나 봉기가 아니고 종교 지도자들이 이끌어 낸 독특한 민족운동”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3.1운동이 매우 특이한 사건이었고 그것의 기원에서부터 특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개과정에서 선언문 기획자들의 예상과는 다른 양상으로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보게 된다”며 “또한 그 운동의 성격도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19년 3월말에서 4월초에 이르러 3.1운동은 운동의 대중적 확산과 고양의 단계에 도달하였을 뿐 아니라 임시정부수립운동으로 양상이 바뀌어 나가게 됐다”고 했다.

그는 “한인 민족운동 지도자들은 재정적 결핍과 일제의 탄압 등 매우 어려운 환경 아래서 독립운동을 해야 했고, 이들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분열은 일제가 원하는 바이고, 한인들의 민족운동은 통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늘 중시했다”며 “이들의 갈등은 독립운동 내의 다양성이라는 점으로 볼 수도 있으며 크게 볼 때에 한국의 민족주의의 발전과 독립가능성을 제고하게 된 자산이었다”고 했다.

이어 “강력한 일본의 탄압과 교란책으로 인해 비록 1919년과 그 직후에 단기적인 독립의 획득에는 실패했지만, 1919년 한국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민주공화제 달성의 목표를 추구하면서 그 명맥을 이어왔다”며 “1925년부터 1941년 진주만 사건발발까지 거의 15~16년간 대한민국임시정부활동은 긴 침체기를 겪었지만, 이승만과 김구, 조소앙 등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한 한인들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지속적으로 알리고 전파하는 데에 중심적 역할을 다하였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거시적이며 세계사적인 안목에서 3.1운동을 공화주의, 평화주의, 인도주의적 운동으로 주조하여 낸 1919년 국내외 한인들과 망명민족운동단체들은 세계사의 흐름을 잘 포착하고 그 안에서 우리민족의 갈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추구한 토인비(영국 사학자)가 지적한 ‘창조적 소수자’라고 할 수 있다”며 “이들의 선도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을 통하여 3.1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등장하였고, 이러한 계기로 한국 민족이 세계사에 적극 동참하게 된 것이다. 결국 우리 민족은 일제강점 10년 만에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적극 수용하고 국제사회에 본격적인 한국의 독립국가수립 의지를 천명하고, 민주공화정 수립이라는 민족혁명의 대장정에 뛰어들었던 것”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이승만은 북한지역의 인사들이 만든 조선민주당의 부당수를 역임하다 월남한 이윤영을 적극 우대했다”며 ”이는 한성정부와 관련이 깊은 조만식 당수에 대한 배려의 의미도 있었다”고 했다.

이어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미국의 활동에 힘입어 한국독립에 관한 결의안이 압도적 지지로 통과되고, 유엔감시하의 한반도의 자유총선거의 실시가 결정되어 이듬해 1948년 5월에 총선거를 치르게 됐다”며 “그것은 한민족의 민족자결적 사건인 동시에 3.1운동부터 시작되었던 장기 공화주의혁명의 최종적 사건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건국은 30년간의 시기를 이어온 고난과 역경의 과정으로 3.1혁명으로 시작되어 5.10선거혁명으로 완성된 약소민족의 공화민족주의적 대사건으로 세계사에 기록되어야 할 것”이라며 “비록 소련과 북한 등 공산권에서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의 민족주의 정치지도자들은 험난한 국가건설의 혁명적 과정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였다”고 했다.

아울러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를 소집하고 주권국가 수립과정에 진입, 동년 7월 17일에 헌법을 제정, 선포했다”며 “그리고 1948년 8월 15일 마침내 한반도의 근대민족국가 수립과 민주공화제 체제 수립을 내외에 크게 알리면서 3.1운동에서 시작한 장기 공화민족주의 혁명의 대장정의 길을 완수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후에는 이상규 교수(고신대 신학 명예교수)의 두 번째 발표, 질의응답, 최이우 목사(한복협 회장, 종교교회 담임)의 인사말, 유관지 목사(한복협 감사, 북녘교회연구원장, 용산감리교회 원로)의 축도, 이옥기 목사(한복협 총무, 전 UBF 대표)의 광고 순서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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