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애 박사
이경애 박사

최근 들어 심리상담, 심리치료 영역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관심이 급증한 ‘힐링’이라는 주제와 함께 특별히 작년 한해 코로나로 인해 심리적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증가하면서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 아닌 신조어도 생겨난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용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이 상담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즉, 상담이라고 하면 문제나 아픔이 있는 사람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거나, 상처를 치유하려고 하거나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는 의도로,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는’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심리치료의 중요한 일부이다. 아픔과 고통을 지닌 사람들이 전문가를 찾아 자신들의 문제를 호소하고 무엇인가 보다 적응적인 방식을 습득하려는 것, 이것은 상담의 중요한 기능과 역할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상담에 대한 이해에는 상담이 무엇인가 결핍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도록 해주고 채우는 기능을 한다는 것에 대한 기대가 있다. 물론, 상담이나 심리치료는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상담이나 심리치료는 이렇게 문제해결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결핍이나 문제를 채우거나 해결하는 시도, 다시 말해 마이너스에서 제로를 향해 즉, 결핍을 채우려는 힘겨운 노력을 하는 것만이 상담은 아니다. 상담에는 이미 안정된 기초가 형성된 개인이나 가족으로 하여금 10, 100, 1000을 더해가는 기대를 돕는 과정도 포함된다. 결핍에의 충족 뿐 아니라 성장의 가능성을 경험하는 것도 상담에 중요한 기능인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성령의 이름을 ‘상담사(요한복음 15장26절)로 부르시는 것을 본다. 이 때 이 성령님은 과거의 일을 해결하는 것만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시며, 장래 일어날 일들에 대한 지혜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성령님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우리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닫게 해주시는 분이심을 안다(요한복음 16장). 이러한 성서의 구절들을 보면 상담사로서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얼마나 장래 일어날 일로 염려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제자들에게 할 말과 할 일을 친절하게 알려주시는지 깨닫고 감동한다. 우리는 고아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지혜의 영이 함께 한다. 모호한 우리의 인생에 이 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단 말인가?

20세기 과학적 심리학의 근간을 이룬 정신분석에서는 자신의 과거경험이 현재의 나를 만드는데 기여했음을 밝혀내었다. ‘심리적 결정론’이라고 불리는 이 학문 영역은 어제, 과거 일어난 일들이 오늘의 우리 무의식을 형성하여 우리 삶에 내적으로 작동함을 밝혀내었다. 그래서 한 세기 동안 사람들은 ‘도대체 나의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를 탐색하느라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어릴 때의 상처와 아픔이 현재 나의 삶에 영향을 미쳤음을 깨닫게 되었고 애통하며 애도하게 되었다. 나의 문제는 내 탓이 아니고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타인들, 예를 들어 부모님을 비롯한 가족과 심리적인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인물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문제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내 탓이라는 깊은 자괴감으로부터 다소 해방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물음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현재 나의 심리적 어려움의 기원이 나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소수의 사람들의 영향에 의해 형성되었다면, 그래서 어떻게 이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라는 말인가? 애석하게도 이 미래 방향에 대한 활기찬 방향 제시를 하지 못한 것은 정신분석이 드러낸 아쉬움이었다. 왜냐하면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고통의 원인에 대한 발견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내어야 할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학의 역사는 20세기 후반부터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 1942~ )을 비롯한 학자들이 소개하기 시작한 ‘긍정심리학(Positive Psy)을 통해 그 궤도를 달리하게 되었다. 즉, 개인이 지녀온 아픔이나 상처, 해결하려고 해도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 상처에 집중하기보다, 개인이 가진 강점이나 장점, 가능성과 자원에 집중하자는 것으로 말이다. 인생의 상처는 이미 나의 인생에 새겨진 흔적과 같은데 이것을 지우느라 시간과 노력을 쓰고 이 때문에 정작 중요한 앞으로의 삶에 대한 희망찬 계획과 비전을 놓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아쉬운 인생의 낭비가 될 것인가? 그래서 사람은 과거 상처의 치유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앞으로의 삶에 대한 기대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은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희망을 보게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의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어떠한 상처와 아픔이 있었던 인생이라고 할지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 이전 것은 떠나보내고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처 받았던 기억도 있고, 실수한 기억도 있다. 그것이 현재 나의 생각, 감정, 행동양식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 아닌가?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창조 영성신학자인 매튜 폭스(Mattew Fox, 1940~)는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강조되어왔던 원죄(Original Sin)의 강조로부터 원복(Original Blessing)으로 우리의 관심을 전환할 것을 강조한다. 그도 그럴 것이 원죄는 창세기 3장에 등장하지만 우리는 이미 창세기 1장을 통해 우리를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먼저 만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죄와 허물, 상처와 아픔에는 집중하면서 구원과 사랑. 희망과 가능성에 대해서는 왜 잘 믿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다. 우리의 가장 찬란한 시절은 아직 오지 않았다. 주님 안에서 사는 자는 섣불리 자신을 진단하지 못한다. 과거의 나의 환경이, 나의 죄와 허물과 실수가 있다고 할지라도 함부로 나의 모든 것을 진단할 수 없는 것이다. 긍정심리학이 개인의 문제보다 가능성을, 과거보다 현재와 미래를, 단점보다 강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성서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선포하는 것처럼, 죄 이전에 축복이 있었음을 보여 주듯이 우리도 새해에는 주님 안에서 문제 많은 죄성보다 더 압도적인 은총을 더 기억하고 꿈꾸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내 의지와 결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그 새로움이 내 의지로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미리 포기할 것이다. 내 스스로 내 연약함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있을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새 해 첫 달이다. 새 희망을 꿈꾸고 기대하는 달이다. 올해는 내 생각이나 감정, 타인의 평가나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 안에서 새로워질 자신을 기대하자, 주님 안에서 문제보다 가능성을, 원죄로 고통하는 만큼 원복을 꿈꾸며 기대하며 말이다.

이경애 박사(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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