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림 박사
윤상림 박사가 줌을 통해 ‘서서평 선교사의 교육활동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발표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캡쳐

한국기독교역사학회가 7일 오후 제387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화상회의 앱인 ‘줌’(Zoom)을 이용해 비대면으로 진행했다.

이날 발표회에선 이재근 교수(한국기독교역사학회 연구이사, 광신대)의 사회로, 윤상림 박사(연세대)가 ‘서서평(Elizabeth J. Shepping) 선교사의 교육활동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강성호 연구원(순천시사편찬위원회 연구원)이 “1950년대 ‘장로 대통령’ 운동의 주도세력에 대한 연구: 1952년 8.5정부통령 선거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각각 발표했다.

첫 번째 주제발표자로 나선 윤 박사는 “엘리제 요한나 쉐핑(徐舒平; Elise Johanna Shepping, R.N., 1880~1934)은 1912년에 간호선교사로 내한했고, 선교사임을 고려하면 늦은 나이에 해당하는 서른두 살에 해외 파송 선교사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라며 “미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이며, 독신여성 선교사였던 서서평은 자신의 사역지인 광주(光州)에서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간호 사역 뿐만이 아니라 전도·교육·구제 등 여러 선교사업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광주 지역의 개척 선교사가 아님에도 광주의 교회역사 안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했다.

“가장 좋아하는 일(work)은 무엇인가요?”
“한국(조선)의 여성들 가운데서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일”

그녀는 “위 대화는 녹스(Knox) 부인 선교사와 서서평 선교사가 나눈 인터뷰 형식의 대화 중 일부”라며 “서서평 선교사의 대답은 그녀만의 교육선교 목적, 선교철학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답변일 것이다. 엘리제 요한나 쉐핑(Elise Johanna Shepping; 徐舒平, 1880~1934)이라는 본명 보다는 ‘서서평’이라는 한국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한 선교사이다. 물론, 그가 그 이름을 더 선호했다고도 했으나, 그를 좋아하는 이들과 후대에 그에 대해 연구하는 이들이 검소하면서도 먹고 입는 생활이 그 시대의 한국인들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 않았던 것과 그의 헌신적이었던 사역을 더욱 강조하고자 ‘서서평’을 사용하는 경향도 없지 않아 있다. 서서평(徐舒平)은 급한 성격을 고치고자 했던 마음에 스스로 지은 이름”이라고 덧붙였다.

또한 “평전을 통해 볼 때, 투병으로 눕기 전까지도 그녀의 급한 성격은 고쳐진 것 같지는 않다. 급한 성격과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름, 이 또한 서서평 선교사의 사역을 대변해 주는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서서평은 전투적 혹은 공격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했으며 꾸준히 하나의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서서평은 간호 사역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나 내한한지 햇수로 십년이 되던 1921년부터 전담 선교 분야를 바꾸게 됐다”고 했다.

더불어 “그가 소속되어 있는 미 남장로회 한국선교부 회의록을 보면 서서평의 담당 선교 분야에서 ‘병원사역’에 대한 항목이 없어지면서, 여성 성경공부반에 대한 책임이 주어지기 시작했다”며 “순회전도 사역을 하면서 질병이 있는 조선인들을 만나면 치료해 주는 일을 하기는 했으나 연례회의록에서 공식적인 사역(업무)이 바뀌기 시작하면서부터 서평은 교육선교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윤 박사는 “1880년생 엘리제 요한나 쉐핑은 1934년 광주에서 서서평으로 그 호흡을 다했다”며 “서평은 초기 2차에 걸친 어학시험은 해당 연도에 마쳤으나 3차까지 통과하는데 약 3년의 시간이 걸렸다. 한국어 구사력이 뒤처지지 않았다고 평가받았음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은 그가 실제 선교활동에 더 매진했던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고 했다.

이어 “서평은 태어나서 얼마 후, 그리고 개종하고 나서 다시, 일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거절과 외면을 어머니로부터 당했다. 자신이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이 경험으로 인함임을 고백했다. 버림받은 상처, 스스로에게 있던 결핍은 내한하여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곳곳의 빈 곳, 부족, 결핍을 보게 했다”며 “그의 선교활동은 기회를 잃고, 버림받고, 상처 받은 소외된 여성들에게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아직 복음을 접하지 못한 자에게 성경을 통하여 가르침을 주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돕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함께 행하며 함께 갔다. 그의 교육은 그랬다. 한국말이 조금 트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순회선교에 참여하여 성경 가르치기를 즐겼다. 사경회와 성경학교에서 가르치는 일, 간호부양성소에서의 간호교육, 이일학교 설립과 운영 등 ‘통전적 선교’라 일컬어지는 그의 선교활동에서 가르침, 즉 ‘교육’은 그 역할을 충실하다 못해 넘치게 했다고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아울러 “전하는 것에 머문 것이 아니라 ‘부족’을 채우도록 하여 행함(실천)으로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한 것, ‘성경교육과 이일학교 설립을 통하여 서평이 자신의 선교 분야를 바꾸면서까지 전념하고자 했던 것, 무엇을 채우려고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던 목표는 그가 배웠던 성경공부, 그가 살던 미국에 불던 여성들만의 해외여성운동 등, 서평은 시대가 원했던 상에 부합했던 면이 있어 보인다. 운 좋은 것은 그에게도 그 시대가 맞았나 보다. 그가 익혔던 것들이 그의 선교현장에 녹아져 전하고, 가르치고, 조직을 만들어 계속 활동했다. 그가 원했던 이일학교의 방향을 뜻이 맞는 이들이 이어갔고, 거의 동일한 신앙고백과 교육관으로 미약하지만 시대의 부름에 응했다”고 했다.

강성호 연구원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강성호 연구원이 발표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캡쳐

두 번째 주제발표를 맡은 강 연구원은 “장로 대통령 운동이란 한국 개신교가 교회 장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동원한 선거 운동을 말한다”며 “교회는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의 유권자들이 공통된 신념을 바탕으로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이는 모임이다. 선거에서 한국 개신교의 영향력을 무시하기 힘든 이유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장로 대통령 운동이 이승만 대통령이 구사하였던 대중 동원 정치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장로 대통령 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지배운영 방식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주제이기도 하다”고 했다.

또한 “장로 대통령 운동은 한국 선거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주제”라며 “1948년부터 2017년까지 대통령 선거는 총 19번이나 시행됐다. 그 가운데 간접선거로 진행된 경우는 6번이었다. 이를 제외한 14번 가운데 무려 6번이나 장로 대통령 운동이 나타났다. 직접선거로 시행된 대통령 선거 가운데 장로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한국 개신교의 선거운동이 무려 42.9%의 확률로 나타난 셈이다. 이는 한국 선거의 역사에서 나타난 독특한 종교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문제는 이승만 정권과 한국 개신교의 정교유착이 너무나 자명한 사실로 인식되다보니 지금까지 장로 대통령 운동에 대한 서술이 표면적인 사건의 나열로 그치고 말았다는 점”이라며 “예를 들어, 1960년 4월 혁명 시기에 ‘기독교 사상’지를 중심으로 논의된 교회 개혁 담론은 한국 개신교의 역사적 책임을 촉구하기 위해 장로 대통령 운동을 언급했다. 1980년대에 일련의 진보 신학자들도 장로 대통령 운동을 다룬 글을 썼지만, 규범적이고 평가적인 서술로 그친 건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이어 “1990년대 이후에는 종교학과 사회학을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며 “김흥수는 한국 개신교가 해방공간에서 직접 정당을 조직하거나 외곽단체를 만들어 현실정치에 참여했던 방식이 이승만 정권의 성립 이후 특정 후보를 지지하는 선거운동으로 변화됐다고 파악했다. 노치준은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위기의식과 흑백논리에 한국 개신교가 경직되어 이승만 정권을 비판적인 검토 없이 지지하는 태도를 가지게 됐다고 보았다. 강인철은 이승만 정권이 점진적으로 기독교 정권의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 개신교가 제도적 특권을 받게 되는 모습들을 심도 깊게 분석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과 한국 개신교의 유착관계는 장로 대통령 운동을 매개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면밀한 분석이 전무한 실정”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먼저, 1952년 8·5정부통령 선거는 이승만 정권과 한국개신교의 정교유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표방한 한국기독교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기호파 기독교세력이 한국기독교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를 주도했고, 일부 월남 기독교인이 참여했다”며 “한국기독교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의 구성원 중에는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이들이 있었으며, 해방공간에서 반탁운동을 적극 주도한 이들이 상당했다. 요컨대, 한국기독교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에는 전시체제기와 해방공간을 거치며 전쟁협력운동과 반공운동으로 성장한 이들이 주도세력을 이루었다”고 했다.

이어 “둘째, 한국기독교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의 주도세력은 지지하는 부통령 후보에 따라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며 “월남 기독교세력은 이윤영선거후원회를 만들어 조선민주당 후보인 이윤영 목사를 적극 지지했다. 여기에는 월남 기독교세력의 결사체인 이북신도대표회와 감리교 총리원 인사들이중심을 이루었다”고 했다.

그는 “특기할 만한 점은 이윤영 목사와 함께 혁신교단 반대운동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었던 인물들이 상당했다는 사실이다. 즉, 십여 년 전부터 이윤영 목사와 동지적 사이였던 이들이 이윤영선거후원회를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며 “이에 반해 기호파 기독교 세력은 함태영 목사를 지지했다. 주로 1930년대 초중반에 함태영 목사와 함께 적극신앙단에 참여하거나 한국신학대학의 운영에 관련된 이들이 함태영선거동지회의 주도세력으로 참여했다”고 했다.

또 “1952년 8·5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월남 기독교세력과 기호파 기독교세력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에 이견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기독교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회가 한국기독교연합회를 기반으로 결성될 수 있었다”며 “하지만, 부통령 선거에서는 입장 차이가 극명하게 갈렸다. 두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세력의 행보는 8·5정부통령 선거 이후 더욱 달라졌다. 기호파 기독교세력은 ‘기독교동지회’라는 결사체를 만들어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를 더욱 밀착시켜나갔다. 그 결과 1956년 5·15정부통령 선거와 1960년 3·15정부통령 선거 때 장로 대통령 운동의 주도세력으로 부상했다. 반대로 월남기독교세력은 점차 정교분리 노선을 밟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1930년대부터 기호파 기독교세력과 월남 기독교세력의 관계는 교권을 둘러싼 갈등으로 점철됐다. 1935년에 벌어진 적극신앙단 사건은 양자 간의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월남 기독교세력은 한국전쟁을 전후로 남한교회에 편입되면서 교권을 장악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기호파 기독교세력에게 위기의식을 불러 일으켰다”며 “이러한 상황에서 기호파 기독교세력은 교권쟁탈전에 이기기 위해 8·5정부통령 선거에 적극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 즉, 부통령 선거를 둘러싼 입장 차이는 1930년대에 나타난 지역갈등의 재현이자 교권쟁탈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려졌던 장로 대통령 운동을 주도세력의 분석을 통해 밝히고자 했다. 그리고 이 주도세력이 어떠한 상황과 동기로 장로 대통령 운동을 진행했는가를 보고자 했다”며 “이를 통해 1950년대 정교유착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이승만 정권의 종교정책을 파악하는 데 일정정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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