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보 옥한흠 목사.
은보 옥한흠 목사. ©자료사진

故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 원로)가 지난 2000년 2월 13일부터 사랑의교회에서 한 ‘산상수훈 설교 시리즈’를 차례로 소개한다. 아래는 그해 2월 27일에 선포된 시리즈의 세 번째 설교 ‘눈물먹고 자라는 행복’(마 5:4, 누가복음 6:21, 25)을 간추려 정리한 것이다.

옥한흠 목사는 “현대인들은 무거운 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왜냐면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이라며 “성경에 많은 역설이 있다. 아마 이 구절은 기독교의 역설을 대변하는 성경 구절이 아닐까 생각된다. 예수님이 사용하신 ‘애통하는 자’란 용어는 강도가 높고 감정이 짙은 단어에 속한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앞에 두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애통에 가깝다”고 했다.

이어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통곡하는 사건은 우리 인생에 1-2번 있을까 말까다. 예수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토하는 영혼의 거룩한 탄식을 말씀하신 것”이라며 “반세기 전 한국교회 이미지는 애통하는 이미지였다. 광복이후 가뭄의 연속 그리고 6.25 전쟁이 터졌다. 우리의 상황은 매우 처참했다. 그런 위기 속에서 교회에 모인 선조들은 눈만 떴다하면 울었다. 자기 죄를 위해서, 예수 안 믿는 자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눈이 붓도록 울었다. 마루에 눈물자국이 여기저기 진하게 박혀 걸레로 닦이지 않을 정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에 비해서 오늘날 우리 교회는 어떠한가? 애통하는 교회를 보기가 적다. 웃음이 복음으로 들리고 눈물은 비(非)복음으로 들리는 분위기다. 실은 우리 모두가 웃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최근 유머 설교 세미나도 열린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런 이야기가 통하는 이유는 바로 현대 교회가 눈물이 말랐다는 사실”이라며 “심각한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짧은 인생을 살지만 눈물은 그 자체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웃음이 우리를 기쁘게 해도 눈물을 대신할 수 없다. 눈물은 고유한 영역이 있다. 만일 우는 게 무조건 저주요, 슬픔은 무조건 부정해야 한다면 그 사람 인생에는 중요한 한 가지가 빠진 것”이라며 “아랍 속담에는 ‘햇빛만 쏟아지는 곳은 사막이 되기 쉽다’는 말이 있다. 모든 햇살은 사막을 만든다. 인생에 있어서도 진리다. 비가 쏟아져야한다”며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가 쏟아져야 생명의 환희가 일어난다. 눈물 없는 인생은 사막과 같다. 눈물이 없다면 웃음 자체도 하나의 광대 노릇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깊이 깨닫는 자만이 인생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옥 목사는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에서 눈물이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이다. 눈물을 통과하지 않는 신앙은 하나의 값싼 신앙에 불과하다. 예수 믿은 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울어본 경험이 있던가. 애통이 우리 신앙을 본질로 향하게 한다”며 “눈물이 고인 눈엔 십자가의 주님이 보인다. 젖은 눈에 부활의 주님 영광이 나타난다. 애통하는 심령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의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신앙은 눈물을 먹고 자란다. 우리 인격은 눈물을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성숙한다. 그러므로 신앙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애통을 부정적이며 두려움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신앙은 한 마디로 탄식으로 정의 한다”며 “로마서 8장 23절에서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가진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나왔다. 이처럼 우리 예수 믿고 양자된 사람은 날마다 탄식하면서 기다린다. 썩을 몸을 빨리 벗고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입으신 영광스런 옷을 함께 입고 구속 받을 그날을 사모한다고 나왔다. 신앙은 한 마디로 탄식”이라고 했다.

그는 “신앙생활에서 눈물이 정말 중요하다. 신앙의 밑바닥에는 눈물의 강이 흐르고 있다. 이를 모르고 신앙한다면 그 신앙은 아주 천박한 신앙”이라며 “애통하는 자는 첫째로 자기 죄를 놓고 눈물을 흘리는 자다. 우리 모두는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았다. 그러나 이는 선언적 의미다. 실제로 우리가 죄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회개할 것도, 죄도 없다는 사람은 사도요한이 말했듯 거짓말 하는 자다. 사도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면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함이요’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 앞에 애통할 이유가 충분하다. 하루에 백번이라도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야 할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애통하는 게 아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라서 애통하는 것”이라며 “오늘날 교회에서 죄 짓는 걸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슴속에 진정 회개하는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 입술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사람을 정말 깨끗케 하실까? 깊이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성당 앞에 붙이면서 ‘신앙인의 삶이란 끊임없는 참회’라고 했다. 용서받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 안에 성령을 모시는 구별된 사람이라서 매일 우리는 눈물이 필요하다. 곧 죄를 씻는 눈물”이라며 “우리의 표준은 이웃사랑이 아니다. 저 사람보다 더 깨끗하냐가 아니다. 예수님 보기에 ‘우리가 얼마나 거룩 하느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까이 모시는 사람일수록 자신의 추악함을 본다. 더욱 애통하는 심정을 지닌다. 예수님과 거리가 떨어진 사람은 애통할 일이 거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우리가 애통하는 게 아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임재를 가까이해서 우리는 항상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며 “거룩한 영광의 빛 앞에 노출된 벌거벗긴 자신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의 악함을 가지고 탄식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 죄를 하나님 앞에 고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하신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눈물을 씻겨주시고 사죄의 은총을 주신다고 하셨다. 이것이 위로”라고 했다.

또 “둘째로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사람이 바로 애통하는 자다. 누가복음 6장 25절에서 ‘배부른 자, 웃는 자는 세상 사람들’이라고 나왔다. 예수님은 날마다 잘 살고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저주로 보신 것이다. (반면) 21절에서 주린 자는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로 보셨다. 그들이 주리고 우는 삶 자체가 복이라고 하셨다”며 “그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 속에서 시간만 나면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통곡하는 자들이다. 주님은 이들을 복이 있는 자라고 하셨다”고 했다.

특히 “왜 하는 일들이 풀리지 않고 자녀들은 탈선하는지, 왜 경쟁에서 뒤처지고 사기를 당하며 하루아침에 병이 들고 육체가 망가지는 지 등등··· 설명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무거운 십자가들 지고 눈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게 현실”이라며 “슬픔과 아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엎드리고 기도하는 거룩한 성도들이 많다. 살기 힘들 때마다 좌절감이 몰려와 은혜의 보좌 앞에서 눈물로 하나님 옷자락을 적시는 성도들이 많다. 어쩌면 예수를 믿어서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세상 사람과 타협하지 않았기에 고통과 슬픔을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옥 목사는 “사람들이 볼 땐, 이런 눈물 흘리는 자가 저주받은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슬픔을 가지고 눈물로 주님 옷자락 붙잡고 기도하는 자를 두고 ‘네 애통함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내 눈앞에 앓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지 않고, 당장 나의 가난이 물러가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일이 당장 일어나지 않음에도 예수님은 ‘네 애통이 복이 있노라,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 네 기도를 들었노라’고 말씀하신다.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복이고 행복”이라며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어떤 이유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지라도 저주라고 생각하지 말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세 번째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애통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몇 일전, 감람산에 앉으시고 성을 내려다보시던 예수님의 눈엔 눈물이 흘렀다.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는 눈물은 정말 통한이 가득한 눈물이었다”며 “예루살렘은 하나님 아들이 오셨음에도 영접하지 아니한 어둠의 권세가 가득한 악한 성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40년이 지나면 그 성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내다보고 계셨다.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포위하여 네 자식과 가족들을 땅에 내어 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며 “주후 70년 로마 티도 황제가 실행한 예루살렘 포위와 함락은 정말로 비참했다. 예루살렘 성 안에서 어머니는 배가 너무 고파 어린 아이들을 남몰래 잡아먹었다. 로마 군인이 성에 입성한 뒤 어린아이들을 내 동댕이쳤다. 임신한 여성의 배를 칼로 쪼갰다. 주님이 그 때의 처참한 상황을 미리 내다보시고 우신 것”이라고 했다.

특히 “바울도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 ‘내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원수들이 많았다고 했다. 교회 안에서 십자가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많다. 그렇다면 우리도 세상을 앞에 두고 애통해야 하지 않을까?”라며 “이 나라가 과거 어느 시대보다 지금처럼 죄를 범한 사회가 있던가? 이렇게나 악하고 더럽고 음란할 수 있던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중고생 90%가 포르노에 접촉한다고 한다. 심지어 아이들이 교실에서 선생이 나간 뒤 컴퓨터를 통해 포르노를 본다고 한다. 그 중 4%는 원조교제를 통해 성적으로 절망적인 범죄 행위를 한다는 뉴스 보도도 나갔다. 어느 중·고등학교에 가면 학생 중 30%가 최소 예수 믿는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예수 믿는 아이들이 포르노에 동조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를 보고 애통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며 “이런 성숙치 못한 아이들이 포르노를 계속 보면 마약중독처럼 빨려간다. 사탄의 노예가 된다. 사고가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할 정도가 될 수 있다. 이들이 자라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20년 후, 이 사회가 어떻게 될지 정말 아찔하다. 어떻게 예수님처럼 예루살렘 성을 내려다보고, 이 서울 바닥을 내다보며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했다.

그는 “애통하는 교회만이 이 나라의 희망이다. 썩어빠진 정치인들, 교육자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양심은 없고 돈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기업인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는가?”라며 “이 나라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생각하고 바울처럼 예수님처럼 통곡하는 하나님의 백성만이 이 나라의 소망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다. 나라와 민족, 예수 안 믿는 이웃을 위해서 애통하라고 하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때 ‘내가 너를 위로하리라. 너의 애통이 헛되지 않도록 해주마’라고 친히 약속하셨다. 문제는 우리 예수 믿는 자들의 눈물이 말랐다는 것”이라며 “애통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는 많은 축복을 놓치는 것이다. 이 말씀을 두고 내 죄, 인생의 무거운 짐, 내 민족의 죄, 예수 안 믿는 이웃의 영혼을 위해 기도할 때다. 그러면 우리가 놀라운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있다”고 했다.

*내용은 故 옥한흠 목사의 홈페이지에 실린 설교 녹취록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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