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개혁한글)

◆ 벧전2:4~8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성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설교전문
작년에 서유럽을 다녀왔습니다. 로마에 가서 느낀 점은 웬만한 건물은 다 무너져 그 흔적만 남았는데 그 가운데도 아직도 남아있는 건물들은 모두 돌로 세워진 건물들 이었습니다.

저는는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일화를 떠올렸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무너뜨리셨나?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역경이 닥쳐 도살아 남을 수 있는 참된 삶의 탑을 쌓으라는 하나님의의 교훈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바벨탑과 로마의 유적을 통해 우리에게 벽돌이 될 것이냐? 아니면 ‘돌’이 될 것이냐를 물으시는듯 했습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바벨탑 사건이 나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말 하였다’ ‘자’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왜 성경에는 사람들이 돌 대신에 벽돌을 썼을까? 벽돌은 바로 인간의 힘으로 빚은 것이고 돌은 하나님께서 직접 빚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무리 구워진 것이라도 실제로 오래 견디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분주한 세상에서 자신들의 삶을 그저 인간이 빚은 벽돌로 빨리 빨리 쌓아 올리려합니다. 그리고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인간들의 방식에서 쉽게 해결책을 찾으려 합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초기 히브리 사람들은 징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 제물을 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베드로 사도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 이십니다.’라고 하는 신앙 고백을 들으시고 ‘너는 베드로라 곧 반석이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기독교회의 뿌리가 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족장 시대의 제사 종교를 비롯하여 모세의 율법 신앙, 예수님 이후 복음 신앙에 이르기 까지 모두 돌 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목자 또는 포도나무라고 말씀 하셨는데 베드로는 예수를 산돌이라고 하면서 우리 크리스천도 산돌 같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산돌이란 살아 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돌의 특징은 굳고 강한데 있고 불변에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불의를 공격하고 정의를 주장 하는데 굳은돌과 같이 강하였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의 본체이시므로 어떤 환경에서도 반석과 같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산돌인 것처럼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첫째 소리 지르는 산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귀타고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노래를 불렀더니 찬양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람들이 잠잠하면 하늘이 소리 지르리라’(시편 51:15)고 하였고 하박국선지는 ‘담에서 돌들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 하리라’(합2:11)고 하였으니 사람들이 할 말을 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의 소리가 되어 ‘독사의 종류들아 누가 너희에게 다가 올 징벌을 피하라 하더냐?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도끼를 나무뿌리에 놓았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찍어 불에 던지리라’고 외쳤습니다.

오늘 우리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 잠잠 하여도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불의를 보고 경고 할 수 있는 소리 지르는 산돌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너희는 산돌이 되라 한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지난 날 다윗의 손에 쥐어진 조그마한 조약돌이 산돌이 되어서 불레셋 사람 골리앗의 이마에 맞아서 그를 넘어뜨린 사건을 기억 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골리앗이 볼 때는 다윗은 젖먹이 어린 아이같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너는 어머니에게 가서 젖이나 먹으라고 비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너는 너희 힘을 의지 하나 나는 만군의 여호와를 의지하여 여기 섰노라’ 하면서 작은 돌을 던졌습니다. 그때 그 돌이 산돌이 되어서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것입니다.

옳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를 세운 수많은 벽돌보다 사실은 더 작은 돌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 들려지면 그 작은 돌이 산돌이 되어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가고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에 들어가서 역사되어지면 오늘도 흑암의 권세도 불의의 세력도 넘어뜨릴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산돌이 되어서 저 죄악 세상에 던져질 때 죄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상을 부시는 돌이 되어야 합니다.

느브갓네살이 꿈에 큰 신상을 보았는데 사람이 손을 대지 않은 돌의 신상을 부수어 뜨리는 타작마당의 겨같이 바람에 불려 간곳이 없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세계에 가득 차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땅에 불을 던지러 왔노라고 말씀 하시는 예수님은 세계 만국을 심판 하시는 산돌이시므로 그리스도가 온 세 계를 기뻐하실 날이 올 것입니다.

아모스는 뽕을 치는 가난한 목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래로 세상을 살필 줄 아는 예언자였습니다. 그에게 비친 당시의 사회상은 어떠했습니까?

여로 보암 2세의 선정으로 군사적 승리와 더 불어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이었으나 의리도 수치도 모르고 향락 하려는 것이 그 당시 지배자들의 모습 이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상을 보는 종교 지도자 들은 때가 악하니 말해 무엇 하랴 라는 심정으로 방관과 침묵으로 지내면 서 지배 계급을 옹호 하는 외에 하는 일이 없었고 하는 일이 있다면 제사 의식을 제물로 자기 배를 배불리는 데만 급급했던 것입니다.

도덕의 진실성과 종교의 순수성이 땅에 떨어진 모습을 본 아모스는 처녀 이스라엘이 넘어진 것이며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하리라고 공법을 물같이 흐르게 하라고 하는 것이 사는 길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의를 위해 투쟁 하면 어떤 예언자 들을 본받아 의의 역군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라는 것입니다.

산돌이신 예수님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 장로들이 쓸모없는 것이라고 버렸지만 예수는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고 로마는 예수님 쓸모없는 돌이라고 없이 하려 했으나 마침내 로마는 예수로 번영 하였고 세계문화는 예수님을 머릿돌로 기초 돌을 삼아 새 문화를 건설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직분은 맡으나 마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그 직분을 맡았다고 그 일이 잘 되는 것도 아니고 더 못 되는 일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교회는 발전도 없고 향상도 없습니다.

둘째는 그 직분을 받아서는 안 될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룟 유다는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 했다는 말을 듣는 사람입니다. 그 직분에 않아 있기 때문에 될 일도 안 되고 잘 되던 일도 모두 틀려 나간다면 그 사람은 직분을 맡지 말아 야할 사람입니다.

세 째는 그 직분에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 직분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의 빛이요 이 땅의 소금입니다. 그 교회에 은혜와 축복을 끼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희망과 기쁨이 됩니다. 이런 교회 교인 이 많아 질 때 그 교회와 민족은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까지 양로원, 고아원, 영아원, 나병 수용소 등 등 모든 요양 기관의 뿌리가 바로 교회 구호 사업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섰을 때 의로 영접 받기 위해서입니다.

마태복음 25;31-40절까지의 말씀은 우리에게 굉장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너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옷을 주었으며 내가 옥에 같혔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을 본적도 대접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제가 언제 주님께 봉사 했습니까? 라고 반문 하자 세상에 있는 소자 (지극히 작은 자를 돌 본 것이 곧 나를 돌 본 것이라 하셨습니다. 물론 이와 반대로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아 주지 않은 것으로 책망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칭찬과 책망이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느냐? 못사느냐에 따라 결정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을 되돌아봅시다.

산돌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자를 찾아 갑니다. 산 계곡에 가만히 암반으로 누워있는 것은 죽은 돌이요 찾아오는 자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을 줄 수 없다면 결국은 죽은 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산돌은 생수를 흘러 주며 찾아갑니다. 우리 영등포 시찰이 지금까지도 잘 해 오셨지만 앞으로 산돌 같은 역할을 잘 해 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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