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영삼
▲백석대 채영삼 교수

참 이상하다. 오래 전 이 땅에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있고, 회개와 부흥 운동이 있었을 때에는 죄에 대한 깊은 회개와, 그 결과로 정직하고 청빈하고 깨끗한 사랑의 삶을 사는 운동이 일어났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령 운동은 세속적인 부와 복, 그리고 각종 ‘대형’, 이를테면, 대형교회나 대형사고들로 연결되기 시작했다. 어떻게 성령의 역사가 부의 축적과 권력의 집중으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어떻게, 누가 어떻게 이런 연결고리를 만들었는가?

성경에서 성령의 역사는 결연하게 말씀과 함께 간다. 세례 요한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영에 붙잡힌 ‘빈들의 소리’였다. 예수님을 보라. 성령이 그 위에 임하사 비움과 순종의 길을 가신 하나님의 말씀이셨다. 초대 교회를 보라. 성령이 충만하자, 복음과 나눔을 위한 사랑의 말씀에 순종한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말씀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렇게 가야 한다. 그래서, 말씀을 일부 입맛에 맞는 구절들만 골라서 편식하는 태도는 성령 운동을 심각한 질병에 빠뜨린다. 만일, 말씀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으로 건전하지 않고 온전하지 못하다면, 그 성령 운동은 이내 귀신 운동과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이다.

성령과 거짓이 함께 갈 수 없듯이, 성령과 돈의 축적은 함께 갈 수 없다. 성령과 나눔이 함께 간다. 성령과 권력의 집중이 절대로 함께 갈 수 없다.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지극한 비움과 낮춤, 섬김이 함께 간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수천 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손을 대면 나음을 얻게 하시는 능력을 베푸셨어도, 그분은 자주 세상으로부터 ‘물러 나셨다.’ 복음서에서 이 ‘물러나심’의 모티브는 성령 운동이 어떻게 말씀, 곧 하나님의 뜻과 함께 가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서, 이루셔야 할 말씀, 곧 보냄 받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물러나셨다.’ 그분은 성령충만했고, 능력을 행하셨고, 그리고 물러나셨고, 비우셨고,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것이 성령충만의 결과이다.

성령충만과 거짓은 함께 갈 수 없다. 어떻게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강조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가. 성령충만이 곧 부정직과 복과 대형과 성공으로 연결되는 시대를 누가 만들었는가. 성령충만과 돈의 축적은 결코 함께 갈 수 없다. 사도들의 교회가 성령충만했을 때, 그들은 나누었고, 가난과 정직을 유지했다. 성령충만과 권력의 집중도 함께 갈 수 없다. 주님은 성령이 그에게 임하신 후, 모든 것을 버리셨고, 마귀에게 절하지 않으셨고,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버리셨다. 성령충만과 세상이 함께 갈 수 없다.

성령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 성령은 곧 진실하시고 겸허하시고 자기를 비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이 세상의 영이 아니다. 교회는 잘못된 성령충만으로 충만해져서는 안 된다.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는 성령으로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말씀과 함께 가지 않는 성령운동은 거짓이다. 진실함과 나눔과 비움으로 가지 않는 성령운동은 거짓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태 3:16: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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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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