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신학단상' 은 평신도들의 신학적 소양 함양(涵養)을 위해 각종 행사 등에서 신학자 및 목회자들의 발제문을 뽑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 7일 한국교회사학연구원(원장 이양호 박사) 세미나실에서 개최된 제204회 월례세미나에서 '통일로 향하는 교회의 길'을 주제로 발표한 백석대학교 주도홍 교수의 발제문을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주도홍 교수(백석대·기독교통일학회 명예회장·한국개혁신학회 회장)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도 외부에서는 독일의 '통일 비용'에 대한 우려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독일인도 통일을 비용의 문제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독일인이 완전한 자유를 찾았다는 점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통일 이후 독일인으로서 느낀 가장 큰 변화는 모두가 자유로이 여행할 수 있게 되고 표현의 자유를 누리게 됐다. 더 큰 의미에서는 냉전이 끝나고 유럽이 완전한 통합의 길로 들어서는 촉매 역할을 했다.

한반도 인구의 4분의 1이 자유 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건 너무나 큰 비극입니다. 모든 한국인들이 자유 속에서 살아가길 진심으로 바랍니다.(로프 마파엘, 독일 대사, 2015)

I. 들어가는 말

현존하는 세계 유일의 국가분단인 남북한의 분단은 어느 사이 70년이 지났다. 종전 62주년이 되었지만, 한반도에서는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성난 활화산을 방불케 하고 있다. 아울러 2015년 현재 남북관계는 진전이 없고, 시계추마냥 좌우로 오고갈 뿐이다. 박근혜 정부가 '한반도신뢰프로세스'를 앞세우며, '통일대박'을 외치며, 평화통일을 향한 나름의 '드레스덴 구상'(2014년)을 의욕적으로 제시했고, 박근혜 정부는 3년차인 2015년 핵심과제 중 하나로 남북 간 실질적 협력의 통로 개설을 원하지만, 북한의 반응은 부정적이고 시큰둥할 뿐이다. 도리어 북으로부터 오는 전쟁의 위협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어 남북통일의 한 축인 북한의 행태는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앞선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비핵 3천'을 외쳤지만, 실적 없이 닫힌 단절로 남북관계 5년을 보내고 말았는데, 박근혜 정부도 이대로 간다면 역시 아무런 열매도 거두지 못한 채 남북관계가 전혀 개선되지 못한 채 끝나지 않을까 염려가 된다. 분명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남북관계에서 분명히 의욕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되나, 북한의 태도가 이명박 정부를 대하는 이전 모습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의 특단의 조치가 제시되지 않은 한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화창한 봄날로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남북관계에서 길이 없는 것은 분명히 아닐 것인데, 한국정부의 리더십의 상실을 꼽을 수 있겠다. 물론 북한의 경우도 전혀 다르지 않다 하겠다.

이러한 현실에 서서 답답한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가야할 길을 숙고하며 남북통일을 향한 한국정부의 파트너로서의 할 일을 생각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과연 한국교회가 답답하고 꽉 막힌 남북관계에서 해야 할 일은 없는 것일까? 한국교회가 비정치적으로 길을 열어 남북의 정치적 관계에 숨통을 터줄 수는 없을까? 한국교회가 한국정부의 보다 지혜로운 파트너가 될 수는 없을까? 그렇다고 교회의 어긋난 정치화 내지는 정치신학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회는 교회로서 가야 할 길이 있고, 마땅히 그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분단을 향하는 한국교회의 의식이 원천적으로 전환되어야 함은 기본 전제이다.

한국교회가 분단을 넘어 통일을 향하는 여정에서 확실한 몫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네 가지에 대한 인식이 요구된다.

첫째, 분단이 얼마나 비참한 죄악인지 알아야 한다.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이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한국교회가 남북분단을 영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얼마나 무서운 죄악 가운데 한반도가 진통하고 있는지를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둘째, 성경적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좌파우파, 진보보수의 한 편을 붙들며 통일에 관한 입장을 찾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떠나 성경적으로 복음적 통일론을 정립하라는 것이다. 곧 진영논리를 떠나 예수님이라면 남북분단의 대치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지를 찾아, 순종하라는 말이다.

셋째, 세상의 위로자로 나서야 한다. 예배당에 갇힌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이 이루어져, 한국교회가 복음에 근거하여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남북관계에서 길을 잃은 한국정부의 소중한 파트너로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넷째, 한국 정부의 인식의 전환이다. 한국 정부가 빈번히 남북관계에서 한계상황에 마주치면서 무능력을 스스로 인정하고, 분단을 넘어서는 일에 있어 한국교회가 중요한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II. 공적 신학의 확립

무엇보다도 한국교회는 여전히 이원론에 머물며 남북분단을 넘어 통일을 향하는데 있어 자신들의 분명한 역할이 요구됨에 확신을 갖고 있지 못하다. 한반도의 반쪽이 독재와 가난,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어도 한국교회는 공허한 이웃사랑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거룩하다는 강단에서 큰 소리로 반복하여 외치고 있을 뿐이다. 한국교회가 북한을 향해 공통적으로 갖는 태도가 있다면 과거 그들로부터 당했던 아픈 상처를 반복하여 기억하며 성토의 메시지를 원수를 사랑하라는 복음의 요청과는 무관하게 반복할 뿐이다.

그 원인을 조금 더 세분하면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속의 분리로 인한 이원론에 빠져 교회는 거룩하고 정치는 속되어 교회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무관심과 무지로 인한 편견이 남북관계에서 주를 이루며, 둘째는 과거 한국 군부독재의 학습효과로 통일은 단지 정치가의 독점 업무로서 이에 참견하는 경우 반정부이며, 사상적으로 편향된 사람들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974년의 '로잔선언'이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정치 이슈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켜, 한국교회의 대 사회적 관심을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사실 그때까지 한국교회의 남북문제에 대한 관심 내지는 참여에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교회는 이 로잔선언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비로소 조심스럽게 교회 안으로 가져오기를 시작했다.(이만열) 어쨌든 그런 맥락에서 간략하게나마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교회사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뜻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칼빈에게 있어 국가와 교회는 긴밀한 파트너십을 형성해야 한다. 국가와 교회는 혼합되거나 중복될 수 없을 만큼 전혀 다른 본질을 가진 것으로 분명하게 서로 별개이다. 그렇다고 국가의 통치를 본질적으로 완전히 부패한 것으로 이해해서도 안 되고, 두 통치는 서로 대립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이 땅의 삶, 곧 국가를 통해 구현되는 일에 칼빈은 기대하며 긍정적이다. 칼빈은 이러한 국가와 교회의 아름다운 파트너십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모델이 제네바시의회와 제네바교회의 관계였다 할 수 있다. 칼빈은 1537년 『기독교강요』 요약 제37장 "국가의 공직자"에서 국가의 공직은 매우 긍정적으로 이해한다. 칼빈에게 있어 국가는 다른 의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들"로서 묘사된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종들은 마땅히 우리 주님을 생각해야 하며, 마땅히 하나님의 종들로서 백성의 신앙생활과 국민의 생활이 잘 이루어져, 국가의 번영과 평화가 확보되도록 일해야 한다. "주님은 이 신분을 우리에게 강하게 추천하시며 이 신분의 고귀한 존엄성을 말씀하신다. 주님의 주장(잠8:15-16)에 의하면, 왕들은 다스리고, 장관들은 질서 있게 처리하며, 재판관들은 이 땅의 위대한 아들이라는 사실은 주님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은 다른 곳(시82:6-7)에서 이 공직자들을 신들(gods)이라 부르신다. 왜냐하면 이들은 주님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 사도 바울(롬12:8)은 공직자들의 직책들이 하나님의 선물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바울이 이 문제를 더 본격적으로 논할 때에는(롬13:1-7), 이들의 권세는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졌으며 이들은 선행하는 자들을 칭찬하며 악행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는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명쾌히 가르친다." 그러기에 교회는 "이들의 구원과 번영을 위하여 주님께 기도해야 하며, 이들의 통치에 순응해야 하고 이들의 법과 제도를 따라야 하며 이들에 부과된 의무, 그것이 납세이든 아니면 어떤 직책이든 간에 수행해야 한다."

칼빈의 국가 공직에 대한 이해를 두고 볼 때, 첫째, 기독교인들로서 공직에 부름을 받는 일은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둘째, 가능하다면 크리스천들이 이 공직에서 하나님의 종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한다면 보다 바람직한 일로서 이해해야 한다. 셋째, 영적 통치인 교회와 국가의 통치 관계는 이럴 경우 얼마든지 좋은 파트너십을 형성할 수 있다.

감리교의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기독교의 사회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기독교가 사회성을 잃어버리면 기독교의 존재 의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마태 5:13-16의 설교 "세상의 빛과 소금"에서 사회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힘주어 말한다.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며, 따라서 이 종교를 고립시킬 때 이것은 죽고 만다."는 것이다. 기독교를 사회와 고립된 종교로 만들어 갈 때, 결국 기독교는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의미이다. 웨슬리는 교회의 평화를 위한 노력peace making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이다. "기독교에서 이 덕을 제거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존립 상 역시 치명적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러한 소중한 사회적인 소명에 매우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기독교의 사회성을 내면적 신앙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이해한다. 웨슬리는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5:15)를 인용하며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세상에서 밝히 드러내고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가 사회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하여 성경과 인간의 이성이 이렇듯이 명백히 증거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반대자는 그럴듯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이 사회와의 접촉을 끊고 은둔적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기독교의 사회성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흉계를 알지 못하는 자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사회성을 부인하는 이론은 다양할 뿐 아니라, 또한 철저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지혜로 이를 간파해야 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를 타파해야 합니다." 웨슬리는 마5:16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를 인용하며 탈세상적이고 폐쇄적인 신앙적 자세를 가진 자들을 사탄의 계략에 넘어간 자로 일컬으며, 그들을 성령의 지혜로 물리칠 것을 요청한다. 이 기독교의 사회성이야말로 오로지 우리의 하늘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프린스턴신학교의 스택하우스는 현대교회가 공공신학에 바로 서서 진정한 교회상을 정립할 것을 요청한다. "공공신학은 배타주의 집단에 의한 모든 종교적 자아찬양self-celebration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공통담론common discourse이 파악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동의 삶을 다룰 수 있는 역량을 양성하려고 노력한다. 요컨대, 공공신학은 시민종교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다. 공공신학은 사회적 삶에 있어 종교의 역동성이 갖는 힘을 인정하는 것이며, 역동성의 어떤 특질이 유효하고 정당한지를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감정鑑定하는 것이다." 공공신학은 종교가 문화 속에서 작용하는 방식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는 단지 신앙과 계시에만 초점을 맞추는 배타적인 일부 교리적 전통들과는 대조를 이룬다. 많은 종교적 언어는 처음 들으면 생소하게 들리는데, 형이상학적이고, 상징적이며, 신화적이고 시적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이해 가능한 용어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게 된다. 스택하우스는 자신의 입장을 떠받치기 위해 센델, 페리, 그리고 월터스토프를 가져온다. 철학자 센델Michael Sandel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사회 정의는 종교적 담론과 결코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다고 보며, 페리 Michael Perry는 인간의 존엄성과 이웃 사랑을 향한 최고의 인식은 종교적 논의를 통해서 확보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자유민주주의 정치는 정의에 관한 토론의 장을 제공할 수는 있으나, 논쟁 중인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경험적으로 이해한다. 그러기에 신학의 역할을 심각하게 억제하려는 사람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차별적이라 이해한다. 공공신학과 정치신학은 구별되는데, 정치신학은 정부의 정책입안에 있어서 정치와 신학을 너무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반면에, 공공신학은 하나님의 통치의 원칙과 목적이 공동의 삶의 조직 안으로 스며들게 하려 한다. "공공신학은 정치에 대한 사회 이론을 채택하는 경향이 있고 정치신학은 사회에 대한 정치적 관점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스택하우스는 정치신학이나 시민종교와는 거리가 먼 성경에 입각한 공공신학을 현대교회가 바로 이해하고, 교회가 분명하고 확실한 음성과 행동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동적 역할을 감당할 것을 주문한다. 이는 정치가 갖고 있는 한계를 인식하며, 그 틈새 블루오션에서 고난당하는 세상을 향한 교회만의 사명을 감당하여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의 소명에 충실히 응답할 것을 요청한다.

칼빈, 웨슬리, 스택하우스 세 사람의 입장은 동질성을 갖지만, 시대와 상황적 배경이 달라 차이점도 적지 않다 하겠다. 칼빈의 땅 16세기 스위스의 제네바는 어떤 면에서 신정theocracy으로 생각할 정도로 정치와 교회의 관계는 긴밀하였다. 18세기 웨슬리의 땅 영국은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생각해도 부족함이 없는 정치적 배경으로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그 어떤 땅보다도 앞서 구분되었으며, 스택하우스는 중도적 입장을 가진 20세기 신학자로서 구별된 이해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세 사람을 가져온 이유는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이데올로기에 경직된 한국의 교회가 그들로부터 분명히 경청할 내용이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곧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기억하고 세상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혁해야 하는 사명에의 강조이다. 분단의 고통에 시달리는 남북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소망이 구체화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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