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요 1:1-8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2. 시작 기도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당신은 진실로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나이다.
영원에서 허락된 인간의 시간 2015년이 밝았습니다.
구원을 목적하는 이 시간 안에서 영원을 현재로 사는 자 되게 하소서.
날마다 아들을 힘입어 당신의 품에 거하게 하사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사망의 세력은 십자가에서 무력하게 되었으나 나를 속이고 힘을 떨칩니다.
메마른 실존, 황폐한 상황이라도 오직 주를 갈망하며 그 안에 연합되게 하소서.
아들의 죽음으로 새로운 살길,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셨으니 팔레시아의 복종으로 당신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소서.
올 한해 무슨 일을 만나도 아들 안에 있는 당신의 사랑에서 나를 끊을 수 없나이다.
그 사랑으로 넉넉히 승리하며 땅 끝까지 이르러 주의 증인된 사명을 다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제 4복음서 요한복음은 예수의 사도중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시기는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으나 A.D. 90년 전후가 유력하다.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복음서 자체 안에 기술되어 있다.
창세전부터 현존하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다(1:14).
그는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며(1:18),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3:14-15; 요 20:31).
교회사적으로 요한복음은 초기 기독교 사상의 흐름을 결정하는 핵심적인 책으로 평가된다,
초대 교회에서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리스도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였다.
기존의 공관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 안에 계신 구원자로 제시되며 그의 존재와 활동은 공생애의 범주로 한하고 있다.
곧 그의 탄생, 사역, 죽음과 부활의 영역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공생애는 물론, 창세전부터 존재하고 활동한 구원자로 기술된다.
특히 유대교와 스토아철학에서 논하는 '로고스'에 대한 실체적 계시가 언표되었고(1:1), 창세전부터 지속되어온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이 계시되었다(17:5).
이 점에서 요한복음은 기존의 철학과 종교를 초월한 구원자 상을 제시함으로서 기독교의 진리가 모든 철학과 종교를 뛰어넘는 차원임을 설파하였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서 기존에 분산된 기독론의 요소를 모아서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 신자들이 신앙하는 그리스도는 요한복음에서 언표된 그리스도이다.
그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이에 기독교의 구원은 죄사함에 그치지 않으며, 그를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내용으로 하게 된다.
이 영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과 더불어 갖는 사귐과 누림이며(17:3), 궁극적으로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다(17:24).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지며 부록이 첨가된다.
1:1-18; 서언 / 1:19-12:50; 표적과 담론 / 13:1-17:24; 예수와 제자들 / 18:1-20:31; 수난과 부활 / 21:1-25; 부록
요한복음은 선재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1절).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2절).
모든 것이 그를 통하여 생겨났으며 그를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3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4절).
빛이 어둠 속에 비치니 어둠이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또는 이해하지 못하였다)(5절).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세례) 요한이었다(6절).
이 사람은 증거하러 왔다. 빛에 대하여 증거함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를 통하여 믿게 하려하였다(7절).
그런데 이 사람 요한은 빛이 아니다.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을 뿐이다(8절).
복음서는 공히 예수의 활동의 시초(헬, 아르케)로부터 시작한다.
마가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서 예수의 활동으로 시작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의 동정녀 탄생으로부터 시작한다.
반면 요한은 창조이전의 태초(아르케)로부터 시작한다.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태초는 창조가 시작되는 창세기의 태초보다 선재한다.
창세기의 태초는 시간의 연속선에서 최초의 점이며(in the beginning)이며, 요한복음의 태초는 시간이 시작되기 이전(before the beginning of time), 곧 '시간의 피안'을 의미한다.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와 달리 요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진실하게 평가할 수 있는 관점은 그가 창세전부터 존재하고 활동해왔다는 그의 '영원성'에 있다.
창세전 태초에 말씀(헬, 로고스)이 있었다!
그리스말로 로고스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요한이 염두하는 바 로고스는 스토아학파와 유대교(필로)에서 말하는 로고스이다. 그들이 말하는 바는 로고스가 우주의 창조의 근거 또는 능력이 된다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에서 로고스는 내재하는 이성이며 동시에 그것이 물질적 객체를 통해 표현되는 이성이다.
곧 로고스는 우주를 창조하는 신적 요소가 되며 그리하여 로고스는 '창조의 신'이며 '우주'이다.
또한 유대교에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는 수단으로서 본질이다.
여기서 말하는 '본질'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본질이며, 곧 하나님의 중재자를 의미한다.
스토아학파와 유대교 입장에서 로고스는 공히 세상 또는 우주를 창조하는 비인격적인 실체를 말한다.
한편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에서는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을 로고스로 불렀다(창 1장). 그리고 신약시대 말씀(로고스)은 아들이자 동시에 그가 전한 메시지로서 복음이다.
그런데 여기 요한이 뜻하는바 로고스(말씀)는 창세전부터 현존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다.
더욱 분명한 것은 요한이 기록한 다른 서신(요한일서)에서 파악된다.
요한일서의 시작 역시 '태초'이다. 그 태초에 '생명의 말씀'이 있었다. 이 생명의 말씀은 창세전 태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나타난 생명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있는 말씀(로고스)은 생명을 주는 말씀이며, 아들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요일 1:2).
창세전부터 계신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5:26).
아들은 유일하게 아버지의 생명으로 태어난 독생자이다(1:18).
아버지께 있는 생명, 영원한 생명은 이제 아들 안에 있게 되었다(1:4).
이 생명은 생명의 말씀으로 태어났으며(약 1:18), 아버지께로부터 생명의 말씀이 나올 때 성령이 내쉬어졌다(요 6:63 참조; 16:13; 진리의 성령).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여기 '함께'는 말은 창세전부터 현존하는 두 신격의 존재양식을 말한다.
1:1의 '함께'는 1:18의 '품속'으로 해석된다(수미쌍관, inclusio).
곧 아들이 아버지의 품속에 거함으로 아들의 아버지와 함께 한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함께' 또는 '품속'안에는 권위와 질서가 존재한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시다(14:28;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하위권위인 아들은 상위권위인 아버지께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였다(15:10).
상위권위인 아버지는 복종하는 아들을 사랑하여 그에게 영광을 주셨다(17:24).
여기서 영광은 아버지의 '본질의 계시' 또는 '존재의 드러남'을 뜻한다(1:18).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은 사랑의 교차 속에서 함께 하셨는데, 사랑의 본질은 서로 다르다. 상기한대로 아들은 아버지께 복종하는 사랑을,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하신 것이다.
아들의 복종하여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상태는 '하나'됨이다(17:22-23).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가 된다(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이는 곧 1:1절,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이로써 내재적 삼위일체가 계시된다.
1:2, 다시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이제 말씀은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하나 되는 인격적인 실체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가 세상(우주)을 창조하셨고 그가 없이는 지은 바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이 말은 스토아학파에서 말하는 창조의 신으로서 로고스와 유대교에서 말하는 창조를 위한 중재자 로고스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부인하는 말이다. 창조는 막연한 신에 의한 일시적인 창조(스토아학파)가 아니고, 우연한 중재자에 의한 창조도 아니다(유대교). 다시 말해 창조는 헬라철학이나 유대교에서 말하는 비인격적인 로고스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그와 하나된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사건인 것이다.
그 (아들)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인 것은 구원론적 측면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창세전부터 실재해온 빛을 말한다.
이 빛은 피조된 빛이 아니며(창 1:3), 광명체로서 빛은 더더욱 아니다(창 1:14).
이 빛은 창세전 아들 안에 있는 생명과 병치되며 사람들에게 비친다.
이 빛은 창세전부터 현존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고후 4:6).
그러므로 이 빛은 생명을 인도하는 복음이며 생명을 주는 말씀(생명의 말씀)이다.
그러나 어둠에 속한 세상에 있는 사람은 그 영광을 아는 빛을 깨닫지 못한다.
여기 '깨닫다'의 헬라어 '카타람바네인'은 '이기다, 잡다'의 뜻이며 중간태로 쓰일 때에는 '이해하다, 마음으로 파악하다'의 뜻이다. 우리 성경의 난하주는 '또는 이기지 못하더라'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둠은 빛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그 빛을 끄지도 못한다(이기지 못한다).
세상, 곧 어둠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 창세전부터 계시된 복음(생명의 말씀)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 빛, 곧 생명의 말씀을 피할 수도 없다. 그러니 그 영혼 깊은 곳에서 끝없이 하나님을 알고자 한다.
이렇게 빛이 세상에 왔기에 그 빛을 알기까지 목마르고 방황하며 어둠을 경험한다.
신앙생활을 해도 창세전 진리, 그 말씀을 알기까지 유리방황하며 그 영혼이 피곤하며 거할 곳을 찾지 못한다.
그 빛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비추어진다(요 3:34; 고전 2:10).
서언의 두 번째 말씀(6-8절)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요한을 언급한다.
하나님은 빛에 대한 증거자로 세례 요한을 보내셨다.
이는 그가 빛을 증거함으로써 사람들이 아들을 믿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요한은 빛이 아니라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일뿐이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태초, 곧 근원을 묻는 생명의 종교이다. 물론 헬라철학에서도 근원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근원은 모두 만물 안에 속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근원은 만물 위, 창세전, 태초에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며 이는 태초의 말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요일 2:13).
만일 하나님을 신앙해도 태초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요 3:33).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만물 안의 신이 되어, 사람들의 현세적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울이 거기로부터 회심한 유대교는 철저히 만물 안의 신으로서 하나님을 신앙하였다. 유대교에는 하나님이 주신 탁월한 신앙의 요소들이 있었다.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과 예배와 약속과 믿음의 조상들, 심지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왔다(롬 9::4-5).
바울은 바로 그들이 구원받기를 위해 사모하되 차라리 그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께서 끊어질지라도 원하였다(롬 9:3).
그에게 절실한 것은 하나님을 믿노라하는 저들이 궁극적으로는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을 신앙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이 있으리로다"(롬 9:5).
바울은 자신이 보았던 태초, 생명의 빛을 그가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비추어지기를 간절히 열망하였다. 평생 창세전 아들 안에서 약속된 생명을 주는 복음(딤후 1:1, 10), 그 일을 위해 헌신하며 투혼하였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4. 나의 묵상
나는 오래도록 어둠에 갇힌 자였다.
태초, 로고스, 생명의 말씀은 물론 태초부터 계신 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다.
아니 거기에 관심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세상의 존재물에 대한 관심이 가득했고, 근원에 대한 물음보다 현상의 문제 해결이 신앙의 목적이었다.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니 하나님이 주신 영적 존재물도 풍부하였다.
여러 가지 은사, 체험, 직분, 성과등 많은 영적 존재물들을 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내 영혼은 언제나 밤이었으며, 은밀하게 세상 사람의 풍속을 따랐다.
물론 내게 태초부터 존재하는 생명의 빛이 비치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도록 깨닫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빛을 피할 수도, 끌 수도 없었다.
목마름은 계속되었고 거할 성을 찾지 못해 유리방황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내게 그 빛이 비추어졌다.
복음으로 생명을 얻는 그 말씀이 깨달아졌다.
존재의 절망, 어둠의 밑바닥에서 계속해서 비추던 빛이 깨달아진 것이다.
어렴풋이 비추어지던 빛은 2010년 1월부터 시작된 요한복음을 통해 환히 비추어졌다.
창세전 영생의 진리가 내게 깨달아졌고, 비로소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게 되었다.
바울처럼 '만물 위에 계신 하나님께 세세토록 찬양하라'가 나의 고백이 되었다.
만 5년 만에 다시 요한복음을 묵상한다.
아, 내 영은 춤을 추듯 기뻐한다. 비추고 비추어도 한이 없는 빛이다
그 빛은 오늘도 세상에서 눈을 뜨는 내 어둠을 밝힌다.
어찌 그 빛을 피할 수 있으랴! 그 빛으로, 그 빛 가운에서 하루를 맞이한다.
2015년 새 해를 맞이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빛을 증거하는 자로 부르셨다. 복음과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세우셨다.
마다가스카르 안타나나리브 한인교회에서 오늘부터 4일간 '복음과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
내게 비추어진 빛,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아는 빛을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증거한다.
나는 빛이 아니기에 티끌과 재 가운데 엎드려 주의 자비와 긍휼을 구한다.
예수를 믿노라 하지만, 그 빛을 알지 못해 어둠 가운데 있는 영혼들에게 비추어지기를 간구한다.
누가 그 빛을 피할 수 있으며 누가 그 빛을 끌 수 있으랴!
그러나 그 빛은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
오직 성령의 증거로만 깨닫고 알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이다.
내가 성령에 붙들리고 저들에게 성령이 증거하여 우리 모두 빛 가운데 거하기를 사모한다.
보혈로 씻김 받아 새 영과 새 마음이 되어 주의 성령이 내 안에, 우리들 안에 역사하기를 두렵고 떨림으로 사모한다.

■ 서형섭 목사는...

서 목사는 하나님의 검증을 마친 영적지도자다.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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