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철 목사   ©소망교회

나라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올해 삼일절은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시작했던 날로부터 9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3%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삼일운동에 가담한 사람들 중 기독교인의 비중은 30~40%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 사랑을 나라 사랑과 연결했다는 것입니다. 즉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 사랑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나라에 대한 사랑임을 고백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뜻입니다.

독립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 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여기에 조선이 독립된 나라인 것과 조선 사람이 자주 국민임을 선언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과 자유인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임을 알고, 이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헌신했던 것이 바로 당대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사람이 자기의 실존 전체를 걸고 말을 하는 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은, 깊은 숙고와 고민 끝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소명과 사명을 깨닫는 순간, 이런 말과 행동은 강렬하게 드러납니다. 반면 소명과 사명이 없으면, 결정적인 순간에, 결정적인 일에, 우리의 삶이 투여될 수 없습니다. 그저 '그냥 지나가자', '나는 옆에서 구경할 거야' 하며 주변을 맴돌다 지나치게 됩니다. 시간에 대한 질문은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이렇듯 내 삶을 헌신하겠다는 열정은 소명과 사명이 있을 때 생깁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에게는 중요한 물음이 있습니다. 바로 시간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시간과 때에 대한 물음에는 두 가지 각도에 따라 매크로(macro)적인 질문과 마이크로(micro)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바꿔 말하면 거시적인 안목, 즉 큰 틀에서 질문하는 것과 미시적인 안목, 작은 틀에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먼저 거시적인 안목의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나의 때는 언제일까?' 내 환경을 들여다보고, 내가 속한 시대의 흐름을 염두에 두 면서 삶의 목표라는 큰 틀을 간직한 채 스스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늘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모세는 사십 세 때, 자신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 받은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무력하게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삶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쓰신 것은 모세가 80세가 되어서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그제야 그는 출애굽의 지도자로 나서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그림이었습니다.

요셉은 어렸을 때 하나님께서 꿈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는 꿈꾼 것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면 꿈이 이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들에 의해17세 때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그리고 애굽의 총리로 올라설 때까지 13년 동안의 세월을 종으로, 때로는 죄수로 보내야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미시적인 안목의 질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할 때인지 묻는 것입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도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와 비슷했습니다. 그들도 자기의 때를 알 때 까지 고뇌했습니다. 때로는 안개 낀 도로를 주행하는 것처럼 당혹스러운 경험도 했습니다.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래 도 앞을 향해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발버둥도 치고, 이리저리 준비도 했습니다. 공부도 했고, 인간관계도 형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더 중요한 것을 위해 그들을 멈추셨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품 훈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사용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가르치신 가장 중요한 것이 '나의 혈기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나의 꿈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과 욕심으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주 위험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공동체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과 도구로 사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전도서 기자는 시간이란 결코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창조물인 것처럼, 시간도 하나님이 친히 만드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그것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전도자는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전도서 3:1) 공간을 만드신 하나님이 시간도 만드셨습니다. 모든 시간을 하나님이 지으시고 나누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본적으로 숙명론을 거절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인격적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를 사랑하셔서 역사 속에 당신이 직접 참여하시고, 아들까지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전도자는 시간의 내용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14쌍의 대비적인 사건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몇 구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전도서 3:2)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도서 3:4)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전도서 3:8)
인생에는 차례가 있으며, 희로애락을 적절하게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란, 춘하추동의 역사뿐만 아 니라 우리 인간의 삶 안에서도 놀라운 간격들과 기한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도자가 이 말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려는 것들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전도자는 지혜자입니다. 무엇보다 인생을 꿰뚫어보고 있는 지혜자입니다. 특히 시간에 대해서도 지혜의 핵심을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구분할 줄 알라는 것입니다.

즉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많은 신비가 있지만 그중에 최고의 신비가 무엇일까요? 시간의 신비입니다. 시간은 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 없습니다. 남 에게 빌려줄 수도, 남의 것을 받아서 쓸 수도 없습니다. 빌려주거나 빌릴 수 없는 거의 유일한 것이 아마 이 시간일 것입니다. 나 의 시간은 내게만 해당됩니다. 남에게는 남에게만 해당되는 시간이 있습니다.

은행에 돈을 저축했다가 후에 찾아 쓰듯이 시간을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이 공평하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붙들어 매서 천천히 가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그저 자신의 속도대로 흘러가는 것이 시간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종종 이렇게 구분합니다. 과거, 현재, 미래. 하지만 사실 이 구분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이미 1700년 전, 어거스틴은 시간에 대한 비밀을 그의 고백론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과거는 없고, 아무리 받아들이려고 해도 미래는 다가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존재하는 건, 오직 '현재'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현재도 결국 금방 지나가는 과거가 된다고 하면서, 이런 재미있는 표현을 합니다.

"시간은 오직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현재와 미래의 현재만이 있다. 과거는 기억하면서 현재가 되는 것이고, 미래는 바라보면서 현재가 되는 것이고, 현재는 지금 누리면서 현재가 되기 때문에 내 가 쓸 수 있는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뿐이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현재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입니다. 지나간 과거를 아무리 그리워하고 붙잡으려고 해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 도자는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가장 소중한 지금을, 현재를 마주대하고 견딜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현재와 직면하기를 싫어합니다. 현재를 직시하면 갑자기 불안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내가 시 간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나?' 이런 생각들로 마음 속에 염려와 불안이 엄습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현재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핑계를 대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뤄 버립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신 하나님이 주신 이 삶을 즐거워하고 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습니까? 겨울이 되면 겨울 그 자체를 즐거워하기보다 '빨리 봄이 왔으면?!' 하고 봄을 기다립니다. 또 봄이 오면 봄을 즐거워하기보다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이 되면 너무 덥다고 가을을 기다립니다. 이것은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들어진 우리의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소중한 즐거움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때를 따라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을 많이 만드셨다. 네가 젊으냐? 젊음을 즐거워하라. 네가 장년이 되었느냐? 네 장년을 즐거워하라. 네가 노년이 되었느냐? 그 노년의 삶을 즐거워해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때를 따라 그 속에서 즐거워하면, 지금의 시간이 영원과 연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세계가 무엇인지 전도자는 다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영원이 무엇입니까? 곧 예수님입니다. 부활과 생명입니다.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 영원의 세계에 우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 게 주어진 매시간, 매순간에 영원을 사모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즐거워하고 누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신뢰입니다. 누구에 대한 신뢰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는 불안하기 때문에 속도를 내며 서두릅니다. 바쁘다, 바쁘다 노래를 부르는 것도 내 시간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시간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에 대한 확신이 모자라기 때문에 자꾸만 바삐 움직이는 것입니다. 신뢰가 부족하여 조급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 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이사야 28:16)

무엇을 믿는다고 합니까? 기촛돌, 즉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다급하고 바쁘게 인생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일이 많아도 여유와 넉넉함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그저 바쁨 속에서만 살아가면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집니다. 다급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고, 이 세상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임을 놓치고 살기 때문입니다. 독일 속담에 '서두르지도 말고 쉬지도 말라(Eile mit Weile)'는 말이 있습니다. 서두르되 천천히 서두르라는 것입니다. 속도를 낼 때마다, 서두르게 되고 바쁠 때마다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이 부족하구나. 내가 다시 하나님을 신뢰해야겠다.

내가 시간 속에서 영원을 만나리라.' 이것이 인생의 지혜입니다. 불안한 사람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다림이 모자라기 때문에, 바라봄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자연만물의 움직임을 눈여겨 볼 수 있고, 내 인생의 흘러감을 고맙게 생각하며 누릴 수가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지금을 누리십시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어떤 시간입니까? 여기에는 청년들도 있고, 장년, 노년의 시간을 살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의 시간 선물에 감사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계십니까? 저는 제 아버지보다 곱절 이상을 살고 있습니다.

제 어머니보다 10년 이상 더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이 주신 이 시간들이 그저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기뻐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말씀을 증거하는 순간도 기쁨이고, 쉼 을 갖는 시간도 기쁨이고, 사람을 만나는 시간도 기쁨이고, 홀로 있는 시간도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간들을 모두 축복하신 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삼일절을 맞은 이 나라가 어떻습니까? 지금 애국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국민의 이름을 파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습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 주어진 일을 제대로 해나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답고, 경제인은 경제인답고, 교육자는 교육자답고, 전문가는 전문가답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영적 지도자는 영적인 일에 더욱 몰두했 으면 좋겠습니다. 여기저기 문어발처럼 여러 마음을 담근 채 국민의 이름으로, 애국의 이름으로 분주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소란한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성실히 임하면 모든 분야가 잘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계신 그 자리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시간의 모습임을 다시 확인하면서, 이때를 감사와 기쁨으로 누릴 줄 아는 하나님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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