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교회 이국진 목사   ©이국진 목사 페이스북

서울에 이어서 대구에서도 동성애자들의 축제 한마당인 대구 퀴어축제가 이번 주 토요일(6/28)에 열린다고 한다. 이러한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놀랍게도 동료 목사님들로부터였다. 아마도 대부분의 대구 시민들이 동성애자들의 축제가 대구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텐데, 동성애 반대연대 기독교 단체들은 열심히 동성애 축제가 언제 어디서 있다는 것을 아이러니컬하게도 홍보해주고 있다.

나는 동성애가 성경적으로 볼 때 죄악이며,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동성애와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다르게 해석하여 동성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절이라고 말하는 것을 면밀히 검토해보았으나, 그러한 해석은 자의적인 해석으로 옳은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성경을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면,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도 반대를 하는 것이 옳다고 나는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성애에 대한 대응이 전혀 성경적이지 않으며, 전략적으로도 어설픈 것임을 크게 우려한다. 최근 나는 대구 기독교 총연합회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6.28 동성애 퀴어 축제 저지와 대구를 위한 거룩한 도시로 하기 위한 기도회를 이번 주 토요일에 동성애 축제가 열리는 바로 그곳에서 하겠으니 참여를 독려해달라는 문자였다.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손을 놓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이 땅에서 동성애라는 죄악을 없애고자 하는 열정에 감탄해마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전략적으로도 옳은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불신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물리력을 동원하여 응징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구약성경에서는 물리력의 사용이 정당화된 적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민족이 모압 여인과 행음할 때,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일어나 그들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민 25). 결과적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멈추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당시 이스라엘 민족이 섬기던 우상인 바알과 아세라를 찍어버렸다(삿 6). 하지만 이러한 행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었고,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언약을 맺은 백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뜻을 떠나 죄악을 저지르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당연했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신정국가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불신자들이 무슨 악을 행하든, 그것은 마지막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을 일이지,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그 심판을 수행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불신자들이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 상관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고전 5:12-13). 고린도전서 5장의 말씀은 밖에 있는 사람들, 즉 불신자들이 무슨 짓을 하든지 우리가 상관할 바가 아니며, 그들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겨두라는 말씀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향해서는 목소리를 크게 낸다. 그 동안 막강한 권력을 가진 불의의 세력에 향해서는 찍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이 우리 한국 기독교가 아니었던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하여 목숨을 걸고 저항한 극소수의 성도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친일 목회자들은 직접 성도들을 이끌고 궁성요배에 참여하고 신사에 머리를 숙였다. 그런 목회자들은 친일과 배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반성이 없이 계속해서 목회를 해왔고, 독립 이후에는 힘을 가진 정치권력 앞에서 아부했으며, 힘을 가진 소위 "크리스천" 정치인이 불당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든 그리고 사악한 범죄를 저지르든 상관없이 그들을 축복해주었다. 그런데 우리보다 힘이 약해보이는 자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정죄의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은 모순이다.

둘째, 불신자들이 악행을 행하는 것을 정죄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결코 그들을 악행으로부터 돌이키지 못하기 때문이다(마 7:6). 오히려 더 반발하며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동성애 축제를 하면서 자신들은 핍박을 당하고 있으며 부당한 차별을 당하는 것이라는 순교자적 자세로 동성애 반대 운동에 대하여 대응하고 있다. 이를 바라보는 일반인들도 심정적으로 동성애자들을 피해자로 생각하여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노이즈 마케팅에 말려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무력시위를 통해서 전파된 적이 없다. 오히려 복음은 핍박을 받으면서 더 능력이 있게 전파되었다. 방송국 앞에 가서 우리들의 힘을 보여주고, 동성애자들의 집회 현장에 달려가서 우리의 세력이 훨씬 더 크다는 위력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결코 진리를 전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이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까지 돌려대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정복해왔음을 기억해야 한다(마 5:38-42).

물론 우리는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잘못된 행위이며 가증스러운 죄악임을 강단에서 분명하게 가르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세력과시를 통해서 우리의 주장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셋째,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악에 대하여 불쾌함을 표시하기보다 나의 죄악에 대하여 더욱더 민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많은 죄악을 저지르고 있으면서, 불신자들이 동성애를 하는 것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들어있는 티끌을 보기 전에 내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먼저 보고 회개해야 한다(마 7:1-5).

넷째, 동성애가 이 세상에 퍼져나가는 것에 대한 과도한 염려는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동성애는 최근의 일이 아니고 더 나아가 지금 시대가 악하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동성애의 문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인류 가운데 있어온 죄악이었다. 하지만 절대적이고 강력한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다. 아무리 악이 심각하다 하더라도 진리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나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사탄의 권세를 이미 물리치셨으며, 결국은 악이 승리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승리하게 되어 있다.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서 이런 축제를 벌이는 것은 번지점프대 앞에서 "자신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것과 같다.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더 크게 자신이 있음을 외치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악한 것이며 부끄러운 것임을 알기에 더더욱 크게 정당성을 부르짖는 것일 뿐이다.

동성애는 아무리 그들이 미화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롬 1:27). 그들이 아무리 동성애를 옹호하려 고 해도 그들은 동성애를 통해서 결코 만족함을 얻을 수 없고 오히려 그들은 피폐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속에 양심을 심어놓으셨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자신들이 잘못하고 있음을 알 수밖에 없다(롬 1:20).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대응은 참된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방식대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며 그리고 사랑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진리는 아무리 숨죽이고 있어도 전파되는 힘이 강하다.

다섯째, 아무리 죄인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와 정당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러한 권리를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들이 아무리 성경적인 입장에서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 나름대로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그것을 우리가 무력으로 중단시킬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우리에게 그들의 축제를 방해하고 그들의 행사에 똥물을 뿌릴 권리는 없다.

여섯째, 우리가 그들의 행사를 방해하고 맞불을 놓는 것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부당하게 자유와 사랑을 침해당하고 있음을 선전하는 일에 말려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울에서는 동성애자가 펑펑 울면서 도대체 왜 내가 무슨 나쁜 짓을 그들에게 했기에 나를 이렇게 핍박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사람들의 동정을 이끌어내려 했다고 한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우리가 횡포자로 보이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그냥 놔두면 그들의 기괴한 행위들에 대한 혐오를 느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당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강력한 비난을 퍼붓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예수님께서 세리들을 향해서는 "이 도둑놈들아" 하고 비난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창기들을 향해서 "이 더러운 년들아" 하고 비난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을 품으셨다. 그때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왔다. 세리장이었던 삭개오는 자신들의 죄악을 뉘우치고 자신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서 부당하게 탈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다(눅 19:8). 우리가 진정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기대한다면 우리의 동성애에 대한 대응방법을 성경적으로 다시 한 번 재고해야 한다.

물론 동성애가 죄악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놀랍게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성애가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말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대구 #퀴어축제 #남부교회 #이국진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