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솜니 목사(올리브교회 담임)   ©올리브교회

본문: 마태복음 15:1~28

사람은 자신의 생각을 주로 말과 글로 표현을 한다. 글은 독자들에게 시대를 넘어선 전달력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말은 단순한 소리와 의미를 넘어서 화자의 생생한 감정까지 실어 나른다. 그래서 화자의 표정이나 몸짓, 목소리 톤의 높고 낮음에 의해 같은 말이라도 그 뜻이 달라지게 된다.

많은 대화들로 구성된 성경을 읽을 때에도 이런 점들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여느 소설들 같은 자세한 부연설명들이 적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 해석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본문은 특히 그런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이 본문을 접할 때마다 낯선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밖에 없다.

한 이방인 여자가 자신의 귀신들린 딸을 구해달라고 예수님께 소리지르며 다가오지만 예수님은 그 요청을 무시하신다. 그래도 이 여자가 소리지르며 다가오자 자신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을 위해서 일하러 왔다고 그 요청을 거절하신다. 예수께선 여인이 포기하지 않자 그 여인을 개에 비유하시면서 매우 모욕적인 말을 그 여인에게 던지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이 끝까지 포기할 수 없다는 집념을 보이자 갑자기 예수님의 굳었던 표정이 밝아지면서 마치 이전까지 속마음을 감추고 있었다는 듯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시며 그녀의 딸을 고쳐주었다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본문 해석이다. 과연 그럴까?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매우 낯설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여러 정황들을 통해서 이 이야기에 좀 더 생동감을 넣어야 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기초로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깊게 탐구해보아야만 한다.

오늘 본문은 15장 전반부에 나타난(1~20절) 이야기와 맥락을 같이한다. 21절에서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라는 말은 앞과 뒤의 이야기가 시간적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전반부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예수님의 제자 몇몇이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채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 광경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목격했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자들이었는데 아마도 예수님을 감시하기 위해서 온 자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제자들의 잘못을 목격한 것이다.

'바빌로니아 탈무드' 구전율법을 책으로 편찬한 것을 '미쉬나'라고 하고 그 미쉬나를 해석한 주석부분을 '게마라'라고 한다. 오늘날 탈무드라는 말은 미쉬나와 게마라를 통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원솜니 목사

유대인들의 율법은 성문율법과 구전율법으로 되어 있다. 성문율법이란 기록된 율법으로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이다. 하지만 성문율법에 모든 생활의 규범이 기록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랍비들은 성문율법을 근거로 여러 생활 분야의 상황에 맞게 율법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할지를 해석해주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 권위있는 랍비들의 율법 해석과 명령들은 축적되어갔고 성문율법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것을 가리켜 구전율법이라 한다.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는 구전율법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모든 생활을 통제하는 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 율법을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구전율법을 성문율법과 동일한 권위로 두는 것은 신명기 4:2 말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17~20 에서 말씀하신 율법은 성문율법으로써 예수님 자신은 성문율법은 신실하게 따르셨다. 하지만 구전율법(전통)의 여러 잘못된 점에 대해선 비판을 가하셨으며 이점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의 끊임없는 마찰을 빚어냈던 것이다.

기도를 하기 앞서 손을 씻는 유대인들   ©원솜니 목사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과 외출하고 돌아와서도 물을 뿌려 씻지 않는 것은 구전율법에서 금지된 일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위생상의 문제가 아닌 종교적인 문제였다. 본문에서 이 구전율법을 지키지 않은 제자들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12제자가 아닌 아마도 예수님을 추종하던 많은 자들 중 유대 율법에 익숙지 못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 일을 트집잡아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의 잘못된 생각에 일침을 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전통이 하나님의 계명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며 결단코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높아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 그 예로 '고르반'('성전에 드림' 또는 '제물'이라는 뜻)을 지적하셨다. 십계명(성문율법)중 제 5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자식들은 노부모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하지만 패역한 자녀들이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금전적으로 부담이 되자 자신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서원을 한다. 논리상으론 하나님께 모두 드려서 더 이상 자신의 소유가 없어 부모를 모실 수가 없다. 하지만 드린 자는 일생 동안 생활을 위해서 '고르반'돈을 계속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구전율법이었다. 결국 성문율법과 구전율법이 정면으로 대치되는 상황을 발생되었다. 하지만 랍비들은 이런 문제가 있을 때마다 구전율법(장로들의 전통 / 사람의 계명)에 더 많은 무게를 두어 적용했다. 예수님은 이런 잘못된 점을 보고 그냥 지나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께선 그들의 잘못된 신앙을 지적하셨고 이사야 29:13절의 말씀을 빗대어 그들을 책망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마 15:8, 9; 참고. 사 29:13)

그들은 종교적이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아니었다. 유대교는 믿었지만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하셨다. 씻지 않은 손으로 만진 더러운 음식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같은 것들이 사람을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예수님에 따르면 악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비방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매우 부정한 자들이었다.

이처럼 예수님이 공격적으로 나오시자 제자들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12절). 여기서 근심 어린 마음으로 예수님께 말하는 제자들은 아까 구전율법을 어긴 자들이 아닌 베드로처럼 구전율법을 잘 이해하고 평생 지켜온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발언이 문제를 야기시킬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제자들은 구전율법의 굴레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 말씀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한 사람을 만나러 가시는데 그가 바로 오늘 등장하는 수로보니게 여인이다.

예수님께서는 게네사렛을 출발해 두로(Tyre)와 시돈(Sidon)지방으로 들어가셨다. 이곳은 오늘날 레바논에 속하는 해변도시인데 고대로부터 해상력을 바탕으로 매우 부유함을 자랑하는 나라였다. 예부터 두로와 시돈은 이스라엘보다 훨씬 더 잘사는 국가였다. 그래서 다윗은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인접한 경제대국인 두로왕 히람과 친분을 쌓아 나갔다. 그 친분을 바탕으로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그곳으로부터 기술적,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고대시대에는 자주색 염료가 매우 비쌌는데 그 중에서도 두로 인근의 뿔소라 고둥에서 채취해서 만든 자주색 염료는 최상품에 속하는 것이었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했던 민족이 페니키아(Phoenicia)이고 성경은 베니게라고 칭한다. 불사조를 가리키는 단어인 피닉스(phoenix)는 바로 이 페니키아에서 유래된 말인데 불사조가 그들의 대명사가 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나라가 바로 페니키아였다. 헬라시대를 거쳐 로마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그 지역은 시리아(Syria) 주(州)에 편입되어 시리아-페니키아(Syro-phoenciar)라고 불렸다. 한글성경에는 이를 수로보니게라고 음역하고 있다. 예수님 시대에도 수로보니게 지역은 유대지역보다 훨씬 더 부유한 지역이었다.

지중해변에 위치한 페니키아 유적   ©원솜니 목사
레바논의 백향목 산림   ©원솜니 목사

예수께서 수로보니게 지역에 들어가셨을 때 소문을 듣고 한 여인이 찾아왔다. 여인은 그 지역의 토박이였다. 오늘 저자 마태는 마가복음과는 다르게 그녀를 가나안 여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출애굽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지역에 사는 자들을 가나안 사람이라고 불렸고 그들은 훗날 헬라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페니키아 사람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의 주요 독자는 유대인들이었기 때문에 마가와는 다르게 이 여인을 가나안 여인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 여인이 다급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왔던 이유는 다름아닌 귀신들린 딸 때문이었다. 자식이 병에 걸리거나 이상이 있을 때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이 여인은 딸의 귀신들림 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귀신을 내어쫓는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의 출현 자체가 매우 문제가 되었다. 그녀가 다름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가나안 사람에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을 잘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그들은 가증한 민족이었다. 과거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민족이었으며 페니키아는 이세벨과 같은 악한 자를 탄생시켰던 나라였다. 자기들보다는 부유하게 살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부정한 자들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들의 부정함을 설명하기 위해 레위기 11~15장의 긴 항목들을 열거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타고날 때부터 부정한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부정함에 대한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율법에 의해 부정한 자로 낙인 찍힌 여자가 찾아왔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가?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이 매우 특별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지칭하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그 여인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었는지 어땠는지를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을 부르는 그녀의 호칭은 정확했다. 그분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다윗의 자손 메시아였다. 그렇게 정확하게 주님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예수님은 침묵하신다. 여느 때처럼 누군가 애타게 그분을 찾을 때 "그를 데려오라"(막 10:49)라고 하시지도 않고 그냥 침묵하신다. 예수님의 침묵은 과연 무엇을 보여주시는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예수님의 침묵은 여인의 요구에 대한 거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과 모두가 부정하다고 여기는 이방인과의 진정한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 첫 번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침묵을 통해 주님과의 만남은 단순하게 유대식 호칭으로 그분을 부른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믿음은 단순히 입술의 고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관찰하신다. 우리는 단지 주일날 주님께 나와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찬양함으로 우리의 본분을 다했다고 여길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나온 자들의 잘 차려 입은 외모와 화려한 미사여구로 포장된 기도소리가 아닌 그 마음을 관찰하신다.

정말 날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왔는지 아니면 마지못해 나왔는지를 보신다. 일주일 동안 나를 보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나왔는지 아니면 의무감으로 나왔는지를 보신다. 아무리 주 앞에 나와 정확한 신앙고백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예배를 결코 받지 않으신다. 그것은 "입술로는 공경하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기" 때문이다"(마 15:8). 아무 의미없는 종교적인 외침은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런 무의미하고 단순한 종교적 외침은 나의 곤경 속으로 예수님을 이끌어 들일 수가 없다. 가나안 여인의 외침은 진실한 외침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종교적인 외침이었을까?

예수님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외침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제자들은 그녀의 출입을 통제했지만 막무가내로 파고드는 이 여인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제자들도 짜증이 나기 시작했고 오히려 예수님께 부탁했다. '예수님 이 여자가 너무 소리를 지르고 귀찮게 하니 어서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23절에서 "그를 보내소서"라는 말은 단순히 내쫓으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청탁하는 것이다. 상황이 역전되어 부정한 그녀의 접근을 막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청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여인이 아닌 제자들에게 대답 하신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말인가?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원리를 확인하는 말인가? 예수님은 이후에 그 여인의 청을 들어주시는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끈질김 때문에 자신의 원리를 깨뜨리시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목표가 분명하고 원칙이 분명하며 사람의 뜻에 따라 좌지우지 하시는 분이 결코 아니시다. 이는 하나님의 특성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일부 어떤 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원칙은 유대인 중심이었으나 여인의 끈질긴 믿음으로 그 혜택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뜻은 처음부터 확고했다. 만인을 대상으로 한 사역이었다. 예수님이 유대인을 중심으로 사역한 것은 사실이나 예수님은 결단코 이방인들을 위해 사역하는 것을 꺼리시던 분이 아니다. 오히려 데가볼리와 같은 이방인 지역으로 먼저 건너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24절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제자들의 생각을 대변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자신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한 여인을 대변해서 그녀의 청을 들어주라고 부탁하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이스라엘 유대민족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오히려 반문하신 것이다.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 즉 예수님도 유대교라는 종교적 틀(구전율법) 안에 갇힌 분으로 그들은 오해했다. 유대교라는 종교적 틀 안에서는 그런 부정한 이방 여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도 안되며 만나서도 안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방 여인이 너무 성가셔서 단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줘서 그녀를 빨리 보내달라고 청원하는 상반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전통이라는 종교적 틀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였다. 급기야 예수님에게까지 그 기준을 제시하였고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그 문제를 가지고 종교인들과 갈등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사람의 계명 즉 구전율법을 교훈으로 삼아 사람들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행위였다.

오늘날 기독교는 철저히 종교화가 돼버리고 말았다. 매주 교회를 빠짐없이 출석하고 모든 공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꼬박꼬박 내면 기독교인인가? 예수님께서 그런 자들만 만나주시는가? 진정한 기독교인임을 나타내주는 지표는 그런 종교적 행위가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인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교제하고 그분과 온종일 동행하며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실행하는 자들이다. 진실함이 없는 단순한 종교적 행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기독교는 오랜 시간들을 거치면서 여러 좋은 신앙의 전통들과 예배모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정성이 없이 단순히 종교 행위만 강조된다면 그런 전통들은 단순한 요식행위로 전락하고 만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 전통을 꼽으라면 다름아닌 새벽기도일 것이다. 새벽기도는 한국에 기도운동을 일으켰다. 모든 사람들이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 나아와서 기도로 시작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운동이었다. 그래서 너도나도 이 새벽기도에 동참했고 이는 한국교회의 부흥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묻고 싶다. 꼭 새벽에 기도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살았는가? 기도했기 때문에 살았는가? 본질에서 벗어나 현상에만 집중하게 되면 우리는 자칫 진리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런 전통은 우리의 신앙에 유익을 주는 것이지 구원받는 것이나 진실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잣대가 되지 못한다.

예수께선 입으로 들어가는 것 즉 종교적 절차에 의해 지켜진 음식에 의해서 사람이 정결하게 되고 부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악한 것들이 사람의 정결함과 부정함을 결정한다고 말씀하신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에서 영향력이 없어진 것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종교적인 면에 치중된 까닭이다. 교회에 나가고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는 사람들이 사회에서는 세상사람들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되자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하지만 더 심각한 것은 예수님도 그런 우리를 외면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단지 교회 안에서만 갇히신 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그분의 도움을 부르짖는 곳은 어디든 존재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행보도 단순히 종교적인 틀에 갇힌 것이 아닌 세상의 전 영역으로 확장해야만 한다.

급기야 이방여인이 제자들을 뚫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을 성공했다. 그녀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을 제발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26절의 말씀은 평상시 우리 알고 있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과는 왠지 거리가 멀다. 어떻게 그렇게 모욕적인 말씀을 하실까? 그렇게 수치를 주시면서까지 확인하셔야 했는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절)

'개'라는 표현이 우리 정서에 매우 격한 표현이라서 그런지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표현에 당황스럽다. 그러나 많은 자들이 그런 수치를 감내하고서라도 지혜롭게 대처한 그녀의 인내와 겸손을 예수님께서 귀하게 보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거짓되고 위선된 자들이라면 모를까 슬픔과 아픔에 빠진 여성에게까지 예수님께서는 혹독하지 않으셨다.

전통적인 유대식 교육은 질문법이다. 우리나라 부모는 학교에 다녀온 아이들에게 오늘 선생님께 뭘 배웠니?하고 묻지만 유대부모들은 오늘 선생님께 뭘 질문했니?라고 묻는다. 모든 유대인들은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뛰어난 유대인들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힘이라고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가 그랬듯이 유대 랍비들도 질문을 던져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고 답변을 유도했다.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이방인들을 개처럼 취급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이셨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이방인들을 개처럼 여기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본문에서 유대인들의 전반적인 생각을 그녀에게 들려주면서 그녀의 생각을 물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녀를 막고 있던 제자들의 생각을 들려주었던 것이다.

"여인아 유대인들은(혹은 어떤 격언에)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옳지 않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다. 이 여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즉 예수님께 어떤 믿음을 가지고 나왔는지를 정확하게 답한다.

"예 주님 그 말이 맞기는 합니다만 개들도 그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비록 부스러기같이 작은 은혜일지라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면 제 딸을 치료하기에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주식인 빵 쿠부즈(Khubz, خبز)   ©원솜니 목사

예나 지금이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주식은 넓고 납작한 빵이었다. 빵과 각종 야채를 곁들여서 식사를 하는데 먹고 남은 빵 쪼가리는 냅킨대용으로 손을 닦거나 식탁을 닦은 후 버렸다. 여인은 이점을 착안하여 예수님께 대답한 것이다. 씻지 않은 손으로 빵을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15:2). 개에게는 빵 표면에 더러운 흙이나 먼지가 묻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러운 빵이라도 배부름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여인에게는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딸을 살리는데 필요한 것은 빵이 주인의 상에서 오느냐 마느냐만 중요했다. 식탁 밑에서 개에게 빵 부스러기가 반드시 떨어지듯이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흔들리지 않는 여인의 믿음을 아셨고 그것을 제자들에게 보이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은 그녀의 끈질김이 아닌 확실한 믿음이었다. 예수님은 단지 말로만 주님을 따르지 말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주님을 따르려 하지도 말고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 살아갈 것을 이방여인을 통해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우리가 주를 부르고 주님께 드리는 오늘의 경배는 정말로 귀한 것이다. 또한 우리가 시간을 드려 기도하고 전도하며 시간을 투자하여 모임을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단지 내가 남들에게 기독교인임을 보이기 위해서나 습관적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기 위한 것이라면 그런 일들은 한 순간에 쓸모 없는 헛된 일들로 변질돼버리고 만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계속되는 여러 인생의 난관과 주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일들로 산적해있다. 그럴 때마다 단지 습관적인 틀에 박힌 목소리로 주님을 찾지 말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고 내 어려운 곤경을 능히 해결해주실 수 있음을 확실하게 믿자. 주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역사하신다.

■ 원솜니 목사는...

칼빈대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국제기독교성지연구소에서 10년 동안 전문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교회들과 신학교의 성지탐방을 인도하고 성경의 문화와 배경에 대한 강의를 진행해왔다. 현재 평신도 전문신학기관인 갈렙바이블아카데미의 운영위원과 올리브공동체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성경의 배경과 문화를 소개하는 올리브바이블스터디(www.olive.or.kr)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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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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