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환 목사가 강연하고 있다.   ©오상아 기자

지난해부터 다시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박창환 교수가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195회 월례 세미나에서 '한국 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강연했다. 역사의 한 복판에 있던 그였기에 '강연'이라는 말보다는 '증언'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다.

90이 넘은 그의 나이는 한국 기독교 역사 130년의 '산 증인'임을 충분히 증명했다. 그러나 나이가 믿기지 않을만큼 젊은 그의 목소리는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을 또렷하게 증거했다.

5일 진행된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세미나에서 사회를 맡은 유정우 박사(전 평택대 부총장)는 "지금 한국의 현역으로 목회하시는 목사님들과 은퇴하신 목사님들 중에 이분에게 신약신학과 헬라어 공부를 배우지 않은 분은 통합측에서 거의 없을 것이다"고 소개했다.

그는'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을 주제로 강의하며 "저는 장로교회의 역사를 제가 아는만큼 소개할 것이다"며 "여러 신학교를 거쳐왔고 장로교가 분열되고 하는 동안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있어 모든 실상을 체험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비화들도 여러가지 있다고 본다"고 했다. 그는 이날의 주제는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장로교회의 분열 역사'라고 했다.

박 목사는 1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한국장로교는 1884년에 알렌 선교사가 들어오고 아펜젤러 목사님과 언더우드 목사님이 함께 1885년에 부활절에 인천항을 통해서 온 것으로 시작됐다"며 "처음에 온분들은 북장로교 선교사다"고 했다.

이어 "그 얼마 후에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들어오고 캐나다 선교회, 호주 선교회가 들어와 네 선교회가 합해서 선교를 하면서 영역을 나눈다"며 "캐나다 선교사는 함경도를 맡고 호주 선교사 경상남도, 진해, 마산, 부산, 남장로교회는 호남, 충남, 북장로교회는 평안남도, 평안북도, 황해도, 경기도, 경상도로 굉장히 큰 영역을 차지한다"며 "미국 장로교 중 북장로교가 가장 힘이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돈도 더 많이 갖고 와서 권리가 더 많은 것이다"고 했다.

그는 "그런 중에 언더우드 목사님은 서울에다가 신학교를 하려고 했는데 평양에 세워졌다(1901). 언더우드 목사님과 그 다음 온 마펫과 마음이 안맞았는데 사무엘 마펫은 경제적으로 백그라운드가 후원자들이 많고 상당히 좀더 부유한 지방에서 왔던가보다. 그분이 참 싸우다시피 하면서 신학교를 평양에 세워놨다"고 했다.

그는 "그래서 한국장로교회는 자동적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밀집하는 상황이 돼버린다. 그밖에 다른 지역은 교회가 많지 않은데, 그 지역만 많아 언발란스하게 됐다"고 했다.

그는 "남장로교는 호남 지방을 차지하는데 거기는 가난한 선교회이기 때문에 세력이 크지를 못했다"며 "어쨌든 평양에 신학교를 세웠기 때문에 자연히 평안도 사람들, 황해도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했고 그 지역에서 인물이 나오고 거기 지방 전도사, 목사들이 교회를 자꾸 세웠다"고 했다.

박 목사는 "그쪽 (사람들의)기질도 있지만 신학교가 있으니 자꾸만 가까운데 교회가 생기는 것"이라며 "교세가 경상도나 호남이나 경기도에 크게 발전하지를 못하고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언발란스하게 자랐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 선교회의 색깔이 조금씩 달랐다"며 "미국의 두 교파인 북장로교와 남장로교는 대개 보수적인 선교사들이 왔다. 그래도 그중에는 조금 학문적인 선교사들이 섞여 있었다"고 했다. 그는 "미국의 본부에도 북장로교는 경건파도 많이 있지만 학문을 해야된다는 파들이 상당이 있었다. 그러나 남장로교는 아주 보수적이라 학문을 거의 하지 않는 그런 교파다. 그분들이 선교사를 보냈다. 호남지방에 온 선교사들이 상당히 보수적인 교회를 세운다. 남북장로교가 제일 많은 영역을 점령하고 교세가 컸다"고 했다.

그러면서 "함경도에 온 캐나다 선교부는 경건한 분이시지만 학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며 "그리고 호주에서 온 선교사들도 학문적인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호주의 엥겔 목사(왕길지)는 언어도 많이 하고 히브리어, 헬라어를 많이 가르쳤다"고 했다.

이어 "엥겔 목사는 사상적으로 리버럴하다고 할까? 학문적이기 때문에 아주 보수적인 신학교가 그들에게 조직신학 같은 중요한 과목을 맡기지 않았다"며 "어학만 가르치게 했다"고 했다.

그는 "함경도 선교사(캐나다)들도 와서 가르치긴 하지만 사상적으로 보수적인 신학교라 그들에게 중요한 과목은 안맡겼다"며 "함경도 지방에서 온 선교사들은 평안도에 와 있는 선교사(미국 북장로교) 맘에 안 맞았다. 그리고 평양에서 원산 가는 기차가 없어서 함경도에서 평양을 오려면 서울을 왔다가 올라와야 돼서 굉장히 멀었다"고 했다.

그래서 "함경도에서 오신 선교사들은 그 지방에 있는 지도자를 양성하려고 직접 평양에 오지 않고 일본 청산학원, 일본신학대학, 고베신학대 등 이런데로 보냈다"고 했다. 박창환 목사는 "김재준 목사, 송창근 목사 등은 평양신학교를 거치지 않고 일본으로 가서 학문적인 교육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어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그때 선교사들은 이제는 한국사람 지도자를 길러야겠다 생각을 해서 지도자될만한 사람을 골라서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고 말하며 "놀랍게도 프린스턴 신학교로 몽땅 보냈다. 왜냐하면 프린스턴 신학교가 당시 제일 큰 학교기도 하지만 제일 보수적이었다"고 했다.

그는 "평양에 있는 보수적인 선교사들이 아주 보수적인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프린스턴으로 보냈다"며 "송창근, 김재준, 박형룡, 한경직, 백낙준, 윤하영 박사 등이 한꺼번에 다 몰렸다"고 했다.

프린스턴신학교 진보-보수학자 간 싸움...한국 첫 신학생들 프린스턴으로 유학

그러면서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까지 프린스턴신학교가 어떤 상태인지 알아야 한다"며 50년 전인 1881년 뉴욕 유니온신학교에서 있었던 '찰스 브릭스(Charles Briggs) 사건'을 소개했다. 그는 "찰스 브릭스는 히브리어 사전을 만든 사람이고 유명한 구약학자이다"며 "유니온신학교는 본래 장로교신학교로, 브릭스를 정교수로 추대해서 취임강연을 하는데 그때 브릭스가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문서설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박 목사는 "벨하우젠의 학설은 독일에서 유행하던 것으로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 JDPE 문서를 합해서 썼다는 내용이었다"며 "학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은 찬성했지만 프린스턴신학교는 아주 보수적이라 신약학 교수 두 사람이 반발을 해서 반대논문을 썼다"고 했다.

이어 "반대논문을 써서 프린스턴신학교 잡지에 내고 미국북장로교 총회는 보수적인 사람이 많은 곳이니 찰스 브릭스를 잘라버린다"며 "장로교 교수 자격이 없다는 것과 목사직을 박탈하는 이런 무서운 일이 생겼다"고 했다.

또 "유니온신학교는 '우리가 잘못한 게 뭐냐? 학문적인 얘기 한 것 뿐인데' 하는 입장이라 총회에 승복할 수 없다 해서 그냥 브릭스를 구약 교수로 취임시키고 장로교에서 탈퇴해버린다"며 "1881년에 유니온신학교는 중립적인 학교가 된다"고 했다.

박창환 목사는 "그리고 50년 만에 프린스턴이 그 학설을 받았다"고 했다. 이어 "학설을 받았지만 보수적인 신학자와 학문적인 신학자가 함께 있어서 그러다 싸움이 생겼다"며 "그때 한국지도자들이 간 것이다"고 했다.

그는 "그러니 전부다 어느 교수를 따라갈까 하다가 자기 취향대로 따라갔다. 김재준 목사외 송창근 목사는 학문적인 신학교인 웨스턴신학교로, 박형용 목사는 더 보수적인 남침례교신학교로 가서 공부한다"며 "한국 학생들이 서로 알력을 가지는 것이다"고 했다.

박창환 목사는 "신학이 통일이 되지 않고 지리멸렬된 상태에서 2~3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그들 생각으로는 신학교 교수가 되고 싶으니 평양으로 다 모였다"며 "그러나 평양신학교는 지금까지 말한대로 아주 보수적인 신학교이니 보수주의 아니면 안 받아줬다. 그때 픽업된게 박형룡 박사다"고 했다.

이어 "한경직 목사는 신의주로 가서 목회하고 송창근 목사는 산정현교회 목회하고 김재준 목사는 교회에서 세운 숭인상업학교라는 학교의 성경교사가 된다. 같이 공부해놓고 하나는 신학교 교수가 되고 하나는 중학교 교사가 된다"며 "웃지 못할 사건들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교회 안에 이렇게 싸움이 생긴다. 분열이다"고 했다.

이어 "평양신학교가 박형룡 박사 하나를 붙들고 남궁혁이라고 하는 남장로교 구역에서 버지니아 유니온신학교 간 분이 평양신학교 교수가 된다"며 "평양신학교는 경건만 주장하는 학교로 계속 발전한다.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고 전도 많이 하면 된다. 학문은 필요없다는 주장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 선교사들이 좀 나쁜 생각을 했다. 한국지도자들은 자기들보다 못해야 한다는 것이다"며 "자기들보다 높아지면 상당히 어려워진다 해서 한국 목사들을 자기들보다 낮은 교육을 시키려는 방침까지 세웠다"고 했다.

그는 "높은 교육을 원치 않아 그래서 경건하면 된다고 가르친 것이다"며 이어 "1938년에 신사참배 때문에 자연히 학교 문을 닫을 수 밖에 없고 미국선교사들은 다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했다.

학문 해야한다는 학자 중심으로 조선신학원 설립...출옥성도 주축돼 고려신학원 설립

박 목사는 이어 "장로교 선교사들은 갔고 학교를 그냥 내버려둘 것인가 해서 신사참배를 하면서라도 신학교를 해야겠다 작정을 해서 신의주에서 총회가 모일때 신학교재건위원들이 생긴다. 신학교를 재건하겠다 해서 허락을 받는데 15명 재건위원 가운데 채필근 목사가 선두에 섰다"며 "윤인구, 송창근, 김재준 등은 다 학문을 해야한다는 사람들이다. 물론 보수주의자도 있었지만..."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분들 생각은 '왜 하필 평양에 하겠느냐? 서울에다 하자'하는 것이었다"며 "서울에 세우려고 하는 계획을 가지고 의논을 했는데 한국교회의 헤게모니가 평안도에 있었다. 평안도를 대표하는 이인식 목사, 황해도를 대표하는 이승길 목사가 파워가 있는 것이다"며 "그래서 평양에 신학교가 다시 세워지게 됐다"고 했다.

그는 "경건만 하면 된다는 사람과 학문도 필요하다는 사람 간에 두 파가 있었는데 학문도 필요하다는 사람들이 '우리가 평양에 갈 필요가 뭐 있냐? 서울서 하자' 해서 서울에다가 다시 새롭게 신학교를 세운게 조선신학원이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인가가 없어서 신학원이다"며 "승동교회에서 신학교를 시작해서 결국 신학교가 평양에 하나있고 서울에 하나 있고 해서 장로회신학교가 두개가 생긴다"고 했다.

그는 "그러다 해방이 됐고 주기철 목사 등 그밖에 여러 출옥성도들이 나왔다. 조수옥 주남선 한상동 이인재 고흥봉 손명복 등이 나와서 '모든 교회가 절개를 잃어버렸다. 교회를 맡을만한 자격이 없다. 다들 교회에서 내려오라. 강단에서 내려오라'고 했다. 회개하라는 것이죠. 전국적으로 공포를 했다. 다 죄를 졌으니까 근신하라고... 그런데 목사님들이 그 말을 듣나. 그러다 3.8선이 막혔다"고 했다.

박창환 목사는 "한상동 목사는 평양에서 목회하다 이남으로 오고 주남선 목사도 이남으로 와서 진해에서 이약신 목사를 만나서 진해교회에서 신학교를 하자고 해서 출옥성도가 주축이 되는 고려신학교가 세워진다"며 "거기서 재건파라는 것도 생기고 복구파라는 것도 생기고 굉장히 열렬한 출옥성도 운동들이 전개됐다"고 했다.

다시 그는 위쪽에 있는 신학교들로 올라와 "조선신학원이 이남에 있으니 총회에 인가 신청을 해서 조선신학원이 승격한다. 조선신학교로 명칭도 바뀌고 장로교직영신학교가 됐다"며 "그래서 장로교신학교가 평양에 하나 있고 서울에 하나 있고 진해에 하나 있고, 세개가 있다"고 했다. 그즈음 "고려신학교는 부산으로 이사를 온다"고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조선신학교가 동자동 서울역 앞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시작했는데 보통 사람은 성격을 모른다. 해방 후에 신학교가 하나 생겼다고 하니 반가워서 한 200명이 모였다"고 했다. 이어 "조금 얘기했지만 한경직 목사, 김재준 목사, 송창근 목사, 최윤관 목사 이 네분이 프린스턴 동창생으로 프린스턴 4인방이다. 한국 나가자면 같이 일하자고 하는 약속을 했는데 해방 되니까 3.8선이 막혀서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가 내려왔고, 다 조선신학교 정교수가 됐다. 최윤관 목사는 영문과를 지도했다"고 했다.

그는 "문제는 그분들이 학구파로 학문을 해야된다는 분들이었다는 것이다"며 "학문이 필요 없다는 사람들은 학문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자유주의자', '신신학'이라고 하면서 나쁘게 말했다. 박형룡 목사 편에서 그런 욕을 하는 것이다"고 했다.

박 목사는 "그러나 (이쪽도 저쪽도)다 경건한 사람들이다. 김재준 목사 얼마나 경건한지 모른다. 다 경건하다"고 했다. 그는 "박형룡 목사는 저희들 가르칠 때 하는 말이 '경건하면 된다. 학문이 필요 없다. 하등 비평까지는 해도 고등 비평은 하지 말라'고 했다. 이 말은 뭔가 하면 역사비평을 하지 말라는 거다. 학문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상황 속에서 조선신학교가 설립돼서 가는데 학문을 하는 교수들이 몇 사람 있었지만 학생들은 몰랐다. 한국교회가 어떤건지 모르고 경건하면 된다하는 학생들이 한 200명 모인 것이다. 해방 되면서 만주, 일본, 중국에서 공부한 각색 학생들이 다 모였다"고 했다.

학문파 비판 학생들, 총회에 진정서 제출 시도

이어 "대부분은 해방된 마당에 자유를 가졌기 때문에 목사가 되겠다 하는 이들이었다"며 "그 중에 나이가 좀 들고 생각이 있고 책을 읽은 사람 중에 비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사람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정규오다"고 했다.

박 목사는 "이 사람은 전남 분인데 구례읍 구례장로교회 목사의 사위인데 그 교회 장로다. 국민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했는데 머리가 너무 좋고 샤프한 사람이다. 일제시대 금융조합, 지금의 농협 이사까지 한 분이다"며 "이분이 책을 많이 읽었는데 박형룡 박사의 대표적인 책인 '신학난제선평'을 읽었다. 이 책은 소위 학문파를 비판 한 것으로 바르트가 나쁘다, 몰트만이 나쁘다 식으로 전부 부정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어 "정규오 장로가 그걸 읽은 사람이라 세뇌가 돼서 박형룡 박사가 말한 반대는 다 나쁜 것이다 생각했다"며 "근데 김재준 목사의 구약시간에 들어갔는데 JDPE 문서 얘기하고 모세오경을 모세가 안 썼다고 하니 여기서부터 속에 불이 타는 것이다. '안 되겠다. 이러다간 우리 교회 망하겠다' 해서 강의를 듣고 나온 학생들 중에 나이 많은 학생들에게 '너 어떻게 들었냐?' 물어보고는 얘기하는 사람 가운데 동의하는 사람들끼리 '이러다간 한국교회가 망하겠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학생의 신분으로 뭘 하겠나 고민하다가 기도해야겠다 해서 기도모임이 생긴다. 기도를 하면서 행동을 하자는 것이었다"며 1946년 가을의 얘기라고 했다.

그는 "저는 평양신학교를 다니다 46년에 거기에 들어갔고 47년 봄에 '이일선 사건'이 일어난다"며 이 사건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이 학생은 졸업반인데 천호동에 선린촌이라고 하는 이상촌 운동을 했다. 주동자는 최문환 목사인데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승동교회에서 조선신학원을 졸업한 사람으로 김재준 목사 제자다"고 했다.

이어 "선린촌을 하면서 해방된 조국을 이상촌으로 만들자 해서 졸업반 이일선이 같이 일하면서 책을 썼다"며 "이 사람이 야심이 굉장히 큰 사람인데 집을 팔아서 책을 냈다. 큰 책은 아니라 페이퍼백으로 150페이지 되는 책인데 200명에게 거져 나눠졌다. 그때는 책이 없을 때인데, 그걸 읽던 사람 중 하나가 이노수라는 장로가 있었는데 읽다가 중도에 걸렸다"고 했다.

박 목사는 "안식일론에서 걸렸다. 해방된 조국의 안식일은 이래야 된다는 취지로 안실일론을 적었는데 농본기 때는 한참 나락이 자라고 잡초도 무러무럭 자라니까 안식일이라고 잡초를 그냥 놔두면 안되니 새벽기도회만 하고 나가서 일하자는 거다. 해방된 조국의 이상촌을 만들기 위해서는 안식일에도 일해야 된다는 것이다"며 "이노수 장로가 보수적인 장로이니 가만 있을 수 없어 학생회장인 이해영 장로를 찾아가 항의를 한다. 그런데 그 책의 추천사가 있는데 김재준 목사가 추천한 것이다. 책 내용이 너무 좋으니 읽어라 이런 내용이라 이 장로는 '이게 무슨 소리냐? 신학교 교수가 옳다고 해도 되느냐? 우리 교수가 이럼 되느냐?' 항의를 한 것이다"고 했다.

그는 "이해영 장로는 예스맨(Yes man)이라 교수하는 것은 다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 '니가 몰라서 그런거다' 하니 이노수 장로가 더 뿔이 난 것이다"고 덧붙였다.

그런 후에 "채플 시간에 200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가 끝나니 이노수 장로가 구석에서 불쑥 일어나서 일장연설을 한다. 외정때 탄압에 못이겨서 성수주일 못한 것도 억울한데 (안식일에 일해야 한다는 내용을)교수님이 옳다고 하면 됩니까? 하면서 교수를 책망했다"고 했다.

그는 "그때 영문과 학생 하나가 일어나서 '안식일이라고 밥도 안먹고 화장실도 안 가냐?'하면서 삿대질을 하면서 싸움이 생겼다. 격투는 할 수 없고 속으로 격투가 생긴 것이다"며 "그 채플을 드리고 나온 다음부터 기도그룹들이 '안되겠다. 행동을 해야겠다' 해서 4월 대구 총회에다 진정을 하자 해서 진정서를 쓰는 사건들이 있었다"고 했다.

이어 "진정서를 가지고 대표 6사람이 대구에 갔고 신학교 교수들은 긴급교수회를 모여서 그 6명에게 퇴학을 줬다. 그리고 나머지 51명은 무기정학을 받았다"며 "저도 무기정학을 받은 사람이다"고 했다.

박 목사는 "그 다음에 조사위원이 나와서 (학생들을)조급하게 처단해서 안 된다 해서 해벌이 됐다"며 "그러나 해벌된 학생들은 결국은 그 교수님한테 또 배워야 된다. 반대 했는데 또 거기 앉아있으면 안되니 보따리를 사서 노량진에 있는 양옥집 빈집이 있어서 빌려서 얼마동안 살았다"고 했다.

그는 "박형룡 박사는 신사참배 문제 때문에 38년에 동경으로 피난을 갔다. 평양신학교가 문 닫을때 호랑이굴로 들어간 것이다. 신사참배를 안 하려고 동경으로 가서 살다가 만주에 동북신학교가 조직되며 만주에 가서 신학을 가르쳤다. 그러다 해방 됐는데 나오지 못하고 갇혀 있었다. 그때 부산 고려신학교가 박형룡 박사를 모셔온 것이다"며 "모셔와서 자기네 학교 위신을 높이려고 한 것이다"고 했다.

조선신학교 대항해 장로회신학교 설립

또 "교계 지도자들이 조선신학교를 대항할 수 있는 보수신학교를 만들어야 된다 해서 1948년 6월 9일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개교했다"며 "박형룡 박사를 고려신학교에서 끌어왔다"고 했다.

박창환 목사는 "그러니까 신학교가 네 개가 생겼다. 평양에 그대로 있고 부산에 고려신학교, (서울에)조선신학교, 장로회신학교 이렇게 장로교 안에 신학교 네개가 생겼다"며 "이런 혼란이 생긴 것이다"고 했다.

그는 "네 개가 생겼는데 남산에 1948년 6월에 생긴 장로회신학교가 총회 인정을 못 받았으니 파워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들이 두번째 단계로 장로회신학교를 직영신학교로 만들자 이렇게 정해놓고 음모를 꾸민다"고 했다.

박 목사는 "그때 함경도 분들인 김재준 목사, 송창근 목사 등이 호남 사람들과 손을 잡아서 굉장한 세력이 있었다. 거기에 총회에서 득세하려면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은 세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평안도, 황해도만 가지고는 안되고 경상도 힘이 강하긴 했지만 확실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3.8선 이북에 있는 피난노회를 인정하는 방법을 썼다. 무지역노회를 끌어다가 그 사람들에게 권리를 줬다. 한 30노회가 되고 그분들이 수십명이니 그것까지 가산하면 우리가 이긴다 해서 먼저 그것부터 통과시켰다. 이북노회를 통과시키고 그 다음에 투표를 한 것이다"며 "그 다음에 장로회신학교도 인가해달라 이렇게 통과된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총회 안에 정식 교단이 인정하는 신학교가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두 개가 됐다고 했다. 이어 박 목사는 "그러나 세번째 단계는 '조선신학교를 없애야 된다', '잡아 먹어야 된다'는 것이었다"며 "그걸 위해서 술책을 쓴 것이 합동하자는 것이다. 두 학교를 합동해서 이사들을 우리쪽으로 많이 세우면 이사들이 교수를 임명할 때 보수주의 교수들만 인정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어 "그렇게 조선신학교 교수들을 다 몰아내겠다는 것인데 그게 뻔하다. 1950년 전쟁나는 해 4월 총회에서 한경직 목사가 합동안을 냈다"며 "조선신학교 측에서는 자기들 잡아먹으려는 것을 아니까 그냥 둘 수가 없으니 총회에서 의자가 날고 화분이 날고 난동이 일어났던 거다. 그래서 정회가 되고 말았다"며 그 이후 6.25전쟁이 났다고 했다.

박 목사는 "전쟁이 나서 인민군이 내려와서 대구와 부산만 남았을 때 다시 한번 총회를 부산 대청동에 있는 중앙교회에서 모여 합동안을 통과시킨다"며 "이사들을 많이 뽑았고 이름을 조선신학교도 장로회신학교도 아닌 장로회총회신학교로 하자 했다. 교장은 누가 해야되나 해서 임시로 선교사를 시키자 해서 캠밸(감부열) 목사를 학장으로 세웠다. 이사들을 한쪽으로 치우치게 보수적인 이사들만 많이 세워서 우리는 승복 못 한다 해서 기장이 생기고, 마지막에 한국신학대학이 됐다"고 했다.

이어 "대구에서 신학교를 그렇게 시작했는데 1년간 캠벨 목사가 교장을 하고 안식년으로 들어가서 퀸슬러 목사가 1년간 대리교장을 한다. 3년째 박형룡 목사가 교장이 된다"며 "53년도에 교장이 되며 정전 협정이 되고 서울이 복구가 되면서 서울로 신학교도 올라오자 그래서 서울로 와서 남산에서 다시 하는데 전부 폭격을 당해서 옛날에 있던 교사가 아니었다. 집이 없으니까 신궁에서 왼쪽에 있는 서울대학 음악대학 파괴된 건물 3개를 미국 선교부에서 돈을 줘서 보수를 해서 신학교를 계속 했다"고 했다.

그는 "거기서부터 합동과 통합의 분열이 생긴다"며 "박형룡 박사가 교장이 되서 남산에서 가르치다가 어떤 생각을 하냐면 일본 귀신들 섬기는 신궁에서 신학교를 하면 되겠느냐 해서 이사들과도 맘이 맞아서 밖으로 나가자 했다. 교지를 물색해야 되는데 불광동, 수유리도 가보고 답사를 했다"며 "수유리 한신대 자리도 그때 본 자리다"고도 말했다.

이어 "수유리 땅을 보고서는 박형룡 목사 하는 소리가 3.8선이 가까워서 안된다 해서 다 수포로 돌아간다. 그 다음에 어떤 안에 나왔냐면 숭실대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교가 합해서 유니버시티(University) 를 만들자는 안이 나왔다"고 했다.

박창환 목사는 "그러나 박형룡 박사가 반대한다. 그때 숭실대학교 총장이 한경직 목사였는데 한경직 목사와 박형룡 박사의 맘에 안 맞았다. 박형룡 박사가 한경직 목사 밑에 들어가기 싫은거다. 그래서 그 안이 수포로 돌아갔다"며 "박 박사의 마음이 또 변해서 '여기 신궁 자리가 명당이다. 명당이니 신궁 지은 것 아니냐. 이것 차지하자' 해서 정부에서 사자 했다. 이사들이 찬성을 했는데 분할을 받으려면 돈이 필요하니 미국 선교부에서 그 땅을 살만한 3000만원이 왔다"고 했다.

3000만원 사건, 미국 선교부 책임 추궁에...

이어 "분할을 받으면 정부와 교섭해야 하는데 학장이 직접 할 수 없어서 브로커 박호근을 내세웠다. 그때 정부는 그 땅이 명당이기 때문에 국회의사당을 지으려고 결정한 후인데 그걸 몰랐다. 할 수 없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며 "그런데 박호근 씨는 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할 수 없는 걸 시작을 하니까 돈을 부정지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3000만원이 다 나갔다. 미국 선교부가 준 돈을 뇌물로 부정지출로 해버린 것이다"고 했다.

박 목사는 "한국사람은 마음이 무디니까 그럴수도 있겠지 용서할 수 있지만 미국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박형용 박사가 책임이 있다 해서 책임을 추궁했다"며 "그때 일어났던 사건 이 'NAE 사건'이다"고 했다.

그는 "장로교는 옛날부터 에큐메니컬 운동에 가담해왔다"며 "그러다 1955년인가에는 미국 목사 화이트라는 목사가 NAE를 한국에 소개하러 왔다. 복음주의 연맹이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조동진, 정규오, 신복윤, 나 이렇게 5~명이 화이트 목사를 환영을 했다. 에큐메니컬 운동도 하면서 우리교회는 복음주의도 하겠다. NAE를 받았는데 두 개가 상반되는게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때 이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며 "미국 선교사들이 (3000만원에 대해)자꾸 박 박사가 책임져야 한다고 추궁하니 그때 박형룡 박사를 무조건 지지하며 살리려는 사람이 말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나는 그 속에 살았기 때문에 아는거다. 박형용 박사 집에서 같이 살았다. 수제자로 나를 계승자로 만들려고 하셔서 그 집에서 같이 밥 먹고 살았다"고 했다.

이어 "'3000만원 사건이 없는 걸로 하자'하며 '신학싸움으로 만들자' 했다. 에큐메니컬과 NAE 싸움을 붙인 것이다. 에큐메니칼 운동 하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라고. 에큐메니컬 운동 산하에는 체코 등 공산권 교회가 들어가 있었다. 그때 총무도 체코슬로바키아 사람이라 에큐메니칼은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들은 NAE이고, 박 박사를 반대하는 사람은 에큐메니칼이다고 했다. 없는 사건을 가지고 싸움을 만든 것이다. 자기네 주장을 관철하고 박 박사를 살려두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운동을 해야했기 때문에 암암리에 각 노회로 선전을 했다"고 했다.

이어 "박 박사의 집에서부터 선전문이 나갔는데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공산주의자인데 NAE를 잡아먹으려고 한다고 했다. 또 총회가 곧 모일테니 총대들을 자기네 찬성하는 회원들을 뽑게 만들었다. 그래서 경남노회에서 총대 2개가, 서울노회에서도 총대가 2개 올라와서 아수라장이 됐다"고 했다.

그는 "3000만원 사건 이후 2~3년간 박 박사를 '살려야 된다', '사실대로 해야된다'는 두 세력의 암투가 있었다"고 "정확히 59년 11월에 갈라진다. 통합과 합동의 분열 원인은 거짓말 때문이다"고 말했다.

덧붙여 "3000만원 사건 때문에 박형용 박사는 사표를 냈다. 근데 박 박사를 살리기 위해서 그의 제자들이 음모를 꾸민다"며 "에큐메니컬이랑 복음주의가 왜 반대가 되나. 다 같이 받은 것이고, 다 같이 할수 있는 것인데 무식한 사람들한테 두 개가 반대되는 거라고 선전했다"고 말했다.

한국교회, 이제 겨우 6살, 몸집은 20살...비정상적으로 자라 '비대'

결론을 맺으며 그는 "한국교회는 결국 130년밖에 안 됐다. 역사가 짧다"며 "교회 역사가 2000년인데 한국 장로교는 겨우 130년밖에 안 됐다. 사람이 100살을 산다고 하면 130년 산 우리는 한 6살짜리 밖에 안 된다"고 했다.

이어 "한국의 교회는 어리다. 아주 유치한 교회다. 그런데 몸집은 20살 난 것만큼 컸다"며 "올바로 전도해서 큰 것이 아니다. 샤머니즘, 불교, 유교가 짬뽕이 돼서 독을 먹어서 자라고, 물 먹은 소 같이 그렇게 자랐다"고 했다.

그는 "예배당만 자꾸 지으면 되는줄 알고 선교사 많이 내보내면 되는줄 알고... 그래서 몸집이 커진 것이다"며 "그래서 6살짜리 밖에 안 된 교회가 '난 성인이다', '다 컸다' 하며 교만해진 것이다"고 지적했다.

또 "우리 속에 알맹이가 없고 신학이 없다. 그리고 잘못된 신학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며 "헬라의 이원론이 쑥 들어와 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 때 전부 좋게 만들었지 영혼은 좋고 육체는 나쁘게 안 만들었다. 모든 것을 좋게 만드셨다. 물질세계를 악하다고 말하고 물질을 버려야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신학이고 신학적으로 유치한 것이다"고 했다.

덧붙여 "헬라 철학이 들어와서 중세기를 망가트린거다. 영혼만 좋은 거라고 해서 중세기에는 신부들만 영혼을 다루기 때문에 좋다고 생각했다. 천주교에서는 농사 지었다고 죄 지었다고 고해성사 한다"며 "신학이 잘못된 것이다"고 했다.

그는 "농사를 짓든 장사를 하든지 세상 속에서 썩어가는 세상 속에서 만인이 다 제사장이다"며 "왜 목사가 자꾸 될려고 하느냐. 목사가 남아돈다. 망할 징조다. 신학이 잘못된 것이다"고 강조했다.

이어 "지성적으로 한국교회는 아직 어린 상태이다"며 "세상은 과학적으로 얼마나 발달하고 학문이 얼마나 발달했나? 거기에 비하면 목사님들 설교는 못 미쳐서 젊은 사람이 다 빠져나가는 것이다. 교회에서 들을 게 없는 것이다. 이게 오늘 교회의 현실이다"고 했다.

그는 "세상은 우리보다 더 많이 안다. 교회가 실력이 없으니 빈축을 사고 사람들이 교회에서 떠난다. 교회는 올바른 지식이 있는 교회, 학문이 있는 교회로 발전해야한다

덧붙여 "안다는 것은 이건 뭐다, 뭐다 그런 객관적 지식도 아는 것이지만 안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며 "우선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담이 하와를 알매 가인을 낳는다고 하는데 그때 '안다'는 성교하는것이고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와서 애기를 낳을 것이라고 하니까 '남자를 모릅니다' 할 때도 쓴다. '안다'는 것은 깊이 교제한다는 의미다. 예수님과 깊은 교제, 성찬식 통해서 몸을 먹고 피를 마시고 깊은 교제를 하는 것처럼 말이다"고 했다.

또 '신학생들이 공부를 안한다'는 한 참석자의 토로에 "신학교의 수준을 높여서 신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은 어디다 내놔도 교사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엘리트가 돼야 한다. 그래야 사회 사람들이 와서 얻어먹을 수 있다. 들을 게 있어야 오는거지 안 그럼 나간다"며 "지적인 문제가 너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백성보다 뭔가 나아야 된다"며 "마태복음 5장 13~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시는데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빛이 필요한데 요즘 교회나 교인들은 빛이 아니면서 빛이라고 한다. 빛은 지성이고 영성이다. 교회도 교인들도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박창환 목사는...

1943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하다 해방이 돼서 남한으로 피난와서 조선신학원에 입학했다가 학문을 중시하는 교풍과 맞지 않아 고려신학교를 거쳐 장로회신학교를 1회로 졸업한다.

졸업 하자마자 장로회신학교에서 히브리어, 헬라어, 영어를 가르치는 어학 전임교수가 돼 1948년부터 1989년 2월 정년퇴임때까지 만 40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마지막에는 장로회신학대학교 학장을 맡기도 했다. 1971년부터 3년간은 인도네시아 첫 선교사(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로 방카 섬에서 본토인 교회를 섬기며 교육 선교에 헌신했다.

장신대 교수직 정년퇴임 이후에는 매코믹 신학대학 교수로 3년, LA장신대에서 2년 반, 모스크바 신학교에서 5년, 예장 합동과 통합이 함께 니카라과에 세운 신학교에서 3년간 학장으로 있으며 신학 교육을 했다. 작년부터는 장신대에서 방문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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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환목사 #한국교회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