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솜니 목사(올리브교회 담임)   ©올리브교회

본문: 요한복음 4:1~30

현재 미국은 흑인대통령까지 배출한 사회이지만 불과 50여년전까지만 해도 미국사회는 지금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인종차별이 심한 사회였다. 흑인들은 백인이 드나드는 식당의 좋은 자리를 앉을 수가 없었고 상점이나 영화관에도 흑인들을 위한 전용출입구가 있었다. 버스 안에는 백인과 흑인의 좌석이 따로 구별되어 있었고 흑인들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대부분 백인들이 기피하는 일들뿐이었다. 흑인들은 질병을 옮기는 존재로 여겨져서 화장실도 함께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상황은 인종차별에 대한 심각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런 인종차별은 단순히 미국사회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다문화사회로 접어들고 있는 우리나라도 사회 곳곳에서 이런 인종차별에 대한 진통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은 단일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할수록 더 깊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 독일나치의 유태인 인종차별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독일의 인종차별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던 유태인들도 돌이켜보면 과거에 심한 인종차별을 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이 죽은 후에 남북으로 분열되었는데 북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의 침략으로 남유다보다 먼저 멸망했다(남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함). 이때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는 사마리아 지역에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북이스라엘 주민들에게 혼혈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고레스의 칙령이 공포된 후에 남유다 사람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에 사마리아사람들은 함께 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남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북이스라엘은 인종적, 종교적으로 순수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함께 하기를 거절하였고 그에 대한 반감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400년경에 그리심산에 자신들만의 성전을 따로 세웠다. 오로지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임을 부르짖는 남유다의 입장에서 그것은 신성모독이었기 때문에 북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웃도 아닌 변절자이자 이단으로 인식되었다.

그리심산의 성전터(사마리아인들은 주전 400년 경에 이곳에 자신들만의 성전을 세웠다)   ©원솜니 목사

사마리아 성전이 세워 진지 70년이 흐른 주전 330년에 그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B.C. 356 ~ 323)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점령하였다. 알렉산더는 헬라 문화를 거부하는 골치 아픈 유대민족을 압박하기 위해 자신들의 팔레스타인 거점을 사마리아에 세웠는데 반 유대적 정서를 가지고 있던 사마리아 인들을 알렉산더의 계획에 협력하였고 그로 인해 사마리아에는 헬라식 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사마리아의 원형극장   ©원솜니 목사
사마리아의 헬라유적 카르도   ©원솜니 목사

주전 128년경에 유대는 마카비 혁명에 의해서 잠시 동안 팔레스타인 지역을 수복할 수 있었다. 이때 유대인들은 무력을 앞세워 사마리아지역을 점령하고 그곳 주민들에게 유대교를 강요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거부하자 유대인들은 그리심산에 있던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하고 핍박하였다. 사마리아인들은 씻지 못할 치욕을 가슴에 묻어둔 채 복수할 날만을 기다리다가 급기야 예수님이 10살쯤 되던 해에(주후 6년) 복수를 감행하였다. 사마리아 인들은 공동묘지에서 뼈들을 꺼내 자루에 담은 후 유월절 자정에 몰래 예루살렘 성전에 잠입하여 뼈들을 성전 뜰 곳곳에 흩뜨려 놓았다. 그로 인해 성전이 "부정"하게 되어서 결국 유월절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수백 년에 걸친 둘의 원한 관계는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고 그 일이 있은 지 20년이 지난 오늘 본문의 때에도 유대와 사마리아의 적개심은 결코 시들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A루트가 사마리아를 관통하는 길이고 B루트는 베레아지역을 우회하는 길이다.)   ©google map

지리적으로 사마리아는 남쪽 유대와 북쪽 갈릴리의 중간에 위치한 지역이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갈 경우 사마리아를 관통하면 3일 정도이면 도달할 수 있었지만 앞서 말한 적개심으로 인해 유대인들은 대부분 일주일 정도가 되는 베레아 지역을 통과하는 길로 통행했다. 예수께서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가셨다는 것은 예수께서도 명절 때에 베레아 지역의 길을 주로 이용하셨음을 볼 수 있다(눅 18:35).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명절을 지내시고 이제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시려는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들에게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로 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의 결정에 무척 당황했을 것이지만 반대하지 못하고 따라 나섰다. 새벽 일찍 출발한 예수님의 일행은 정오가 되어(유대시각으로 여섯 시)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도착했다. 그곳은 전통적으로 야곱이 팠다고 전해지는 한 우물이 있었다. 제자들은 허기를 느껴 근처에 먹을 것을 구하러 갔고 예수님만이 혼자 우물가에 걸터앉아 피로를 달래고 계셨다.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야곱의 우물   ©원솜니 목사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은 무슨 영문에서인지 그 뜨거운 정오에 물을 길으러 그곳에 왔다. 여성의 바깥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던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우물가에 물을 길러가는 것은 고된 일이긴 해도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성들은 선선한 오전이나 오후에 함께 모여 우물가로 가서 물을 긷고 서로간의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하지만 이 여인은 혼자였다. 그것도 남들이 아무도 오지 않는 정오에 우물을 뜨러 왔다. 필시 이 여성은 남들의 눈을 피할 정도로 심각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여성들은 선선한 오전이나 오후시간에 함께 모여 물을 길었다.   ©원솜니 목사

하지만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나왔던 우물가에 어떤 낯선 남자가 있었다. 옷을 보아하니 그는 유대인이었다. 우리나라도 옛말에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었지만 중근동사회는 오늘날까지도 남녀의 구분을 엄격히 두는 사회이다. 또한 예수님의 복장을 통해 유대인임을 알아본 여성은 유대인에 대한 적개심이 더해져 우물가에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여인은 한참을 갈등하고 다가서지 못하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우물로 다가섰을 것이다. 물론 그 유대인 남성이 자기를 모른척하고 한마디의 말도 걸어오지 않을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여인의 기대는 일순간 무너졌고 일은 점차 꼬여만 갔다. 왜냐하면 그 유대인 남성이 자기에게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목이 마르니 물을 좀 주시오"

이 여인은 매우 당황했다. 서로가 얘기를 나누지 않는 것이 미덕일뿐더러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이 사마리아 여인은 상대편의 남자가 잠시 잊고 있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당신은 유대인 남자로서 어떻게 사마리아 여자인 나한테 물을 달라고 말할 수 있나요?"

여인은 남성과 대화를 단절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선 이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새벽부터 발걸음을 서두르셨기 때문에 여인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실 리가 만무했다. 예수께선 그녀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다 주시길 원했다. 그녀의 아픔을 이미 아셨고 그 인생을 기꺼이 변화시키고자 모든 사회적 통념을 넘어서 그녀에게 다가오셨다. 우리는 항상 그분과의 만남을 상식 선에서 규정지으려 하지만 그분께서는 그런 것에 구애 받지 않으신다. 예수께선 그녀에게 삶의 애환이 담겨있는 "물"이라는 상징적 매개체를 통하여 그녀와 만나시고 그녀의 삶을 돌아보시며 그녀의 삶을 변화시키기 원하셨다.
예수님께서는 그녀의 인생의 변화를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제시하셨는가?

1. 그녀에겐 육신적 목마름을 위한 물이 아닌 참된 생수가 필요했다.

조금 전까지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했던 예수님은 갑자기 자신이 생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물 길을 두레박도 없어서 내게 물을 구했던 사람이 생수는 무슨 말이야?"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물의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유대교는 물을 구별할 때 생수와 생수가 아닌 것으로 구별한다. 이는 물의 깨끗함이나 맛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들이 말하는 생수란 비, 샘, 시내, 강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온 물을 가리킨다. 그 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수이기 때문에 부정한 것을 정결케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율법에서 부정한 자들로 하여금 씻으라고 명할 때 사용하는 물은 다름아닌 바로 이 생수이다. 생수의 힘은 강력해서 일반 물위에 한 방울의 생수만 닿아도 그 모든 물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고 여겼다. 생수란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흐르는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그런 부정함을 모두 씻을 수 있는 생수가 자신에게 있다고 말씀하셨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푼 요단강은 매우 더러운 흙탕물이지만 유대인들에겐 생수다.   ©원솜니 목사

이 여인의 삶은 매우 망가져있었다. 부정한 행실로 여러 명의 남자와 이혼과 혼인을 반복하며 살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녀의 부도덕성을 비난했고 그녀와 상종하지 않았다. 결국 부끄러운 삶을 살았던 이 여인은 사람들을 피해서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에 물을 길으러 와야 했던 것이다. '만일 저 랍비가 말하는 것처럼 이 야곱의 우물이 아닌 다른 곳에 물을 길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이렇게 스트레스 받거나 눈치를 봐가며 물 길을 일이 없을 텐데'라고 여인은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지역에는 다른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없었다. 여인은 그 지역 토박이로서 외부인인 예수님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다른 우물은 없었다. "그나마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파서 우리에게 물려줘서 먹고 살 수 있는데 당신이 어떻게 다른 물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합니까? 당신이 그렇게 위대한 사람입니까?"

그 여인은 계속해서 육신의 눈에 갇혀서 예수님의 존재를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은 정오에 뜨거운 태양에서 물을 긷는 것처럼 매우 고단한 인생이었다. 그 고단한 인생이 단지 다른 우물을 발견해서 사람들의 눈만 피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님의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과 멀어져 단지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물리적인 물이 아니라 부정한 인생을 완전하게 정결하게 해줄 영적인 생수가 필요함을 지적하셨다. 그 생수는 다름아닌 예수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세상의 기준을 중시하고 물질적인 것들로 인생을 채우려는 자들에겐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도 단지 먹고 사는 문제만이 중요하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고단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남자 저 남자 바꿔가며 잘못된 삶으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남이 뭐라 하든 일단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했다. 그러나 남자가 계속 바뀌어도 삶의 모습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님과의 만남은 모든 것에 변화를 가져왔다. 주님은 여인에게 어떤 물리적인 것을 주시지 않았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녀의 인생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심으로 그녀가 잘못된 삶을 청산할 것을 요구하셨다. 그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지만 인생의 변화를 위해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인생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 28절에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라는 말은 그녀의 완전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녀는 물동이를 내던지므로 자신의 갈증이 해결되었음을 보여줬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있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했다. 이런 완전한 변화는 바로 생수이신 예수그리스도를 얻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오늘날 바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사마리아 여인과 같은 인생의 깊은 갈증이 존재한다. 인생의 타는듯한 갈증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수로만 가능하다. 삶을 더 윤택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지만 세상은 결코 우리의 갈증을 해결해주지 못한다. 우리가 인생의 고통스런 문제로 허덕이고 있을 때 주님은 여인의 약점을 들추어내셨듯이 우리 삶의 가장 약한 부분,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시고 그것들로부터 돌아서라고 명령하신다. 그리고 그 명령들에 용기있게 순종하여 잘못된 삶으로부터 돌아설 때 인생의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주님을 모신 순간 여러분의 인생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를 확실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며 그 목소리에 순종하는 자는 참된 평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용기를 요구하는 일이지만 한 치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는 확실한 길이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요 3:19~21)

2. 삶의 변화는 참된 예배에서 비롯된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가는 것은 다름아닌 예배에서 비롯된다. 여인은 자신의 삶을 꿰뚫어보시는 예수님의 통찰력으로 인해 그분을 선지자로 받아들이고 이후에 하나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 질문한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정통이라고 하니 어디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지를 물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에 대해서 언급하신다. 그것은 예루살렘이나 그리심산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었다.

사마리아인들은 오늘날까지도 동물로 제사를 드린다.   ©원솜니 목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알아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이시기 때문에 장소에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물리적인 것에 제한을 받지 않으실뿐더러 물리적인 것으로 만족을 얻으시는 분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구약시대를 걸쳐 이런 잘못을 저질러왔다. 그들이 드리는 예식은 형식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했다.

"너희가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2~24)

또한 우리는 "영과 진리로"라는 말을 올바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마치 우리 인간이 엄숙하고 신령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으로 쉽게 착각한다. 그러나 이 "영과 진리"로 표현된 헬라어를 직역하면 "성령과 진리 안에서"라는 말이다. 이는 예배 드리는데 있어 인간의 노력이 아닌 그들이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분이시란 사실은 그분이 교회건물이라는 한정된 곳에 갇히신 분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공간에 편재해 계시다는 분임을 알려준다. 그분께 드리는 예배는 오로지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릴 때 열납될 수 있다. 우리가 성령과 진리 안에서 거주하지 않는 한 결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고 우리의 예배는 헛된 시간낭비에 그치게 되는 것이다.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예배의 주도권을 내가 쥐는 것이 아닌 바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이다. 내가 신령해지려고 거룩해지려고 엄숙해지려고 그리고 내 안에 모든 것을 쥐어짜듯이 노력하는 자세로 예배하는 것은 참된 예배가 아니다.

예배에 나오는 우리의 합당한 자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성령의 특성은 내주하심이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의 삶을 바로 인도하시는 것이 그분의 특성이다. 내 안에 나의 모든 삶을 간섭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단지 주일 예배시간에만 나와서 하나님께 형식적인 예배로 나가려는 사람은 결코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할 수 없다. 일주일 동안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 온전한 삶을 살고 주일날 회중예배에 나와 그 삶을 예배로 고백해야만 한다.

또한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 말씀이 나에게 어떤 은혜를 주는지 내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지를 귀담아 듣지 않고 설교를 세련되게 잘하는지, 말실수를 하지는 않는지, 듣기 좋았는지 만을 판단하려는 자들은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좋은 공연 한편을 보거나 유명한 인사의 강연을 듣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예배는 어떤 감동을 얻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권위아래 완전히 순종하여 새로 시작되는 일주일을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고 결단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한층 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며 그렇게 살아갈 때에 우리의 인생이 완전하게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반면 물리적인 것은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그것은 하늘로 향해야 하는 우리의 시선을 자꾸만 땅으로 향하게 만든다. 그래서 세상일에 대해 근심하게 만들고 주님의 도우심에 대해 의심하게 만들며 주일날 단지 한 두 시간의 형식적인 예배로 하나님께 우리의 도리를 다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언제든, 어디서든, 그 누가됐든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가리킨다.

이제 용기를 내어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보자. 세상의 헛된 시도들을 내던지고 오로지 주님을 내 마음에 받아들여 주님의 방식대로 내 인생을 변화시켜보자. 장담컨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일주일의 모든 시간들을 주님 앞에서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여러분의 인생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 원솜니 목사는...

칼빈대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국제기독교성지연구소에서 10년 동안 전문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교회들과 신학교의 성지탐방을 인도하고 성경의 문화와 배경에 대한 강의를 진행해왔다. 현재 평신도 전문신학기관인 갈렙바이블아카데미의 운영위원과 올리브공동체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성경의 배경과 문화를 소개하는 올리브바이블스터디(www.olive.or.kr)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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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솜니목사 #올리브교회 #사마리아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