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솜니 목사(올리브교회 담임)   ©올리브교회

♦ 본문: 누가복음 7:1~10

신약성경을 보면 우리는 전반적으로 예수님께서 부자나 권력자들과 멀리하셨다는 인상을 받는다. 약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이 뇌리에 깊게 남아서인지는 몰라도 성경에 등장하는 권력자나 부자들에 대해 우리는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아 부자되길 원할 것이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멀리만 하셨을까?

성경에서 헐벗고 굶주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가장 큰 믿음으로 예수님께 칭찬받은 사람은 다름아닌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이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7:9)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로마군대라는 최고의 집단에 속한 로마 백부장에게 울려 퍼진 말씀이다. 특히 이 말씀을 하실 때 예수님은 매우 놀라워하셨다. 공관복음에서 예수님이 놀라셨다는 표현은 딱 두 번만 등장한다. 여기서 '놀라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다우마조'(qaumavzw)인데 이 표현은 막 6:6과 오늘 본문에서 등장한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 받으실 때 고향 사람들이 너무 믿음이 없어서 놀라셨고, 한번은 너무나도 큰 믿음을 보고 놀라셨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때 그 광경을 지켜봤던 제자들이 놀랐을 때에도 '다우마조'를 사용했으니 오늘 본문의 예수님께서 놀라시는 반응은 단순히 흠칫 놀라는 것 이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이 예수님의 눈을 크게 만들었을까? 백부장의 믿음을 좀 더 깊게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제라쉬에서 공연중인 로마군 제식훈련   ©commons.wikimedia

로마군의 조직 중 가장 큰 단위는 군단이다. 당시 로마의 1개 군단은 약 6천명 정도의 사병으로 구성되어있었는데 로마 제국 안에는 총 28개 정도의 군단이 있었다. 한 개의 군단은 10개의 대대로 나뉘고 이 한 개의 대대는 여섯 개의 백인대로 나뉘었다. 명칭상으론 백 명이 기준이 되지만 실질적으로 백인대는 8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백인대를 이끄는 대장이 바로 백부장이다. 백부장은 로마군의 가장 핵심이었다. 복무 경험이 보통 15년이 되었을 때 백부장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사병들에게 백부장은 그들이 꿈꿀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직책이었다.

군생활이 천국이 되느냐 지옥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이 속한 백인대의 백부장이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있었다. 병사들의 군기를 잡기 위해서 백부장은 갖은 기합을 통해서 두려움을 심어줘 군기를 잡으려 노력했다. 타키투스의 『연대기』에 등장하는 한 백부장의 별명은 '다른 놈을 데려와'였다고 한다. 아마도 군기를 잡기 위해서 병사들을 순번에 따라 앞에다 놓고 체벌을 가해 얻어진 별명일 것이다.

로마 백부장의 복장을 재현한 모습   ©commons.wikimedia

예나 지금이나 군대생활은 고된 생활이나 다름없지만 그렇다고 예수님 당시의 로마군이 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의 삶은 우리가 현재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서민들의 삶이 매우 어려움에 처해있었다. 현대인들은 앞날에 대한 걱정이 앞서지만 당시의 사회는 내일의 먹을 것을 염려하는 시대였다. 고용은 불안했고, 착취는 심했으며, 약탈이 성행하고,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였다. 그런 환경 가운데 군대에 입대하는 것은 매우 안정된 생활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군에 지원하여 신체능력과 정신자세가 적합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하게 될 군단의 마크를 문신이나 낙인을 통해 몸에 새겨놓고 군생활을 시작한다.

자유가 엄격하게 제한되기는 했지만 반면 끼니에 대한 걱정이 없이 영양소가 고루 갖춘 식사를 할 수 있었으며, 글이나 기술들을 배울 수도 있었고, 꼬박꼬박 봉급을 받을 수가 있었다. 복무기간이 늘어날수록 많게는 2배 정도의 봉급이 올랐는데 백부장은 일반병의 15배에 달하는 봉급을 받았다.

또한 군인들은 재판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지 군사법정에서만 재판을 받았는데 민간인의 고발을 받더라도 모든 재판은 백부장들로 구성된 군사재판위원회에서 열렸고 판결은 당연히 군인에게 유리하게 내려졌다. 혹여 지나가는 사람들의 물건을 빼앗아서(눅 6:29) 고발을 당했다 할지라도 오히려 물건을 빼앗긴 민간인이 억울한 판정을 받을 때가 비일비재했다. 마 5:41에 나온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라는 말씀은 로마군인이 즉각에서 노동력을 징발할 수 있는 당시의 규정에 기인한 말씀이다. 그 규정으로 인해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었던 것이다(눅 23:26).

로마군에서 백부장의 위세는 그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사병들 사이에서는 백부장에게 뇌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되고 불이익을 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백부장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면 항상 돈을 찔러 줄 준비가 되어있어야만 했다. 그런 관례들을 통해서 백부장은 제대할 쯤에 지역의 시의원 또는 수석 치안판사가 될 수 있을 만큼 재력을 쌓을 수가 있었다.

백부장들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사병들과도 복장이 달랐다. 로마의 일반사병들은 철판으로 된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었지만 백부장들은 자신들이 무적임을 시사하기 위해 쇠줄로 얼기설기 짜여진 허술한 옛 갑옷만을 고집했다. 그들은 자신이 백부장이란 사실에 대단한 자긍심이 있었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은 매우 높았으며 로마의 번영을 위해 언제든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었다.

오늘 사건이 일어난 가버나움은 조그만 어촌 마을이긴 했지만 매우 전략적인 위치에 자리잡은 도시였다. 그곳은 당시 유명한 무역로였던 해변길이 지나가는 길이었으며 가버나움을 기점으로 헤롯 안티파스의 영토와 헤롯 빌립의 영토가 나뉘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선 세금을 내야만 했다. 통행자들로부터 세금이 원활하게 징수되기 위해선 치안이 안정되어야 했기 때문에 이곳에는 로마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에 로마군단은 시리아와 이집트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1개 백인대 정도가 파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그 지역에서 가장 힘있는 권력자였다. 길거리에서 그를 보는 사람마다 길을 피했을 것이며 자칫 세금을 떼어먹었다간 그에게 불려갔을 것이다. 이런 그가 예수님에게 칭찬을 받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백부장의 타인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우리는 백부장의 근심이 다름아닌 자신의 노예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당시의 노예는 지역마다 큰 편차를 보이긴 했지만 많은 곳은 도시 인구의 30퍼센트가 노예였다. 외적인 모습도 별반 차이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하고 있는 문신이나 목걸이가 없다면 그들이 노예인 것을 구별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전쟁을 통해 많은 노예들을 공급했지만 빚을 갚지 못하거나 굶주림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노예 된 자들도 적지 않았다. 노예는 주로 경매를 통해서 거래되었는데 구매자들은 벌거벗은 노예를 유심히 살펴보면서 가격을 흥정했다.

노예시장   ©Boulanger gustave the slave market

하지만 평균적인 가격은 매우 저렴했고 백부장의 일주일 치 월급만으로도 노예 한 명을 살 수 있었다. 노예는 오로지 주인의 이익만을 위해서 일했고 육체적 학대는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들은 얻어 맞는 게 일상이었다. 일을 잘하면 더 잘하라고 맞고 나쁜 짓을 하면 버릇을 고쳐놓기 위해 맞았다. 성 어거스틴은 "말대꾸를 해 주인을 짜증나게 했다는 이유로 혹은 주인을 툭 쳤다는 이유로 노예를 몇 년씩이나 감금하는 처벌을 내려야 하는가?"라고 한탄했었다. 또한 기독교 주인이 비 기독교 주인보다 관대했다고 보는 사료가 찾아보기 힘들만큼 노예는 그야말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인식 속에서 인간으로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이렇게 종들에게 심한 학대를 한 목적은 다름아닌 주인에게 복종하도록 길들이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아플 경우 치료를 기대할 수도 없었다. 치료 비용보다 다른 노예를 사는 것이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문의 백부장은 노예를 그렇게 학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노예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종이 중풍병을 앓게 되자 그를 살리기 위해 갖은 노력과 수단을 써보았지만 아무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제 그 종은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다 손을 놓는 그 시점에도 백부장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종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의 눈을 예수께로 돌리게 만들었다. 그는 이방인의 신분으로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호의를 얻고자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동원하여 유대인의 장로들에게 부탁을 했다. 장로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청했던 사실을 보아도 백부장이 종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마치 예수께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들을 고치셨던 그 마음처럼 백부장도 자신이 종을 위해 최선의 마음을 쏟아 부었던 것이다.

이렇게 타인을 측은이 여기는 마음은 소위 지도층, 부유한 자, 영향력 있는 자들이 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도 빈부의 격차로 인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빈익빈 부익부의 모습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초 경쟁사회에 접어들게 되면서 인간의 인성보다 기능적 측면이 중요시 여겨지게 되었고 경쟁에서 밀리거나 효용가치가 떨어지게 되면 사회에서 낙오되기가 일수이다.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는 자들은 노동자들의 삶을 살피기보다는 단순한 효용가치로만 보기 쉽고 엄한 잣대로 그들을 통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노사가 서로 협력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들의 탐욕을 의심하고 윗사람들은 아랫사람들의 게으름을 의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서로에게 필요한 덕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 3:22 – 4:1)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갈등의 중요한 해결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고용주나 지도자들이다. 그들은 반드시 자신이 데리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어야만 한다. 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고 무엇보다도 그 문제를 주님께 들고 가는 것이 바로 크리스천 리더들이 해야 할 가장 큰 우선순위이다. 당시의 사회상에 비추어보았을 때 백부장의 그런 모습이 비정상적이었듯이 오늘날에도 그런 고용주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불가능을 현실로 만드는 백부장 모습은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다.

둘째,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믿음의 소유자였다.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했던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유대인 장로들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유대인들을 사랑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당시의 백부장으로서는 지출하기 힘든 회당 건축비용을 기부하였다.

가버나움 회당   ©원솜니 목사

이것은 그가 지역주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단순한 쇼맨십이 아니었다. 그는 율법까지도 잘 이해할 정도로 유대교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종을 고쳐주기 위해서 친히 자신의 집으로 오시고 계시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신의 친구들을 보내 예수께서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당시 유대인들, 특히 예수님과 같이 의로운 사람들은 이방인들과의 접촉을 삼갔다. 남자와 여자의 분리, 하나님의 선민과 이방인의 분리 등을 명확하게 따졌었고 백부장은 이런 유대인의 관습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이 오히려 그분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드물지만 고넬료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던 백부장이었다.

사실 그는 예수님을 억지로 오게 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단지 자신의 부하뿐만이 아니라 일반 민간인들에게도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는"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런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며 자신의 신분에 걸맞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의 권위와 권세가 결코 하나님보다 높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고 확신하는 예수님보다 높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평상시 인품은 매우 뛰어났고 회당을 세울 정도로 열심인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반드시 그의 청을 들어주시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예수님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사람이라고 인식했다(7절). 또한 예수님을 주라 칭하면서 그분이 자신과의 관계에서 누구이신지를 정확하게 고백했다.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누군가를 의지하고 도움을 받기 보다는 남에게 지시하고 베풀게 되는 일들이 많아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레 하나님께 의지하는 겸손의 모습도 시들어가게 마련이다. 많이 벌어서 주님께 많이 드리는 만큼 하나님이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착각하기도 매우 쉽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께 기도하길 게을리하거나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가지고 자신의 뜻이 주님의 뜻인 것마냥 교회공동체를 좌지우지 하려는 모습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문제들을 쉽게 노출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많은 교회에서 중직을 세울 때 주로 사회적 위상과 재력을 기준으로 직분자들을 세운다. 헌금을 많이 내는 자들을 일꾼으로 세워 교회 성장을 더 빨리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회 공동체가 특정인들에게 매이게 되고 그들은 자신들이 많이 드렸다는 이유로 공동체의 결정권을 좌지우지하려 한다. 평신도 지도자들과 목회자들간의 잦은 갈등은 서로가 주님을 옆으로 제쳐두고 스스로 상대방을 "이더러 가라 저더러 오라"하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들이다. 그런 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과연 교회에 나오면서 스스로를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로 여기면서 나오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과연 우리는 매 주일마다 주 앞에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주를 내 앞으로 부르는 것인가?

크리스천 리더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겸손이다.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고 그 앞에 엎드러져 있는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때에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고 청지기 본연의 사명을 잘 감당할 수가 있게 된다.

셋째, 백부장은 말씀의 실질적 능력을 믿는 믿음을 소유했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처음부터 예수님께 원했던 것은 단지 그분의 말씀만을 바랬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오시게 청했다면 그는 집에서 예수님을 정성껏 맞을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는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다른 유대지도자들처럼 자신들의 집에 오시는 것을 꺼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주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지는 못하여도 계신 곳에서 자신의 종을 위한 말씀 한 마디만 하면 나을 것이라 생각하여 단지 자신의 종을 위한 말씀 한마디만을 청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신의 집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백부장은 매우 당황했다. 서둘러 자신의 벗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만류한다. 오셔서 직접 손을 얹지 않으셔도 단지 계신 곳에서 말씀 한마디만으로 자신의 종을 충분히 살리실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그는 아마도 유대인 장로들에게 부탁을 했을 때에도 그와 같이 부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 장로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께서 직접 가셔서 친히 손을 얹어주기를 청했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예수님 당시의 로마황제   ©원솜니 목사

백부장은 스스로가 권세와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기 때문에 힘을 가지고 있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의 힘은 티베리우스 가이사에게서 부여 받은 것이었다. 백부장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가 보내신 분의 말씀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모든 치유는 오로지 말씀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말씀에 대해 얼만큼의 신뢰를 가지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의 힘을 믿기 보다는 가시적인 증거나 사람들을 의지하지는 않는가? 이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창세기 1장에도 잘 나와있듯이 하나님께서 "~있으라" 말씀하셨을 때 이 땅의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 말씀으로 형성된 세상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분의 말씀이 이 세상의 참된 원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인생문제 해결의 열쇠로 여기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도마처럼 가시적인 증거를 찾기 보다는 삶과 일의 최우선 순위가 말씀에 있음을 믿고 나아갈 때 진정한 주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백부장은 세상의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는 결코 그것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들을 위해 자신의 역량을 쏟아 부었고 자신이 아무리 용맹하고 뛰어난 사회적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한낱 연약한 사람임을 인식하고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주의 말씀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지도자에 대한 불신이 팽배하고 양극화의 상처로 점철된 오늘날의 한국에서 하나님께서 크리스천 리더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믿음이 아닐까?

■ 원솜니 목사는...

칼빈대학교와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수학했다. 그는 국제기독교성지연구소에서 10년 동안 전문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여러 교회들과 신학교의 성지탐방을 인도하고 성경의 문화와 배경에 대한 강의를 진행해왔다. 현재 평신도 전문신학기관인 갈렙바이블아카데미의 운영위원과 올리브공동체교회를 담임하고 있으며 성경의 배경과 문화를 소개하는 올리브바이블스터디(www.olive.or.kr)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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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원솜니목사 #올리브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