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주 교수   ©자료사진

아브라함 때부터 '믿음의 사람' 이야기는 고향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창12:1)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친척과 헤어져 이방인 마을로 길 떠나는 나그네들의 이야기다. 모세도 그랬고 예레미야도 그랬으며 바울도 그랬고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도 그러했다. 성경과 교회사는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미래의 약속을 바라고 모험을 감행한 신앙인들의 이야기로 꾸며진다. 한국 초대교회사도 그러한 나그네들의 믿음 이야기다.

이덕주 교수(감신대)는 "(중국) 화룡시 팔가자진 상남 5조에 그런 예수 마을이 있다"고 소개했다. 장은평 교회보다 2년 늦게 개척된 구세동(救世洞) 교회다. 구세동 마을과 교회는 함북 길주 출신 이종식과 그 가족, 친척 10여 명이 개척했다. 이 교수는 "고향을 떠날 때 이미 교인이던 이들도 이곳 골짜기에 들어와 중국인에게서 땅을 사서 마을 이름을 '구세동'이라 했으니, 그 믿음을 알만 하다"고 했다. 구세주를 믿는 마을, 세상을 구하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예수 마을인 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구세동은 예수 믿는 사람들만 들어와 살았고, '경산대토벌' 때 일본군이 들어와 예배당은 물론 마을 전체를 불 질렀고 살육을 감행했다고 한다. 현재는 조선족만 살고 있, 물론 해방 후 예배당이 폐쇄되고 교인 가족들은 대부분 마을을 떠나 교회는 없지만, 곳곳에 '예수 마을' 흔적이 남아 있다. 과거에는 ▶교인 아닌 사람은 살 수 없었고 ▶내 것 네 것이 없이 살았으며 ▶일주일 하루 철저히 쉬고 6일 열심히 일한 사람만 예배당에 갈 수 있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이덕주 교수의 말에 따르면, 히브리서 말씀처럼 '그들은 나온바 본향을 생각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구세동 교인들 대부분은 해방 후에도 고향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들이 이방인의 땅에 들어와 일궈낸 '신앙촌'을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풍요로움으로 말미암아 중국 토지개혁과 청산운동을 거치면서 청산 혹은 투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러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그들은 신앙을 지켰다.

구세동 교회 마을 입구 언덕의 공동묘지엔 일제시대 별세한 교인들의 무덤들이 십자가 문양을 새긴 비석들과 함께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덕주 교수가 그것을 탁본으로 떠와 논문 발표의 자리에서 공개했다.

이후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중국 내 모든 교회가 사라질 때 표면적으로 이들의 신앙도 종지부를 찍게 됐다. 그러나 남은 후손들은 대부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교수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사회 환경의 변화 속에 조금씩 사라져가는 신앙선배들의 자취로 인해 마음 한 구석에는 아쉬움과 아픔을 동반하는 조급함을 강하게 느꼈다"고 말하고, "역사를 공부한 신학도로서 사라져가는 신앙선배들의 발자취를 조사 보존 연구해 후세에 남겨야 하는 사명감 때문"이라 했다.

한편 이덕주 교수의 '구세동 마을'에 대한 연구결과 발표는 5일(토)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24회 학술발표회에서 이뤄졌다. 이 날 행사에서는 이덕주 교수의 발표 외에도 송재원 연구원(국가보훈처)이 "1920~30년대 평양 YMCA의 조직과 활동"이란 주제로 논문발표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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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주 #구세동 #한국기독교역사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