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인파 속에서 뽕나무에 올라간 세리에게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라고 하셨고, 무덤 앞에서 통곡하던 여인에게 “마리아야” 하고 조용히 그녀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 호명을 통해 그녀는 주님을 알아보고 무너졌던 믿음을 회복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서 마주한 사람을 환자, 죄인, 군중 등으로 뭉뚱그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심으로써 ‘무리 중 하나’가 아니라 ‘하나뿐인 존재’로 대하셨습니다. 우리는 잊기 쉬운 진리를 예수님의 말에서 다시 떠올립니다. 사람은 고쳐야 할 문제가 아니라 불러야 할 이름이라는 것을.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지적 통찰이나 뛰어난 비유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이 듣는 이의 마음 깊은 곳을 꿰뚫고, 숨기고 싶던 내면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때로 불편합니다. 자신의 내면을 낱낱이 비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편함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진리는 마치 입에 쓴 약과도 같이 불편하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진심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변화의 자리로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최대환 - 예수님의 스피치
아들은 베이비 박스에 맡겨지고, 새가나안 교회 사모님이 “창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다고 했다. 2015년 7월 1일에 “평택”을 본으로 창설해서 성을 “남궁”으로 하고 이름을 “상우”라고 정해 수원지방법원에서 허가했고, 2016년 4월 6일에 아빠의 성을 따라 “최상우”가 되었다. 아들의 첫 여권은 최상우다. 2016년 6월 15일에 개명 허가가 되어 아들의 여권을 새로 신청했다. 신기하게 우리 아들 생일이 6월 14일인데, 6월 15일에 개명 허가가 난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들은 엄마나 아빠, 두 누나가 “하겸아” 하고 부르면, 쳐다보고 대답도 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부를 때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야곱의 집에서는 계속 “상우야, 상우야~” 이렇게 불렀는데 어느 날부터 엄마, 아빠, 두 누나가 “하겸아~ 하겸아~” 하고 부르니 혼란이 왔을 것이다. 그런 아들이 개명이 된 6월 말에 드디어 자신을 “하겸”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겸이 거야.” “하겸이가 할 거야.” “하겸이도, 하겸이도 갈 거야.” 아들이 자신을 하겸이라고 불렀을 때, 벅차오르던 그 감정. 이제 우리 아들이 자신을 하겸이로 받아들이고 우리를 가족으로 인정했구나 싶어 감사했다.
원선미 - 술래로 태어난 아들 아들과 함께 술래가 된 엄마 아빠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포인트는, 이 사건이 단지 ‘의지력의 승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강조하는 바는 정확히 반대입니다. 그는 이 순간까지 자기 의지로 자기 의지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바뀐 것은 그의 노력 총량이 아니라 그의 사랑 대상이었습니다. 은총은 의지를 대신해 일하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사랑을 재정렬함으로써 의지 자체가 다시 온전히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드는 능력입니다. 어거스틴의 ‘내면으로의 길’은 근대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자기 성찰, 곧 자아를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답을 찾는 심리적·치료적 내향성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어거스틴의 내면은 결코 정박지(머무는 곳)가 아니라 통로입니다. 내면을 파고든 시선은 반드시 자기 자신을 뚫고 지나가 자기보다 높은 곳에 이르러야 합니다.
이상욱 - 시간, 기억,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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