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 운동이 지방의대 신설 정책에 던지는 경고
1958년 중국의 농촌은 냄비와 북을 두드리는 소리로 요란했다. 마오쩌둥은 참새가 곡식 낱알을 쪼아 먹어 인민의 노동 결실을 가로챈다고 보았다. 참새는 쥐, 파리, 모기와 함께 없애야 할 네 가지 해로운 것, 곧 '제사해(除四害)'운동 대상에 올랐다.
온 국민이 동원되었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소리를 내어 참새가 내려앉지 못하게 했고, 둥지를 허물고 참새를 잡았다. 계산은 단순했다. 참새 한 마리가 먹는 곡식에 참새 수를 곱하면 늘어날 쌀의 양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계산에는 참새가 먹는 것이 낱알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빠져 있었다. 참새는 메뚜기와 애벌레를 잡아먹었다. 천적이 사라진 들판에서 해충이 번성했고 수확은 늘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낱알만 세고, 보이지 않는 먹이사슬은 세지 않은 정책의 결말이었다. 단순 무지한 발상으로 생태계를 망가트리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정책의 흑역사다
숫자를 채우려 솥을 녹이다
같은 해 중국은 "15년 안에 영국의 철강 생산량을 따라잡겠다"고 선언했다. 제철소도 기술자도 없는 마을마다 흙과 벽돌로 재래식 용광로, 곧 토법고로(土法高爐)가 세워졌다. 할당량이 내려왔고 채우지 못하면 문책이 따랐다.
철광석이 모자라자 사람들은 밥솥과 문고리와 농기구를 녹였다. 땔감을 대느라 산이 벌거숭이가 되었다. 그렇게 얻은 것은 쓸 수 없는 쇳덩이였다. 그러나 보고서에는 '철강 생산량'으로 적혔고, 중앙은 숫자가 채워지는 것을 보며 만족했다. 그 사이 농민은 논밭을 떠나 있었다. 멀쩡한 농기구를 녹여 쓸모없는 쇠를 만들었고 추수는 때를 놓쳤다. 여러 실책이 겹친 끝에 1959년부터 3년간 대기근이 중국을 덮었다. 학자에 따라 1,500만 명에서 4,500만 명이 굶어 죽은 것으로 추산한다. 질이 아닌 양으로 승부를 거는 사회주의 정책이 만든 결과였다.
두 운동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목표는 선했고 숫자는 명쾌했다. 다만 살아 있는 체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묻지 않았다. 탁상행정으로 결정하고 우선순위나 효율과는 상관없이 억지로 물꼬를 막은 결과다.
의사 수를 채우면 지방의료가 살아나는가
비극의 크기를 견주려는 것이 아니다. 닮은 것은 생각의 구조다. 정부는 의대 정원을 늘리는 데 더해 공공의대를 세우고, 의대 없는 지역에 의대를 신설해 지방의료를 살리겠다고 한다. 지방에 의대를 세우고 정원을 채우면 그 지역에 의사가 남는다는 계산이다.
이 계산에도 빠진 것이 있다. 지방에 의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있던 의사가 떠났다. 분만실을 지키던 산부인과 의사, 밤새 응급수술을 하던 외과 의사, 소아 응급을 보던 소아청소년과 의사가 수도권 병원으로 옮겨 갔다. 낮은 수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법 위험, 줄어드는 환자가 그들을 밀어냈다. 환자 역시 KTX를 타고 서울로 간다.
있던 의사가 떠난 자리에 새 의대를 세운다고 물길이 바뀌지는 않는다. 떠난 이유가 그대로라면 새로 길러 낸 의사도 같은 길로 흘러간다. 10년 의무복무로 묶어 둘 수는 있다. 그러나 묶인 기간이 끝나는 날의 선택까지 정할 수는 없다.
신설 의대는 토법고로를 떠올리게 한다. 토법고로에는 제철 기술자도, 고온을 내는 연료도 없었다. 그래서 쓸 수 없는 쇠가 나왔다. 의학교육에는 기초의학 교수와 임상 교수, 충분한 환자 증례를 갖춘 수련병원이 필요하다. 그런데 가르칠 사람이 없다. 여러 사정이 지방의 의사들을 이미 수도권 병원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교수 없이 건물과 정원만 갖춘 의대에서 나올 것은 부실교육이다. 부실한 실습과 교수 부족 끝에 2018년 문을 닫은 서남대 의대가 그 선례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의사를 배출하는 것은 의사 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환자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다.
성과는 '의대 수'와 '입학정원'으로 보고될 것이다. 그러나 지방 의료의 성적표는 그 숫자가 아니다. 그 지역 응급실에 당직 전문의가 있는가, 분만실이 열려 있는가로 매겨진다. 더구나 올해 뽑은 학생이 전문의가 되기까지는 10년이 넘게 걸린다. 그동안 남아 있던 물마저 빠져나가면 생태계는 더 황폐해진다.
덩달아 위협받는 교육 생태계
대약진 운동의 가장 큰 손실은 쓸모없는 쇠가 아니었다. 쇠를 만드느라 비워 둔 논밭이었다. 수천만 농민이 용광로로 몰려간 사이 벼는 들판에서 썩었다. 의대 정원이 늘고 의대가 새로 생길 때마다 같은 일이 교육 현장에서 벌어진다. 의대 문이 넓어지면 가장 먼저 움직이는 것은 지방의 환자가 아니라 전국의 수험생이다. 이공계 대학의 상위권 학생들이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다시 수능을 본다. 지역인재 전형을 노리고 초등학생 때 지방으로 이사하는 가정이 생기고, 학원가에는 초등 의대반이 들어선다.
한 나라의 인재는 한정되어 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 기초과학을 맡아야 할 젊은이들이 한 직업을 향해 줄을 서면 다른 밭은 비게 된다. 의료 생태계를 살리겠다는 정책이 교육 생태계와 산업 생태계의 물까지 끌어다 쓰는 셈이다. 참새를 잡은 대가는 들판이 치렀고, 쇠를 얻으려던 대가는 논밭이 치렀다. 의사 수를 채우려는 대가는 이 나라의 교실과 연구실이 치르게 된다.
용광로를 서로 가져가겠다는 다툼
요즘 지역마다 공공의대와 신설 의대를 유치하겠다는 다툼이 한창이다. 남원, 목포와 순천, 안동, 창원, 공주, 군산이 차례로 손을 들었다. 범시민 추진위원회가 꾸려지고 궐기대회가 열린다. 같은 도(道) 안에서도 동부와 서부가 서로 자기 지역이어야 한다고 맞선다.
대약진 시절 마을마다 용광로를 세운 것도 같은 이치였다. 쇠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이웃 마을에 있는 것이 우리 마을에 없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의대 유치전에서 오가는 말도 다르지 않다. 그 지역에서 누가 가르치고, 학생들이 어느 병원에서 어떤 환자를 보며 배우고, 졸업한 뒤 왜 그곳에 남을 것인지는 묻지 않는다. 묻는 것은 어느 지역에 간판이 걸리느냐 뿐이다.
'의대 없는 지역'이라는 명분도 따져 볼 일이다. 전남에 의대가 없다고 하지만 광주에는 전남대 의대와 조선대 의대가 있다. 두 학교는 오랫동안 광주·전남의 의사를 길러 왔고, 전남대 의대는 화순에 캠퍼스와 병원을 두고 있다. 그들에게 없는 것은 의과대학이 아니라 가까운 곳의 응급실과 수술할 의사다.
의대 유치는 지역 정치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공약이다. 기공식에서 삽을 뜰 수 있고 현수막을 걸 수 있다. 그 의대가 낸 첫 전문의가 지역에 남는지 떠나는지는 10여 년 뒤에야 드러난다. 그때 공약한 사람은 그 자리에 없다. 선거의 시계는 4년이고 의사 양성의 시계는 10년이 넘는다. 이 시차가 효과를 따지지 않아도 되는 정책을 만든다. 지역 이기주의와 선거가 만나면 필요한 곳이 아니라 목소리 큰 곳에 용광로가 선다.
숫자가 아니라 물꼬다
의료는 생태계다. 물은 명령으로 흐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길을 억지로 만들면 물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게 된다. 물꼬를 터서 물이 필요한 곳으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의료의 물꼬는 이미 알려져 있다. 필수의료의 위험과 노고에 걸맞은 보상, 최선을 다한 진료가 형사처벌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법적 안전망, 지역 환자가 지역 병원을 믿고 찾게 하는 의료전달체계가 그것이다. 지금 지방에 남아 버티고 있는 의사들을 붙잡는 일이 그 무엇보다 먼저다. 의사는 건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강요된 소명은 있을 수 없다. 패망의 사회주의 포퓰리즘의 악몽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이명진(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공동대표, 성산생명윤리연구소 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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