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 모로
데일 모로.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일 모로의 기고글인 '세례는 상징도 주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조약이다'(Baptism isn't a symbol or a spell. It's a treaty)를 9월 1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데일 모로(Dale Moreau)는 성서학 학사(BA), 목회학 석사(MDiv), 성서신학 및 성경언어학 박사(PhD) 학위를 취득했으며, 30년 동안 목회자로 섬겼다. 또한 대학과 신학교에서 강의했으며, 55년 넘게 글을 써왔다. 그의 저술은 학술 문헌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현재 그는 서브스택(Substack)에서 ‘Theological Voice’를 운영하며, 목회자와 학자, 학생들을 위해 성경이 담고 있는 초자연적 세계관을 재조명하고 회복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기 전, 오늘날 우리가 거의 잊어버린 한 가지 행동을 했다. 그들은 돌아서서 자신들의 옛 주인을 향해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사탄아, 나는 너와 너의 모든 행위를 배격한다.”

이 고백을 한 뒤에야 그들은 세례를 받았다. 그들에게 세례는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적 전쟁 속에서 자신이 속한 진영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세례가 지닌 이러한 의미를 상당 부분 잃어버렸다. 현대 교회에서 세례는 흔히 두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로 이해된다. 한쪽에서는 세례를 개인의 내적인 신앙을 외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으로만 설명한다. 반대편에서는 특정한 말과 형식을 정확히 지켜야 효력이 발생하는 일종의 ‘마법적 의식’처럼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두 관점 모두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세례의 중요한 측면을 놓칠 수 있다. 세례는 단순한 상징도, 주문도 아니다. 그것은 충성의 맹세이며, 한 사람이 하나의 왕국에서 다른 왕국으로 넘어가는 결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의미를 놓치게 된 데에는 한 단어에 대한 오해가 자리하고 있다. 그 단어는 바로 ‘이름(name)’이다.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오늘날 우리는 ‘이름’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한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붙이는 호칭이나 표지를 떠올린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름은 권위와 명성, 지위와 임재를 나타낸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이름을 말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서 위임받은 권위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의미다.

십계명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계명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이름을 욕설처럼 사용하지 말라는 금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게 짊어지지 말고, 그 이름을 지니면서 하나님을 잘못 대표하지 말라는 의미까지 포함한다.

이스라엘은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짊어진 백성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지니고도 그분을 배반하고 잘못 나타내는 것은 심각한 죄였다.

이름은 단순한 명찰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이름을 지닌 분의 권위와 임재를 나타낸다. 이 사실을 이해하면 예수님의 세례 명령 역시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새로운 이름 아래 들어가는 것

예수님이 사용하신 “이름으로(into the name)”라는 표현은 고대의 상업 및 법률적 용례를 떠올리게 한다. 무언가를 다른 사람의 ‘이름 안으로’ 넣는다는 것은 그것의 소유권이나 책임 관계가 그 사람에게 속하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세례를 ‘그 이름으로’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세례식에서 특정한 이름을 발음하는 행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소속의 변화다. 한 권위 아래 있던 사람이 다른 권위 아래로 옮겨가는 일이며, 한 왕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른 왕국에 속하게 되는 사건이다. 말하자면 소유권의 이전이며 시민권의 변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초대교회의 세례 전통에서는 세례를 받는 사람이 사탄과 그의 일을 공개적으로 배격하는 장면이 나타났다.

새로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기 전에 이전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이다. 세례는 단순히 물에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이 아니라, “나는 더 이상 이전의 권세 아래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사건이었다.

옛 권세를 떠나 새로운 왕국으로

성경의 세계관에서 이러한 표현은 단순한 비유에 그치지 않는다. 성경은 열방과 인간 사회의 배후에 영적인 권세들이 존재한다고 묘사한다. 신명기 32장과 시편 82편은 타락한 영적 존재들과 열방의 관계를 보여주는 본문으로 자주 논의된다.

이 관점에서 죄와 죽음 아래 놓인 인간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 반역한 세계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신약성경 역시 구원을 ‘나라의 이동’이라는 언어로 묘사한다. 골로새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말한다(골 1:13).

바로 이 점에서 세례는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 세례는 한 사람이 흑암의 권세 아래 있던 삶을 떠나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사건이다.

말하자면 점령지를 빠져나와 국경을 넘는 행위와 같다.

“세례가 이제 너희를 구원한다”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면 베드로전서의 어려운 표현 역시 새로운 의미로 읽힌다. 베드로는 “세례가 이제 너희를 구원한다”고 말한다(벧전 3:21).

그러나 그는 즉시 세례가 단순히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즉 물 자체에 어떤 마법적인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구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베드로는 세례를 하나님을 향한 양심의 응답 혹은 서약과 연결한다. 이 구절에 사용된 표현은 번역에 따라 ‘간구’, ‘응답’, ‘약속’ 등으로 옮겨지지만, 중요한 것은 세례가 단순한 외적 세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곧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셔서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고 말한다(벧전 3:22).

이 두 이야기는 서로 무관하지 않다. 세례는 그리스도께서 물리치신 권세들을 떠나 승리하신 왕께 충성을 선언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세례의 능력은 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세례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언약적 사건이다.

왜 ‘이름’은 단수인가

마태복음 28장 19절에는 흥미로운 표현이 하나 더 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름’이라는 단수형을 사용하셨다.

이 표현은 세례를 단순히 세 인격의 이름을 나열하는 의식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보여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의 신적 권위와 정체성 안에서 나타난다.

세례를 받는 사람은 서로 다른 세 명의 소유주 아래 등록되는 것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하나 된 권위 아래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에게는 개인적인 이름이 없지 않느냐”는 식의 질문 역시 핵심을 벗어난다.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단순한 개인적 호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소유권, 임재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세례는 정확한 단어나 음절을 틀리지 않고 말해야 통과할 수 있는 암호가 아니다. 그것은 충성을 선언하는 언약적 행위다.

세례는 왕국을 바꾸는 사건이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받은 세례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했는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례는 단순히 몸에 물을 묻히는 통과의례가 아니다.

가족의 전통도 아니며,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체크리스트의 한 항목도 아니다. 그날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날이다. 이전의 왕국을 떠나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었음을 선포한 날이며, 그분의 이름 아래 들어가 그분께 충성을 맹세한 날이다.

세례를 단순한 ‘깨끗해짐’의 상징으로만 이해해서는 그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세례는 일종의 망명과 같다. 한 나라의 지배를 떠나 다른 나라의 시민이 되는 것이다. 포화를 뚫고 국경선을 넘어 이전의 권세를 뒤로한 채, 참된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이전의 삶과 권세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한 새로운 시민이다.

상징도 아니고 주문도 아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세례를 받기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때, 그것을 그저 익숙한 종교 의식으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또 어떤 특정한 말이나 방식 자체가 자동으로 구원의 효력을 발생시키는 마법적 행위처럼 이해해서도 안 된다.

그 장면에는 훨씬 더 큰 이야기가 담겨 있다. 한 사람이 어둠의 권세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이전의 충성을 버리고 새로운 왕께 충성을 맹세하는 모습을 보아야 한다.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이름 아래 들어가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한 인간을 보아야 한다.

세례 때 선포되는 말씀은 주문이 아니다. 그것은 언약의 언어다. 하나의 왕국을 떠나 다른 왕국에 들어간다는 선언이며, 옛 주권을 거부하고 새로운 왕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충성의 서약이다.

그리고 물에서 다시 올라온 사람은 이전과 같은 소속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이제 새로운 이름 아래 살아간다. 새로운 왕에게 속한 사람이다. 그 왕은 예수 그리스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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