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아담 둘리 박사의 기고글인 ‘우리는 가짜 하나님을 만들어내고 있는가? 사라져가는 경외심의 이유’(Are we inventing a fake God? Why reverence is dying)를 5월 2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둘리 박사는 테네시주 잭슨에 있는 잉글우드 침례교회의 목사이며 작가라도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2017년 세상을 떠난 故 R. C. 스프롤(R. C. Sproul) 신학자는 생전에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서 가장 큰 영적 필요는 하나님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10년 전보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에 더 깊은 찔림을 준다. 세상의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대놓고 거부하지는 않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그분을 재창조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기독교는 우리의 감각으로 다루기 쉬운 크기로 하나님을 계속해서 축소시키고 있다. 우리는 무대 뒤에 머무는 길들여진 신을 선호한다. 그가 우리를 우주의 중심이라 여겨 우리가 필요할 때만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신'은 우리의 지시에 따르기를 안달하며,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존재다.
그러나 이사야 6장은 이와 전혀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길들여지지 않고, 영광스러우며, 거룩함으로 불타오르는,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환상(사 6:1~4)을 통해 성경은 우리를 유일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의 독보적인 정체성과 직면하게 한다. 이 선지자적 환상은 우리의 감상적인 선호를 산산조각 낸다. 살아 계신 하나님은 우리의 야망이 제아무리 잘못된 길로 향하더라도 그저 응원만 해주는 '물 탄 마스코트' 같은 존재를 훨씬 뛰어넘는 분이시다.
이사야가 본 영광스러운 환상의 배경은 유다 국가에 찾아온 불확실성의 시기였다. 50년 넘게 통치했던 웃시야 왕이 죽고, 불안과 염려가 자리 잡은 거대한 공백이 남겨진 때였다(대하 26:3). 하지만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늘을 우러러보았을 때, 그는 주님께서 당황하시거나 안절부절못하시는 것이 아니라 흔들림 없이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모습을 보았다(단 4:34~35). 역사는 그분을 뒤흔들지 못한다. 악은 그분을 이기지 못한다. 미래는 결코 그분을 위협할 수 없다(사 46:9~10).
보좌 주위로는 천군 천사인 스랍들이 날며 서로 창화하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라고 노래했다(사 6:3).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에 대해 더 가볍게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그분을 '저 위에 계신 분'이나 인생의 코치, 심지어는 비행기의 부조종사 정도로 기꺼이 격하하려 한다. 그러나 이사야의 묘사는 그러한 경박함이 들어설 자리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요일 4:8), 스랍들은 "사랑, 사랑, 사랑"이라 외치지 않았다. 주님은 인애를 기뻐하시지만(미 7:18), "자비, 자비, 자비"라고 부르짖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가장 온전히 담아내는 단 하나의 속성을 선택했다. '거룩'은 수많은 목록 중 하나의 특성으로 하나님 곁에 나란히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함은 그분께 수반되는 모든 영광과 위엄과 더불어 하나님을 정의하는 것이다(레 11:44~45, 삼상 2:2, 시 99:3, 5, 9).
그 반복조차 중요하다. 세 번에 걸친 선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강조점이다. 우리 하나님은 견줄 자도 없고 동등한 자도 없는, 그분만의 고유한 영역에 계신 분이다. 이 장면은 여호와의 두려운 임재로 인해 산이 진동하고 옹기 가마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던 시내산을 떠올리게 한다(출 19:18).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거룩함은 몹시도 무겁고 엄위한 것이기에, 그 누구도 그분의 임재 앞에 거들먹거리며 나아갈 수 없다.
이사야 역시 결코 그러지 못했다. 스스로 의롭다는 모든 착각을 꿰뚫는 고백과 함께 그는 탄식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5). 그의 죄에 대한 그 어떤 변명이나 축소도 없음에 주목하라. 거룩함은 하나님께서 악과 철저히 분리되어 계심을 의미한다. 악은 그분을 부패시킬 수 없다. 우리 죄악의 어둠은 그분의 순결한 빛과 아무런 사귐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품을 수는 없다.
비극적이게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언급 없이 그분의 사랑만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려는 현대의 노력들은 정작 우리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그 은혜마저 상실하게 만든다. 그러나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가장 잘 증명하는 증거는 우리의 어긋남을 긍정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시는 데 있다. 비록 우리가 전에는 허물로 죽었고 이 세상의 풍조를 따랐지만, 하나님은 예수님과 함께 우리를 살리셨다(엡 2:1~5). 그리스도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끔찍한 불순종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 죽으셨다.
겸손히 엎드린 가운데, 이사야는 훗날 수많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스스로 깨닫게 될 사실을 경험했다. 스랍 중 하나가 제단에서 핀 숯을 가져와 선지자의 입술에 대었을 때 그의 악이 제하여졌다(사 6:6~7). 바로 그 안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전하는 동일한 복음의 그림이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주도권을 쥐셨다는 점에 주목하라. 숯은 소멸하시는 하나님의 불이 우리의 수치를 씻어내는 희생 제단에서 가져온 것이었다(신 4:24, 히 12:29). 주님은 죄와 타협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죄를 멸하신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이사야의 죄책을 그 제물로 전가시켜 그분의 거룩한 진노를 만족시키셨다. 그와 동시에 당신의 종을 은혜와 용서로 덮어주셨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도 동일한 자비가 주어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분께 전가하심으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사 53:5~6).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사 53:5).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가 되신 것은 주님께서 우리의 반역을 기꺼이 품으려 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고후 5:21).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것은 우리의 죄를 눈감아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함이었다(요 3:16).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가? 그분은 나와 여러분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죽음에 내어주실 만큼 거룩하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들이 부족하지 않다. 정작 결여되어 있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다(롬 3:18). 많은 이들이 거룩함이라는 개념을 비웃는다. 또 다른 이들은 현실을 아예 자기 입맛대로 다시 쓴다(사 5:20).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무조건적인 긍정만을 요구하며, 자신들과 다른 의견은 징벌해 버린다. 감사하게도 우리 하나님은 이 타락한 시대에 휘둘리거나 장단을 맞추지 않으신다. 그분은 최후의 심판과 승리가 당신께 있음을 아시며, 권능과 능력으로 그분의 보좌에서 영원히 다스리신다(시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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