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크리치 목사
마크 크리치 목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예수님이 말한 ‘심령이 가난한 자’, 정말 어떤 사람일까?"(Who are the 'poor in spirit' according to Jesus? It's not who you think)을 5월 1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예수님은 현대의 사고방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으로 산상수훈을 시작하신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언뜻 보기에 이 말씀은 낯설게 들린다. 우리는 보통 '복'을 '가난'과 연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힘, 자신감, 성공, 자존감, 자급자족과 같은 것들을 축복이라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묘사하시며 승리가 아닌 '파산'으로 그 첫 문을 여신다. 물질적 파산이 아니라 영적인 파산 말이다.

오늘날 이러한 구분은 매우 중요하다. 최근 몇 년 동안 많은 진보적 기독교 지도자들은 물질적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을 복음의 핵심 관심사로 강조해 왔다. '빈민 캠페인(Poor People’s Campaign)'의 윌리엄 바버 2세(William Barber II), 라파엘 워녹(Raphael Warnock) 상원의원, 짐 월리스(Jim Wallis), 고(故) 토니 캄폴로(Tony Campolo)와 같은 인물들, 그리고 제임스 탈라리코(James Talarico)와 같은 젊은 진보 종교인들은 기독교를 주로 사회 정의, 경제 개혁, 의료 접근성, 임금, 주거 및 정치적 행동주의의 관점에서 규정한다. 그들은 마치 교회의 주된 사명이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것인 양 말하곤 한다.

분명히 해 둘 것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한다. 성경은 궁핍한 자들을 향한 긍휼과 관대함, 자비를 반복해서 촉구한다. 고통받는 이들에게 무관심한 교회는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가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조건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영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인류의 핵심적인 문제는 궁극적으로 정치적 억압이나 낮은 임금, 부의 불평등한 분배가 아니다. 핵심 문제는 바로 '죄'다. 복음은 사회 개혁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복음은 영적인 파멸에서부터 시작된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완전한 도덕적, 영적 파산 상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교만과 자기 의, 도덕적으로 온전하다는 모든 환상을 벗어버리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성, 종교적 행위, 정치적 성향, 선의, 자선, 심지어 신학적 지식까지도,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낼 수 없음을 철저히 깨닫는 것이다.

위대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신칭의(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음)'라는 성경적 교리를 발견하기 전, 그는 영적인 고통 속에 살았다. 루터는 끊임없이 금식하고, 잠을 줄였으며, 고해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데 끝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충분히 자신을 훈련하고, 고통받고, 기도하며, 종교적 의무를 다한다면 마침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소진될 정도로 거룩함을 추구했다.

후에 루터는 이렇게 유명한 말을 남겼다. "수도사가 수도 생활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의 죄성을 더욱 뼈저리게 깨달을 뿐이었다. 그의 어떤 종교적 열심도 양심을 잠재우지 못했다. 어떤 노력도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문제는 단지 루터가 죄를 '지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철저히 파산한, 본질적인 '죄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마침내 선한 척하는 것을 멈춘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영적 이력서를 내미는 것을 중단하고, 선행과 도덕적 성취로 그분과 거래하려는 시도를 멈춘다.

그들은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던 예수님의 비유 속 세리와 같다(누가복음 18:13).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교만한 자들이 결코 알지 못하는 진리를 깨닫는다. 구원은 자격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긍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참으로 놀랍게도, 예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 진정으로 복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왜 그럴까? 오직 빈손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파산한 자만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구하게 된다. 천국은 자기 확신에 찬 자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긴 채 영적으로 깨어진 자들의 것이다.

사람이 심령이 가난해지면, 즉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파산을 진정으로 깨닫게 되면, 필연적으로 뒤따르는 것이 있다. 바로 '애통함'이다.

이것이 두 번째 팔복이 자연스럽게 첫 번째 팔복 뒤에 오는 이유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태복음 5:4).

물론 하나님은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시지만,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일차적으로 평범한 슬픔이 아니다. 주님은 '죄로 인한 슬픔'을 말씀하고 계신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더 이상 죄를 변명하거나, 축소하거나, 합리화하거나, 웃어넘기지 않는다. 그는 죄가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모독이자 범죄임을 깨닫기에 애통해한다.

거의 50년 전, 필자가 대학을 가기 위해 집을 떠난 후, 어머니는 고향 집에서 있었던 일화 하나를 들려주셨다. 여동생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침실에 전화기를 놓아달라고 졸랐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었다. 모든 전화는 유선이었고 장거리 전화 요금은 꽤 비쌌다. 십 대 소녀가 자신만의 개인 전화선을 갖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사치였다.

딸바보였던 아버지는 한 가지 확고한 조건을 달고 이를 허락하셨다. 반드시 책임감 있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 달 후 전화 요금 청구서가 날아왔고, 그 금액은 엄청났다. 여동생이 어마어마한 장거리 통화 요금을 발생시킨 것이다. 아버지는 동생을 엄하게 꾸짖으며 규칙을 다시 상기시키고 경고하셨다. 동생은 울면서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동생은 또다시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그리고 세 번째로 다시 똑같은 일을 벌였다. 두 번째 잘못까지 아버지는 놀라운 인내와 은혜를 보여주셨다. 하지만 세 번째는 달랐다. 아버지는 동생을 마주하고서 불같이 화를 내는 대신 눈물을 글썽이셨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니?" 아버지가 물으셨다. "어떻게 아빠의 호의를 이토록 무시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정녕 모르겠니?"

이번에 동생이 흘린 눈물은 전과 달랐다. 단지 잘못을 들켰거나 벌을 받을까 두려워 운 것이 아니었다. 동생은 처음으로 자신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보았기에 소리 내어 울었다.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단지 결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잘못 자체를 애통해했다. 그날 이후로 동생은 다시는 그 특권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잘못이 진정 무엇인지, 곧 '사랑에 대한 배신'임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묘사하시는 애통함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는 죄를 단순한 실패나 연약함, 혹은 부끄러움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향한 뼈아픈 배신이자 범죄로 여기는 슬픔이다.

저명한 전도자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은 과거 감리교회에 있던 '애통하는 자의 자리(mourner’s bench, 회개석)'가 다시 돌아오기를 갈망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저서 《불타는 세계(World Aflame)》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이들은 옛 회개석을 떠올립니다. 그 회개석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 많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옛 감리교회의 회개석에서 겪었던 바로 그 경험입니다. 회개는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러운 경험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회개석은 단지 감정을 쏟아내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곳은 찔림(자각)과 고백, 회개와 은혜의 자리였다. 예수님은 그러한 애통함이 무언가로 이어지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진정한 회개와 용서, 씻음,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로 이어진다.

오늘날 죄에 대한 진정한 애통함을 찾아보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아마도 많은 교회가 영적인 찔림을 값싼 위로와 맞바꾸고, 회개를 세상적 대중성과 맞바꾸었으며, 거룩함을 오락과 맞바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곳에서 이제 예배는 거룩한 성회라기보다 콘서트에 더 가까워졌다. 조명은 어두워지고, 스모그 머신이 작동하며, 음량은 높아진다. 감정은 고조될지 모르나, 하나님의 임재가 다가올 때 영혼이 느끼는 그 고요함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의문이 든다. 설교 역시 대부분 행복, 성공, 인간관계, 자아실현에 관한 내용이다. 이러한 주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거의 언급되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죄의 심각성이 사라진다면, 교회는 제자를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 소비자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들은 기분은 좋아지지만 자아가 깨어지지는 않으며, 영감은 받지만 삶이 변화되지는 않는다. 황홀한 경험에 대한 커져가는 매료조차도 성경으로 시험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이 진정으로 능력 있게 역사하실 때, 사람들은 단지 감각에 압도되는 것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러진다. 그들은 찔림을 받는다. 그들은 회개한다. 그리고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경험하기 전에, 먼저 죄에 대한 찔림(자각)이 있어야 한다. 참된 기쁨이 있기 전에, 회개의 애통함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약속은 참으로 아름답다. 죄를 애통해하는 자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은 긍휼과 십자가를 통한 용서로, 그리고 비록 우리의 죄가 많을지라도 그분의 은혜가 더욱 크다는 확신으로 상한 죄인을 위로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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