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존스 목사
샘 존스 목사.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샘 존스 목사의 기고글인 '기독교가 본질적으로 공적인 신앙인 이유'(Why Christianity is public faith by design)를 4월 2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샘 존스 목사는 아이오와주 험볼트에 위치한 어번던트 라이프 크리스천 펠로우십(Abundant Life Christian Fellowship)에서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으며 저자로도 활동 중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현대 기독교는 하나의 모순을 받아들인 듯 보인다. 우리는 신앙이 매우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공적인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강하게 거부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심을 고백하면서도 그분을 개인의 내면 영역 안에만 가두려 한다. 우리는 삶의 변화를 설교하면서도 그 변화가 사회와 공적 삶에 영향을 미칠 때는 불편해한다.

이러한 형태의 기독교는 예의 바르고 안전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기독교와는 거리가 멀다. 기독교는 결코 사적인 신앙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사도행전 17장과 공적인 복음

사도행전 17장은 초대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바울은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개인적인 영성 속으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메시지를 종교적 모임 안에만 제한하지도 않았고, 문화적으로 더 편안한 시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그는 회당에서 토론했고(행 17:17), 시장에서 사람들과 대화했으며(행 17:17), 아레오바고에서 철학자들 앞에 섰고(행 17:19-22), 고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도시 중 하나였던 아테네의 시민적·지적 중심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생각하며 논쟁하고 결정을 내리는 바로 그 자리, 공적 삶의 중심으로 복음을 가져갔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이 받았던 비난은 그들이 개인적으로 믿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공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렀다”(행 17:6).

이 말은 모욕이 아니라 복음이 사과 없이 선포될 때 나타나는 실제 결과를 보여주는 정확한 표현이었다. 기독교는 숨기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뒤흔든다.

사적인 신앙이라는 거짓말

종교는 철저히 개인적인 영역에만 속해야 한다는 생각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대 정치 문화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지난 약 200년 동안 서구 문화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지속적인 메시지를 통해 기독교인들을 침묵하도록 훈련해 왔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니 혼자 간직하라.”, “공적인 논쟁에 성경을 가져오지 말라.”, “신앙을 정치, 윤리, 법과 연결하지 말라.”, “누군가 불편해할 수 있는 자리에서 신념을 드러내지 말라.”

그러나 이러한 규칙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단지 개인의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고 선언하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마 28:18).

이 선언은 지상명령의 기초이며 분명히 공적인 선언이다. 사적인 주님은 참된 주님이 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면 그분의 권세는 내면의 영역에만 제한될 수 없다.

공적인 진리를 요구하는 공적인 주장

기독교는 본질적으로 공적인 주장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창 1:1),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사실(고전 15:3-4), 도덕이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객관적 기준을 가진다는 사실(롬 2:14-15), 심판이 실제로 존재하며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행 17:31),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있다는 사실(행 4:12).

이러한 주장들은 개인적인 의견에 머물 수 없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 자체를 설명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실제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면, 그 사실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은 단순한 취향이나 관점이 아니다. 그리고 도덕 법칙이 실제라면 그것은 개인의 영혼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적용된다. 진리는 문화가 원한다고 해서 주관적인 영역으로 조용히 물러나지 않는다.

공적인 신앙이 불편함을 주는 이유

공적인 기독교가 불편함을 주는 이유는 현대 사회가 매우 소중히 여기는 가정 하나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은 선택 사항이고 진리는 협상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바울의 메시지가 문제가 되었던 이유는 그의 태도가 무례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상대의 시를 인용하며 사려 깊게 대화했다(행 17:28). 그러나 그의 메시지는 권위와 정체성, 그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도전했다.

그는 우상숭배를 지적했고(행 17:29-30), 도덕적 무지를 드러냈으며(행 17:30), 철학적 체계를 흔들었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심판의 확실성을 선포했다(행 17:31).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공개적으로, 헬라 문화의 중심에서 행했다.

초대교회가 박해를 받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들은 단지 다른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해를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믿는 바를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로가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에게 던진 이유는 그들의 개인적 경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왕께 충성을 공개적으로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침묵이 만들어내는 거짓 평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와 예의를 이유로 공적인 신앙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침묵은 평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환상을 유지할 뿐이다.

신앙이 공적 영역에서 물러날 때 다른 세계관들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모든 사회는 하나님, 인간, 도덕, 목적에 대한 어떤 믿음 위에 세워진다. 문제는 어떤 믿음이 사회를 형성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묻는다: “기초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시 11:3).

의인은 기초가 무너지는 것을 방치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기독교가 공적 영역을 포기한다면 거짓된 생각들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된다. 침묵은 교회를 더 사랑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의미를 잃은 교회는 안전한 교회가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 교회이다.

그리스도의 주권은 전 영역에 미친다

기독교가 공적인 신앙인 이유는 그리스도의 주권이 전 영역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분은 교회 예배와 개인 경건, 사적인 도덕에만 주권을 가지시는 분이 아니다. 진리와 법, 문화와 국가, 역사 전체 위에 주권을 가지신다.

이사야 선지자는 “정사가 그의 어깨에 메여졌다”(사 9:6)고 말했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함께 서 있다”(골 1:17)고 선언했다. 일부 영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이다.

그리스도를 주님이라 고백하면서 공적 영역에서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모순이다. 왕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 그의 나라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실을 이해했다. 초기 미국 사회를 형성한 청교도들도 이해했다. 노예제 문제를 공적 영역으로 끌어낸 폐지론자들도 이해했다. 그들은 신념을 숨김으로써 세상을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화를 이끌었다.

교회 앞에 놓인 선택

교회는 자신이 고백하는 내용을 실제로 믿고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 기독교가 진리라면 그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시장과 법정, 학교와 정치 영역에서도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면 그분이 다스리지 않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이 사람을 구원한다면, 멸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전해져야 한다.

사도행전 17장은 침묵하는 교회를 허용하지 않는다. 세상을 뒤흔든 신앙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가 그어 놓은 경계를 거부했기 때문에 세상을 변화시켰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공적인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 선언을 맡은 교회는 그것을 속삭일 권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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