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영원한 지옥이 불공평하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If eternal Hell seems unfair, you may be asking the wrong question)를 4월 1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기독교계에서는 커크 카메론(Kirk Cameron)이 전통적인 지옥 교리에 대해 불편함을 표현한 이후 적지 않은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그의 문제 제기는 새롭지도, 불성실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쉽게 드러내지 못했던 질문이기도 하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유한한 인생 동안 지은 죄에 대해 영원한 형벌을 내리실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질문은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우리의 공정성에 대한 감각에 호소하며 인간적으로도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질문은 종종 간과되는 더 깊은 전제를 담고 있다. 그것은 죄를 실제보다 작은 문제로 여기고, 죄책을 제한된 것으로 판단하며, 정의를 단순히 시간의 길이로 측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예수님은 바로 이 문제를 마태복음에 기록된 한 비유에서 다루신다(마태복음 18:23-35).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오는데, 그가 진 빚은 무려 만 달란트에 달했다. 이는 계산 가능한 금액이 아니라 그 규모를 체감하도록 하기 위한 표현으로, 사실상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의미한다.
그런데 왕은 놀라운 일을 행한다. 그 빚을 대신 감당하고 그를 자유롭게 풀어준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두운 방향으로 전개된다.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은 그 종은 밖으로 나가 자신에게 훨씬 적은 금액을 빚진 동료를 붙잡는다. 그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30절) 감옥에 가둔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는 빚을 갚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의 행동은 더욱 잔인하게 보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크게 분노한다. 그는 그 종을 “악한 종”(32절)이라 부르며 이전에 탕감해 주었던 빚을 다시 갚게 하고, “빚을 다 갚도록”(34절) 그를 형벌 받는 자들에게 넘긴다.
이야기의 끝에서 예수님은 엄중한 말씀을 덧붙이신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35절).
이 비유는 단순히 친절과 용서를 가르치는 교훈이 아니다. 영원한 현실을 보여주는 창이다.
처음에 탕감되었던 빚은 자비를 거부했을 때 다시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되었다.
현대의 반론이 흔히 놓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문제는 형벌의 기간만이 아니다. 문제는 죄의 본질이다.
죄는 단순히 규칙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격과 권위, 거룩하심, 그리고 영원한 주권자이자 왕으로서의 정당한 위치에 대한 반역이다.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시편 51:4)라고 고백했다. 죄의 심각성은 단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 범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한한 존재가 아니라 무한하신 분이다.
만일 죄의 빚이 그리스도를 통해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죄인이 결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비유 속 종처럼 그는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감당해야 하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책임을 져야 한다. “다 갚을 때까지”라는 표현은 해방으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라 결코 끝나지 않는 형벌을 의미한다.
Erwin Lutzer 는 『One Minute After You Die』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만일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의 크기가 그것이 범해진 대상의 위대함에 의해 결정된다면 어떠할까? 그렇다면 죄의 죄책은 무한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한하신 존재의 성품을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본질상 그러한 무한한 죄는 무한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질 수 있다. 누구도 갚을 수 없는 형벌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취향에 맞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성경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지옥은 형벌이 지나치게 길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갚아야 하지만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의 결과다.
또한 문제는 이 땅에서 지은 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심판 이후에도 인간의 마음 상태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성경은 불의한 자들이 지옥에 던져질 때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마태복음 8:12 등)이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는 이유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잃어버린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를 간다는 표현은 하나님과 그분의 공의를 향한 분노가 계속된다는 의미다.
그곳에는 진정한 회개가 없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그분의 뜻에 대한 순종도 없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살아 있을 때와 동일한 상태로 남게 되며, 단지 그 상태가 영원히 고정될 뿐이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상태는 끝나지 않고 계속된다. 변화와 회개, 구원의 기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반역은 약해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
다시 말해 지옥의 불은 단지 일생 동안 지은 죄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 계속해서 반역하는 영혼의 상태 때문에 타오른다. 심판은 과거에 행한 일 때문만이 아니라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상태 때문이기도 하다. 죄인은 진정한 통회로 돌아서지 않으며, 하나님을 거부한 상태가 영원히 지속된다.
지옥이 영원한 이유는 반역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심판을 경고하는 이 비유는 놀라운 자비의 행동으로 시작된다. 왕은 전액을 대신 갚아주며 완전한 새로운 출발을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빚의 크기가 아니라, 베풀어진 은혜를 무시하고 거절한 태도였다.
기독교 메시지의 영광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는 빚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갚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지셨다. 그리고 그분의 부활은 그 빚이 완전히 청산되었음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증거다. 십자가는 단순한 사랑의 본보기도, 한 종교인의 순교 사건도 아니었다. 그것은 공의가 이루어진 사건이었고, 빈 무덤은 하늘이 발행한 영수증이다.
그러므로 지옥에 대한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완성된 사역과 분리될 수 없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아들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무한한 죄를 속죄하셨다면, 죄의 문제는 충분히 해결된 것이다. 그분이 죽음에서 살아나셨다면, 하나님과의 분리와 죽음은 결정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용서는 값없이 주어지고,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생명이 약속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한다면, 그 빚은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으며 결국 그 은혜를 거부한 사람이 직접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영원히 계속된다.
결국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지옥이 지나치게 가혹한가가 아니다. 모든 빚을 완전히 없애 주는 놀라운 자비를 우리가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다. 결론적으로 누구도 자신의 죄가 너무 커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값 주고 마련된 용서를 거부하기 때문에 잃어버린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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