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 맥글로틀린
제리 맥글로틀린 CEO.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제리 맥글로틀린의 기고글인 ‘성적 죄 이후, 목회자는 언제 회복(복직)되어야 하는가?’(When should a pastor be restored after sexual sin?)을 15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제리 맥글로틀린은 헌정 공화국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헌신하는 게스트를 대변하고 유대-기독교 윤리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한 홍보 기관인 스페셜 게스트(Special Guest)의 CEO로 재직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교회가 은혜와 진리 모두에 얼마나 충실한지를 가장 날카롭게 시험하는 질문 중 하나는, 목회자가 성적 죄에 빠졌을 때 교회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최근 몇 년간 기독교 공동체는 두 극단 사이를 오가곤 했다. 한쪽에서는 영구적인 자격 박탈을 주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성급한 복직을 시도한다. 그러나 이 두 접근 모두 성경의 온전한 가르침을 반영하지 못한다.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가르침은 단호하다. 베드로가 자신에게 죄를 짓는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마태복음 18:22)고 답하셨다. 누가복음에서는 그 말씀을 더욱 분명히 하신다. “만일 그가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누가복음 17:4). 즉, 용서는 횟수나 심각성, 타이밍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하루 안에 반복되는 회개조차도 용서를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용서와 지도자의 복직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용서는 관계를 회복하지만, 리더십은 권위를 맡기는 것이다. 이 두 범주를 혼동한 결과, 교회는 깊은 상처를 입어 왔다. 회개한 지도자를 끝없는 처벌로 짓누르거나, 반대로 회중을 불필요한 위험에 노출시키는 일이 반복되었다. 성경은 은혜와 책임을 함께 붙들되, 둘을 하나로 무너뜨리지 않는다.

목회자가 더 엄격한 기준으로 판단받는 이유는 그들이 영적 권위를 지니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야고보서 3:1).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서 제시하는 감독의 자격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절제하며”, “신실한” 사람일 것을 강조한다. 이는 무죄한 완전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성과 성숙함, 도덕적 신빙성을 요구하는 기준이다.

성경은 또한 ‘넘어짐’과 ‘패턴’ 사이를 분명히 구분한다. 넘어짐은 심각한 도덕적 실패이지만, 고백과 회개, 그리고 징계와 책임의 과정을 거치는 사건이다. 반면 패턴은 반복, 악화, 속임, 교정에 대한 저항, 혹은 권위 남용으로 특징지어진다. 성경은 이 둘을 전혀 다르게 다룬다.

다윗은 간음과 살인을 저질렀다. 그 죄는 극히 중대했다. 그러나 책망을 받았을 때 그는 깊이 회개했고 하나님의 심판에 자신을 맡겼다. 평생의 결과를 짊어져야 했지만, 그는 회복되었다. 반면 사울은 반복적인 불순종과 자기합리화를 보였고 결국 왕권을 잃었다. 차이는 단지 행위가 아니라, 책망에 대한 반응 속에서 드러난 인격의 방향이었다.

참된 회개는 눈물만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바울은 경건한 근심이 만들어내는 열매로 간절함, 변명하지 않으려는 태도, 죄에 대한 분노,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 인내를 언급한다(고린도후서 7:11). 진정한 회개는 결과를 받아들이고, 권력을 내려놓으며, 징계에 순복하고, 시간이 지나며 열매가 검증되도록 허용한다. 강단으로 서둘러 돌아가려는 사람은 변화보다 직분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과도한 처벌과 성급한 복직 모두를 경계한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면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그가 지나친 근심에 삼켜져 사탄에게 틈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린도후서 2:7–11). 그러나 같은 사도는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디모데전서 5:22)고 경고한다. 회복은 즉각적인 반응이 아니라, 신중한 분별의 과정이어야 한다.

동시에 양 떼를 보호하는 일, 특히 연약한 자들을 지키는 일은 결코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은 양을 해치는 목자들을 책망하셨고(에스겔 34장), 예수님은 어린 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마태복음 18:6). 그러므로 성적 비행, 착취, 권위 남용의 패턴을 보이는 사람은 말로 회개를 고백하더라도 다시 권력의 자리에 세워져서는 안 된다. 용서는 교회의 보호 책임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여기서 교회가 직면해야 할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이 있다. 이 글을 읽는 거의 모든 사람은 생각, 말, 혹은 행동으로 어떤 형태의 성적 죄를 범한 적이 있다. 예수님은 음욕을 품는 마음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마태복음 5:27–28). 성적 죄가 이처럼 보편적이기에, 이에 대한 반응은 종종 감정적으로 과열된다. 역사와 목회 경험은, 가장 격렬하게 정죄하는 이들 중 일부가 오히려 자기 안의 숨겨진 죄와 마주하기를 가장 꺼리는 경우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무의식중에, 자신을 고발하는 내면의 양심을 잠재우기 위해 판단을 외부로 투사하기도 한다.

이 사실은 죄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러나 판단에는 반드시 겸손이 동반되어야 함을 일깨운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징계의 목적은 도덕적 우월감이 아니라, 진리에 기초한 회복과 보호이다.

따라서 성경적 기준은 지혜를 무시하는 감상적 은혜도 아니고, 구속을 부정하는 무자비한 정죄도 아니다. 성적 죄가 약탈적이지 않았고, 회개가 진실하고 지속적이며, 징계가 실제로 이루어졌고, 충분한 시간이 지나 검증이 가능하며, 책임 구조가 마련되고, 일관된 열매가 확인될 때 목회자는 사역으로 회복될 수 있다. 반대로 성적 죄가 반복적이거나, 회개가 피상적이거나, 속임이 지속되거나, 권위가 남용되었거나, 다른 이들이 여전히 위험에 놓여 있다면 회복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잔인함이 아니라 신실함이다.

복음은 용서를 요구한다. 그것도 같은 날 반복되는 회개에 대해서까지. 그러나 복음은 용서가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다시 권위의 자리로 돌려놓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은혜는 죄인을 회복시키고, 지혜는 권력을 맡기는 방식을 다스린다.

교회가 용서와 리더십을 하나로 무너뜨릴 때, 양 떼를 위험에 빠뜨리거나 구속의 능력을 부인하게 된다. 그러나 두 가지를 함께 붙들 때, 은혜와 진리는 나란히 걷게 된다.

궁극적인 질문은 타락한 목회자가 용서받을 수 있는가가 아니다. 성경은 그 질문에 이미 분명히 답했다. 진짜 질문은, 그 목회자를 다시 지도자로 세우는 일이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진정한 회개를 반영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보호하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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