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우리가 복음으로 오해하는 약속’(The promise we mistake for the Gospel) 1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오래전, 필자는 지금까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눈부신 그리스도인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의 삶을 지켜본 적이 있다. 정말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였고, 탁월한 아내이자 사랑받는 어머니였으며, 본인 스스로는 미처 다 알지 못했을 만큼 넓은 영향력을 끼친 성경 교사였다. 말 그대로 현대판 잠언 31장의 여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녀는 암 진단을 받았다. 누구나 예상하듯, 그녀는 매우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해 오던 사람이었기에 그 진단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교회는 그녀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고, 치유를 위한 기도가 밤낮없이 이어졌다. 그녀 역시 닥쳐오는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비록 육체적 상태는 점점 악화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필자를 포함해 그 누구도 나쁜 결말을 예상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의사가 그녀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한 날이 왔다. 그녀는 의사의 말을 차분히 들은 뒤, 평소의 그녀다운 태도로 그 예후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신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흘 뒤,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필자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다. ‘이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안전하지 않다면, 우리 중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그 생각은 필자를 깊은 두려움에 빠뜨렸다.
어떤 이들은 이런 반응을 두고 믿음이 부족하다고 나무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달치 월급을 걸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 역시 인생의 어느 순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발밑의 바닥이 갑자기 꺼져 버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해를 입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확신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말이다.
우리 문화의 분위기 역시 이런 불안을 키운다. 우리는 안전에 집착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감정적·재정적·신체적·사회적·심리적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라고 배운다. 좋은 삶이란 보호받는 삶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과연 평안한가? 교회 안에서도 불안 장애는 증가하고 있고, 외로움은 만연하며, 우울과 절망은 연령과 이념, 경제적 계층을 가리지 않고 퍼져 있다. 그 어느 세대보다도 많은 외적·내적 안전장치를 구축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깊은 불안 속에 있다.
팀 켈러는 이러한 상태를, 마치 영화 「죠스」의 배경음악이 하루 종일 귀에 울리고, 우리는 언제 나타날지 모를 상어 지느러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필자 역시 그런 감정을 수도 없이 느껴왔다.
성경을 진지하게 읽어 온 이들이라면, 기독교가 이 모든 문제에 대해 불편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기독교는 우리가 흔히 머릿속에 그리는 방식의 ‘안전한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지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감정적으로나 실제 삶에서는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안식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복음이라고 착각해 온 약속 때문이다. 곧 기독교란 삶을 더 쉽고, 더 평온하며, 더 안전하게 만들어 주는 종교라는 생각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도 때때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필자 역시 그렇다.
그러나 고난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우리의 믿음은 시험대에 오르고, 두려움은 커진다. 이어서 ‘기독교가 참이라면, 나는 왜 이렇게 두려운가’라는 자책감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하는가? 집 안의 온도조절기를 고정해 놓듯,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한 번의 영적 돌파로 영구 설정해야 하는가?
두려움이 밀려올 때 필자에게 오랫동안 도움이 되어 준 것은 히브리서 11장의 한 대목으로 돌아가는 일이었다. 4절부터 35절까지는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이 경험한 놀라운 승리들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기대하고, 솔직히 말해 누리고 싶어 하는 바로 그런 승리들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들은 같은 유형의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일들이 일어났음을 보여준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의 굴에서 유리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느니라”(히 11:36–39).
이 구절들이 필자의 두려움을 처음으로 들어 올려 준 순간은, 첫 번째 아내가 매우 젊은 나이에 희귀한 갑상선암으로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그녀 역시 앞서 언급한 그 여성처럼 모든 이에게 사랑받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끔찍한 일들을 겪었다.
필자는 어두운 침실에 홀로 앉아 있으면서, 이 세상에는 어떤 안전망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했다. 그리고 그때, 어쩌면 기독교가 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기독교가 참이라면, 내가 왜 이렇게 홀아비가 되어 앉아 있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 진리는 가장 필요했던 순간, 필자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성경 속 주요 인물들이 모두 상처 하나 없이 인생을 살아가다 엘리야처럼 불말을 타고 하늘로 들려 올려졌다면, 필자는 성경을 쓰레기통에 던졌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삶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지 않는다. 성경은 정반대를 보여주며, 하나님을 우리의 편안함만을 최우선으로 관리하는 우주적 위험 관리자처럼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하나님은 깨어진 세상 속으로 직접 들어와 고난을 피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분이 아니라, 고난을 통과하여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구속자로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안전을 약속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요 16:33)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 상징은 방패가 아니라 십자가이다.
기독교적 소망이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언제나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한걸음 물러서서 다시 정리하고, 고난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받아들이게 한다. 고통 자체가 선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것을 구속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참된 소망이 보호 속에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단련 속에서 빚어지며, 어둠 속에서 태어나 이 생을 넘어선 곳에 닻을 내린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안전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속을 약속한다. 그리고 그 약속은 순교자와 애통하는 이들, 그리고 여러분과 필자 같은 평범한 신자들을 세상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순간들 속에서도 견디게 해 왔다.
안전에 목말라 있는 문화 속에서, 복음은 더 나은 것을 제시한다. 삶이 무너질 때에도 함께 무너지지 않는 소망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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