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하 강해(60)-삼하 15:1~37

이태희 목사
9월 21일 그안에진리교회 주일예배에서 설교하는 이태희 목사 ©그안에진리교회

1. 서론: 압살롬의 반역 사건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15장은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왕권을 찬탈하려 했던 반역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마음 속에 아버지 다윗에 대한 불평 불만을 선동하는 한편, 아름다운 외모와 친절한 말, 그리고 따뜻한 제스처로 다윗을 따르던 백성들의 마음을 훔쳤습니다. 결국, 그는 헤브론으로 내려가 사람들을 모으고, 자신의 부하들을 각 지파에 보내어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심지어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도 압살롬 편에 가담하면서, 그의 반역은 더욱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다윗은 신하들과 가족들을 데리고 급히 왕궁을 떠나 눈물을 흘리며 압살롬의 군대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다윗에 대한 압살롬의 반역은 단순한 가정사의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향한 도전이자,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위는 단순한 인간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신 구속사의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 왕위에 대한 압살롬의 반역 사건은 단순한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공격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어둠의 권세의 영적인 공격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압살롬의 반역 사건은 태초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의 문명사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빛의 권세와 흑암의 권세, 하나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사이의 영적 전쟁을 그대로 비추어 주고 있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본론: 찰리 커크의 암살 사건을 통해 바라본 문명사의 전쟁

(#1) 최근 미국에서 일어난 찰리 커크의 암살 사건은, 단순히 한 젊은 지도자의 죽음이 아니라, 오늘날 문명사의 전선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 전쟁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2025년 9월 10일, 미국 유타주 오렘(Orem)에 있는 유타 밸리 대학교(Utah Valley University, UVU) 캠퍼스에서 “터닝포인트 USA”의 설립자이자 대표였던 찰리 커크(Charlie Kirk, 31세)가 연단에서 연설하던 중 암살당했습니다. 암살범은 이 학교에 재학 중이던 22세 청년 타일러 로빈슨(Tyler Robinson)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는 트랜스젠더와 동거하고 있었으며, 스펜서 콕스 유타주 주지사의 발표에 따르면 좌익 이데올로기에 깊이 세뇌된 상태였습니다.

수사당국은 그의 범행 동기가 찰리 커크가 꾸준히 전해 온 보수적이고 성경적인 메시지와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찰리 커크가 이끌던 “터닝포인트 USA”는 대학 캠퍼스를 중심으로 미국의 건국 이념이자 서구 문명의 뿌리인 십자가 복음과 기독교 보수주의의 가치를 전파해 온 대표적인 청년 운동 단체였습니다. 그는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며, 생명과 자유, 그리고 거룩한 성 윤리를 비롯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싸운 탁월한 그리스도의 증인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마치 사도 바울이 아테네 아레오바고에서 헬라 철학자들과 토론하며 복음을 변증했던 것처럼, 현대의 아레오바고라고 할 수 있는 대학 캠퍼스 현장에서 공개 토론의 장을 열었습니다. 누구든 자유롭게 질문하고 논쟁할 수 있도록 하여, 자신의 신념을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대신, 젊은 세대가 스스로 자신의 세뇌된 잘못된 가치관을 점검하고 진리와 거짓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 일종의 ‘지적 전투장’을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좌익 이데올로기에 물든 대학생들은 그와의 공개 논쟁에서 그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찰리 커크는 언제나 논리와 사실, 그리고 성경적 진리에 근거해 답변했고, 그 앞에서 많은 학생들은 결국 자기 생각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세계관의 허상을 깨닫고 돌이켰지만, 많은 이들은 분노와 좌절 속에 폭언과 폭력으로 대응했습니다.

조지 오웰의 말대로 “사회가 진리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사회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을 더욱 미워하게 되는 법입니다.”

논쟁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지자 결국 그들은 총탄으로 그를 쓰러뜨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오히려 찰리 커크가 옳았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동성애자와 트렌스젠더들을 혐오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혐오하는 발언”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이 혐오하는 발언”을 했을 뿐입니다. 찰리 커크는 복음을 혐오하는 자들의 손에 죽은 스데반처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혐오했던 로마제국의 손에 죽은 사도 바울처럼,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폭군이 죽으면 그 순간 그의 치세는 끝나지만, 순교자가 죽으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의 치세가 시작된다.”

비록 찰리 컬크는 31세의 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두고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를 혐오했던 사람들이 그토록 혐오했던 생명의 존엄과 창조 질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전파되고 있습니다.

찰리 커크가 그의 생명을 바쳐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바로 “미국의 건국 정신”이었습니다.

(#2) 프랑스 사상가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은 그의 기념비적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 사회와 제도의 기원을 탐구하면서, 그 뿌리를 청교도의 신앙에서 찾았습니다. 그는 “청교도의 정신은 미국 민주주의와 사회 제도의 씨앗(seed)”이라고 규정하며,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미국의 자유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기초라고 강조했습니다.

토크빌이 주목한 청교도의 신앙은 곧 칼뱅주의적 세계관이었으며, 그 신학적·윤리적 구조가 미국의 정치와 법, 사회와 경제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어, 미국이라는 국가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을 일컬어 “칼뱅이 세운 나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찰리 커크가 주도한 기독교 보수주의 운동은 바로 이러한 미국의 건국 정신을 회복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비록 “기독교 보수주의”라는 용어가 정치 사상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그 본질은 “성경적 세계관 운동”이자 “복음주의 선교 운동”입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그분의 모든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신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개인의 영혼 구원 사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며, 빛을 등경 아래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두어 세상의 어둠을 밝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3) 네덜란드의 칼뱅주의 신학자이자 총리였던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 1837–1920)는 “인간 존재의 전 영역 중에는 만물의 주권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으시는 곳은 단 한치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을 비롯한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아래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각 영역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도록 헌신해야 한다고 천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보수주의 운동은 특정 정치 세력을 지지하는 정치 운동이기 이전에,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등 사회 전반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고 창조 질서를 회복하려는 신앙적 실천이요, 선교적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신앙과 세상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신앙을 개인의 내면적 영역에만 국한시키고,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는 성경의 가치와는 정반대되는 정책과 문화를 지지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이처럼 개인적 차원의 신앙으로 축소해 버리는 것만큼 복음을 모독하는 악한 행위는 없습니다. 복음은 결코 사적 영역에만 갇힐 수 없는 하나님의 전 우주적 통치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찰리 커크의 공헌은 바로 이 지점에서 두드러집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등경 아래 감추지 않고, 등경 위에 올려 세상을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 보수주의 운동의 핵심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소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어떤 이념보다 먼저 성경적 세계관을 견지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통치가 사회 전반에 드러나도록 하는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보수주의자들이 기독교인이 아닐 수는 있지만, 모든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기독교 보수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보수주의자란 다음의 5가지를 믿고 추구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5가지를 동의한다면 여러분은 기독교 보수주의자이고, 만약 이 가운데 하나라도 동의하지 않거나 반대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독교 보수주의의 5대 원칙

(1) 기독교 보수주의의 기초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입니다.

오늘날 모든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헌법적 기초가 된 미국 독립선언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4) “우리는 다음의 진리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으며,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일정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받았다. 그 가운데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의 권리가 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창2:16-17)

“임의로 먹되”라는 말씀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뜻합니다. 그러나 “먹지 말라”는 명령은 이 자유가 결코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모든 금기와 제약을 파기하는 일종의 “해방구”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법칙의 제한을 받는 “제한적인 자유”요, 절제와 책임이 동반된 자유입니다.

춤을 추더라도 옷은 입고 추어야지 옷을 벗고 춤을 출 수는 없는 것이다. 수영을 하더라도 수영복을 입고 수영을 해야지 맨몸으로 수영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기 절제력을 가진 자유”와 금기와 제약이 없는 “해방구”와의 차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를 무시하고, 모든 금기를 거부하며, 무제한적 자유를 추구하게 될 때 성경은 선언합니다. “반드시 죽으리라.” (창2:17) 금기 없는 자유는 결국 개인의 자유를 파괴하고,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리며, 사회 전체를 죽음과 혼란으로 몰아갑니다.

진정한 자유란 “죄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보수주의가 추구하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의 원리입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자유가 도덕과 신앙의 울타리 안에서만 보존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2대 대통령이자 독립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존 애덤스(John Adams)는 “우리 헌법은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백성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하며 자유와 도덕, 그리고 신앙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자유와 존엄은 왜곡되고 있습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방종”으로 전락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문명사적 위기입니다.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쳐 왕권을 찬탈하려 했던 것처럼, 사탄은 “자유”와 “인권”과 “존엄”이라는 달콤한 언어로 우리의 참된 자유와 존엄성을 도둑질하고 있습니다.

(2) .(#5) 가정과 결혼의 신성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창 2:24). 그리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 가운데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 – God’s Mission through the Family) 가정은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이며, 신앙과 도덕, 교육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통로입니다. 따라서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결혼의 신성함은 도둑맞고 있습니다. 성경적 결혼관은 차별로 낙인 찍히고, 남자와 여자의 질서는 젠더 이데올로기에 의해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동성 결혼이나 젠더 이데올로기와 같은 가정 해체의 시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는 반역이며, 우리의 건강한 사회와 다음 세대를 도둑질하는 사탄 마귀의 계략입니다.

(3) (#6) 신앙과 표현의 자유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그리스도의 진리의 빛을 등경 아래 감추라는 세상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자유로운 예배 활동이나 전도 활동, 성경적 양심에 따른 선택과 주장을 ‘혐오 발언’으로 낙인찍어 사회적으로 매장하거나 영향력을 차단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억압적 논리에 동원되는 대표적인 무기가 바로 “정교 분리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나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과 같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운 정교 분리 원칙(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의 본래 의도는 교회가 정치에 대해 발언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교회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정교 분리는 교회를 제한하는 장치가 아니라, 교회의 신앙과 복음을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였습니다.

그러나 세속주의자들은 정교 분리의 진정한 원칙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을 “정치와 교회의 분리”로 왜곡하여, “교회는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 “설교자는 강단에서 정치 얘기나 공적 사안에 대해 설교하지 말라”고 주장함으로서, 교회의 사회적·도덕적 영향력을 철저히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결코 세상의 정치와 무관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다니엘과 느헤미야는 제국의 정치 한복판에서 신앙을 지켰고, 에스더는 민족의 생사를 건 정치적 선택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렸고, 모세는 제국의 권력자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했습니다. 성경의 인물들 대부분이 정치적·공적 영역 속에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왜곡된 정교 분리의 논리에 사로잡힌 오늘날의 교회는, 설교자가 강단에서 마땅히 선포해야 할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지 못하는 “벙어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세상을 올바로 분별할 능력을 잃고, 진리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는 병든 교회로 전락하며, 세상 속에서 빛을 잃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왜곡된 논리에 속아 교회의 입을 다물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세상을 향해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4) .(#7) 사유재산과 노동의 가치입니다.

성경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고 명령하심으로서, 노동은 생존을 위한 수단을 넘어, 하나님의 청지기적인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천명하셨습니다. 또한 성경은 “도둑질하지 말라”(출 20:15)고 말씀하심으로서, 사유 재산은 그 노동의 정당한 열매로서 보호받아야 할 “개인의 권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이러한 성경적 가치 위에서 청교도들은 근면과 절제, 검소와 책임을 실천했고, 그것이 미국 경제의 기적을 일으킨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이념과 과도한 국가 통제는 개인의 재산권을 약화시키고, 성실한 노동의 열매를 분배라는 이름으로 침해하고 있습니다. “평등”과 “형평성”이라는 따뜻한 구호 안에는 인간의 자유와 번영을 도둑질하는 사탄 마귀의 계략이 숨겨져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사유재산권이 제한되거나 박탈된 사회에서는 진정한 자유와 인권이 존재할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 소련의 사례

1.1.1.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레닌과 스탈린 체제는 사유재산을 철저히 부정하며 모든 토지와 공장을 국유화하였고, 개인의 재산권을 몰수했습니다. 그 결과, 국가는 국민의 생존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 일할 곳, 거주할 곳까지 국가의 허락이 필요했습니다. 결국 이는 단순한 경제 통제를 넘어, 사상의 자유와 신앙의 자유까지 억압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교회 재산은 국유화되었고, 성직자 수천 명이 체포·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사유재산을 부정하는 순간, 교회는 예배당을 소유할 권리도 잃었고, 복음 전파의 기반도 붕괴되었습니다.

● 중국의 사례

1949년 공산당 정권 수립 후, 마오쩌둥은 토지 개혁과 대약진 운동을 통해 사유재산을 철저히 박탈했습니다. 모든 토지와 기업이 국가 소유가 되었고, 개인은 노동력을 국가에 제공하는 집단의 일원으로 전락했습니다. 경제적 자유를 잃은 개인은 곧 국가의 이념을 거부할 자유도 상실했습니다. “애국 종교 운동”을 통해 교회는 국가의 통제 아래 편입되었고, 재정적 자율성을 상실한 교회는 독립적 신앙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자산과 헌금마저도 국가의 감시 대상이 되었고, 결국 신앙 공동체는 철저히 길들여졌습니다.

● 북한의 사례

북한은 사유재산을 전면적으로 부정한 가장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모든 토지와 생산수단은 국가 소유이며, 개인의 재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민은 주택, 직업, 배급까지 전적으로 국가에 의존해야 합니다. 그 결과, 개인은 국가 권력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어,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 사례가 보여주는 교훈은 분명합니다.

· 사유재산권의 상실은 곧 경제적 자유의 상실입니다.
· 경제적 자유가 상실되면, 인간은 생존을 위해 국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결국 사상·표현·신앙의 자유까지 잃게 됩니다.
· 따라서 재산권을 파괴하는 것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니라, 인간의 전인적 자유와 존엄을 파괴하는 첫걸음입니다.

오늘날 일부 정치인이나 지식인들, 심지어 목회자들조차도 성경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지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4장32-35절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공동체적 나눔을 근거로, 기독교가 원래 ‘사회주의적’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오해입니다. 초대교회의 나눔은 정부의 강제나 법적 통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반면 공산주의 체제는 모든 생산 수단과 재산을 국가가 강제로 소유하며, 개인의 재산권과 선택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박탈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와 창조적 활동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통제 시스템으로,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의 공동체’와는 본질적으로 대립되는 체제입니다.

한 마디로, 초대교회의 나눔은 “성령의 열매”였고, 사회주의의 나눔은 “권력의 열매”였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국가 원수를 우리를 먹여 주고 입혀 주시는 “아바이 수령”이라고 부르며,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는 존재로 신격화됩니다. 결국, 국가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대신하는 이교 체제가 되고, 이는 마치 이단 집단에서 교주가 절대 권력을 쥐고 신격화되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주의는 결국 “교주 국가”로 전락하는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Fyodor Dostoevsky, 1821-1881)는 그의 대표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렇게 경고합니다.

“기독교인인 사회주의자는 무신론자인 사회주의자보다 더 두려운 존재다.”

이는 사회주의 이념이 기독교라는 외피를 입고 등장할 때, 전체주의가 신앙의 언어로 포장될 때, 그 파괴력과 통제력은 더욱 강력해질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선의와 평등”을 외치는 부드러운 혀로 결국 개인의 재산권과 자유를 도둑질하여 인간을 국가에 대한 의존과 속박으로 몰아 넣음으로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번영을 도둑질하는 “사탄 마귀의 혓바닥”입니다.

(5) .(#8) 법치와 정의입니다.

참된 법은 단순히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도덕 질서를 반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모든 선과 악의 심판자 되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건국자들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존 애덤스(John Adams) 등은 “국가는 도덕적이고 신앙적인 토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수의 의지에 따라 그때 그때 달라지는 “상대적 규범”이 아니라, 변치 않는 “성경적 진리”를 미국 헌법의 토대로 삼았고, 모든 국민들이 그 법의 통치를 받는 법치주의(rule of law)를 정의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법치주의는 심각하게 도둑맞고 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PC주의는 진리와 도덕의 절대성을 부정하고, 여론과 정치적 압력을 법의 기초로 삼으려고 합니다. (법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 인민에 의한 재판, 여론에 의한 재판)

법은 다수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반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 보수주의 운동의 가치입니다.

오늘날 성경적 진리를 붙들고, 건국의 신앙과 자유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을 세상은 “극우”라고 매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경적 가치, 곧 생명·가정·신앙·자유·법치·애국심은 결코 극단적 이념이 아닙니다. 그것을 반대하는 세속주의자들에게나 극단적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류 문명을 떠받쳐 온 보편적 진리이며, 미국과 서구 문명의 번영을 가능하게 한 토대였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것이야말로 극단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진리를 거스르는 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요 3:19). 진리를 선포하는 자들을 극우라 매도하는 것은, 결국 빛을 미워하는 세상의 본성일 뿐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나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극우”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중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보수주의 신념은 결코 “과격한 극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보편적 질서를 회복하려는 “올곧은 길”입니다. 진리를 지키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극우”라는 낙인을 찍는 것은, 사탄이 교회를 침묵시키려는 전략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탄 마귀를 도둑에 비유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이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요한복음 10:10)

사탄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세속적 인본주의 세계관, 신공산주의, PC주의, 그리고 기독교 세력을 파시스트로 낙인 찍는 안티파(Antifa)와 같은 급진 좌파 세력들은 바로 이 도둑의 영에 붙들린 “문명의 반역자”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찰리 커크의 죽음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여 펼쳐지고 있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을 빼앗으려는 도둑”, 곧 사탄 마귀 사이의 영적 전쟁의 한 단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결코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 문명 전체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영적 전쟁은, 국제 정치의 지형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질서는 흔히 ‘신냉전(New Cold War)’이라 불리는 새로운 대결 구도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블록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북한, 이란 등과 같은 국가들이 그 축을 이루며, 군사적 확장과 정보전, 그리고 이념적 침투를 통해 국제 질서를 흔들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이 서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동맹국들이 그에 합류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이 갈등은 무역 전쟁, 기술 패권, 에너지 자원, 영토 분쟁과 같은 정치·경제적 문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단순한 패권 다툼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문명사적 전쟁입니다. 다시 말해, 인류 역사 속에서 참된 자유와 인권, 법치와 질서, 그리고 번영을 낳아왔던 기독교적 세계관을 도둑질하고 파괴하려는 적그리스도적 세력과의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중국이라는 나라는 단순한 정치적 경쟁자가 아닙니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박해하고, 성경을 검열하며, 신앙의 자유를 억압해 왔습니다. 중국은 적그리스도적 공산주의 체제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미국과 중국 사이의 신냉전은 단순한 패권 경쟁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진리와 거짓, 하나님 나라와 적그리스도의 나라가 맞서는 문명사적·영적 전쟁입니다.

그리고 이같은 국제정치 현실은 현재 대한민국의 “국내정치” 안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현실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가랑이가 찢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한민국은 19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기독교 입국론”을 표방하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뿌리를 내린 나라로 세워졌습니다. 그 결과 지난 80년 동안 우리는 경제적 기적, 정치적 발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영적 부흥을 경험해 왔습니다. 대한민국은 지정학적으로는 아시아에 속하지만, 문명사적으로는 기독교 세계관에 뿌리를 둔 서구 자유세계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해 온 나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대한민국 안에는 이러한 뿌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이 늘 존재해 왔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이 지난 80년 동안 누려온 번영과 자유의 열매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그와 같은 번영의 뿌리를 부정하고 그 뿌리 자체를 뽑아내려는 “문명의 반역자들”입니다. 이들은 미국, 서방, 기독교, 자본주의라는 토양에 뿌리를 내려온 대한민국을 뿌리 뽑아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반미·반서방·반기독교·반자본주의 진영 안에 대한민국을 새롭게 뿌리 내리려는 반대한민국 세력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꿈꾸는 반서방, 반기독교 대한민국을 “진짜 대한민국”이라고 속이며, 압살롬처럼 따뜻한 손길과 부드러운 혀로 하나님이 세워주신 “진짜 대한민국”을 도둑질하려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이들은 중국과 북한의 지원을 힘입어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어 가는 주류 세력이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지금 가랑이가 찢어지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뿌리는 기독교, 서구문명 세계에 깊이 내리고 있는데, 주류 권력은 그 뿌리를 스스로 뽑아내려 하고 있습니다. 국가적 정체성은 자유민주주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국가의 정책은 반(反)자유적이고 반 민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결과,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은 선량한 국민들과 대한민국의 세계적인 기업들입니다. 그래서 많은 국민들의 눈에는 지금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볼모로 삼아 자해 소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문명사적인 전쟁이 전 세계적으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 때, 한국 교회는 지금 잠들어 있습니다.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를 분별할 줄은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깨어날지어다!

3. 결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

압살롬의 반역 소식이 예루살렘에 전해지자, 다윗은 도망을 결정합니다. 그는 신하들과 가족을 이끌고 눈물을 흘리며 맨발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따라오자 다윗은 그것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며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기뻐하시면 나를 다시 그 궤 앞에 세우실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신다 해도, 여호와의 뜻이 내게 선하다고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라.”

다윗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께 철저히 의탁했습니다.

자신의 충신이었던 아히도벨이 자신을 배신하고 압살롬에게 가담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그 즉시 하나님은 충성된 친구 후새를 보내어, 아히도벨의 계략을 무너뜨리도록 길을 여셨습니다.

1.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다윗처럼 눈물의 길을 걸을지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여십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라

압살롬의 최후가 어떻게 됬습니까? 그는 온 이스라엘의 마음을 훔쳤던 그의 자랑스러운 머리카락 때문에, 말이 지나가는 숲의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다윗에 대한 반역은 철저히 실패로 돌아갔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질서를 거스르는 모든 압살롬의 반역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사탄의 모든 모략은 결국 좌절될 것입니다. 최후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역사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주권을 담대하게 신뢰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 세상을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교인이었다가 지금은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성도 한 분과 며칠 전에 통화했습니다. 찰리 커크의 사건을 통해 너무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지금 미국 상황과 한국 상황은 물론 전 세계적인 상황이 너무 심상치 않다며, 미국 한인 교회는 지금 이런 문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 관심도 없다며 너무 속상해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가지를 말해 줬습니다. 첫째, 자녀를 잘 키워라. 우리의 자녀들을 찰리 커크 같은 사람으로 키우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제일 책무다. 둘째, 말해라. 모르는 자들에게 욕을 먹어도 말해줘라. 가르쳐 줘라. 필요하면 논쟁해라. 그 대신 정확한 논리와 사실, 성경적 진리를 가지고 말해라. 말하는 것. 외치는 것. 이것이 사탄 마귀가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찰리 커크가 왜 죽었습니까? 말하다 죽은 것입니다. 말 안했으면 안죽었습니다. 말해서 죽은 것입니다. 사탄 마귀가 찰리 커크를 죽인 이유는 살아 있는 모든 자들에게 죽기 싫으면 입다물고 있으라는 위협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우리가 말하는 것을 사탄은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라. 외치라. 가르치라. 논쟁하라. 침묵은 금이 아닙니다. 침묵은 독입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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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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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