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때 성전에 올라가며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던 순례자들의 노래는 슬플 때나 기쁠 때, 번영할 때나 압제 당할 때 공동체의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하며 성전 중심의 신앙으로 살고, 종말론적 승리와 번영을 확신하며 부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였다.
그 중 127편은 표제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에는 ‘솔로몬에게’ 또는 ‘솔로몬의’라는 뜻의 ‘리셀리모’(לִשְׁלֹמֹה)로 되어 있어서 다윗이 솔로몬을 위해 쓴 시로 보는 사람도 있다. 솔로몬이 누군가? 아버지 다윗이 세운 이스라엘 왕국의 기반을 다지며, 지혜 문학의 전통을 세운 왕 아닌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던 왕, 아기를 반으로 갈라 친모를 찾으라는 명판결로 유명한데 사실은 지혜가 가득 담긴 잠언서 때문에 더 존경받을 만하다. 오죽하면 ‘솔로몬의 지혜’ 그러면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생각’이라는 뜻으로 통할까? 여호와께서 지혜로운 사람을 돌보시고 어리석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지혜 전통과 의인과 악인을 주제로 노래하는 시편의 신학의 접촉점 때문에 독일의 개신교 구약학자 헤르만 궁켈(H. Gunkel)의 분류에 따르면 127편은 ‘지혜시’로 분류된다.
그런데 시는 1-2절과 3-5절이 마치 다른 이야기 같다. 1-2절이 건축과 성읍 지키는 일, 매일 하는 농사일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3-5절은 가족의 복에 초점을 맞추었다. 마치 따로 전해져 온 일상의 경험 같지만 여호와 중심, 성전 중심의 공동체에 관한 것이기에 ‘복된 공동체를 위한 노래’라는 제목을 붙여본다.
“헛되다”
시인은 먼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의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1-2절)라고 노래한다. 일상의 삶을 상징하는 집짓기와 초병의 경계와 농사일, 세 가지 비유로 노래를 시작한 거다. 여기서 집 짓는다는 표현을 가정을 이룬다는 말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일상의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게 무난하다. 집 짓는 것은 성 세우기의 첫걸음이다. 그리고 성읍이 세워지면 그 성읍을 지켜야 하고, 그 안에서 열심히 농사 지어야 먹고 산다. 그러니 고대 사회에서 이 세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일상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헛되다’는 선언을 3번이나 반복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열심히 노력해 곳간 세우고, 저축하고, 집을 잘 세워도 헛될 수 있다는 거다. 갑자기 재난이 닥치면 무너질 수 있기에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했다. 또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성을 튼튼히 쌓고, 군인 수 늘리고, 첨단무기로 무장해도 나라가 망한다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다’는 거다.
시선을 끄는 것은 2절, 원문으로 보면 ‘헛되다’는 선언이 먼저 나온다. “헛되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것이.” 1주일 내내 밭으로 직장으로 일찍 나가 늦게까지 일하며 고생해서 땀과 눈물 젖은 빵을 먹지만 노동의 대가는 별로, 그마저도 빠져나가는 것이 순식간이라 대책이 없다. 사는 게 너무 힘들다. 그래서 ‘헛되다’를 반복한 거다.
시인은 이 헛된 상황이 여호와께서 함께하시지 않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다 ‘부질없다’는 것, 마치 솔로몬의 잠언을 읽는 것 같다. 이 부분을 가톨릭 성경의 번역으로 보면 내용이 달라진다. “여호와의 복은 부를 가져오지만 사람의 노고는 보탬이 되지 않는다”(잠10:22), 헛수고라는 거다. 이게 순례자의 형편이다. 우리는 이런 형편을 감안하며 시를 읽어야 한다. 표제가 ‘솔로몬의 시’라 붙기는 했지만, 시편 대부분은 바벨론 포로기에 수집되고, 예배에 사용된 것, 그렇다면 순례자는 성전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후 오랜 세월 방치된, 황폐화된 시대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 고향 집에서 쫓겨나 타국에서 서럽게 사는 포로가 되어 그저 주변의 눈치를 보며 긴장 가운데 사는 사람이다.
♬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 ‘부평 같은 내 신세’, 부평초 즉 개구리밥이 물 위에 떠서 이리저리 흘러다니는 것처럼 떠돌이 신세라는 뜻이다. 일제 강점기 때 어쩔 수 없이 고국을 떠나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동포가 낯선 이국땅에서 타향살이로 고달픈 삶을 살아가면서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눈물로 불렀던, 애달픈 사연이 오롯이 담긴 고복수 님의 민족비련가 ‘타향살이’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
마치 그 노래처럼 순례자는 실패를 통해서, 인간의 노력으로만 되지 않음을 깨닫고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를 눈물로 기도한다. 앞부분만 읽으면 마치 ‘실패자의 애달픈 고백’과 같지만 시인에게 하나님은 창조주요 통치자, 그 하나님의 손에 모든 복과 저주, 길흉이 달려 있음을 믿고 꼭 하나님이 함께하시길 기도한다. 우리가 불러야 할 노래다. 우리나라가 “헛되도다. 어찌 이 지경인가?” 탄식할 만한 상황을 너무 자주 맞기 때문이다.
“잠을 주시는 도다”
이어진 시인의 노래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2절), ‘잠’은 ‘헛됨’ ‘부질없음’의 반대 개념,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신다”는 것은 대단한 시적 상상력이다. “발 뻗고 잠 잔다”는 말이 있지 않나? “때린 놈은 다릴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릴 뻗고 잔다”는 속담, 근심이 없는 평화로운 상태라는 거다. 잠을 못 잔다는 것은 고민이 많거나 일에 너무 지쳤다는 건데 여호와께서 잠을 주신다는 건 그 반대, 신뢰하고 맡길 때 누리는 만족이다. 생각해보라. 어차피 잠잘 시간에 뭘 할 수 있나? 그리고 어떤 일이든 결과는 우리 몫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그 또한 하나님의 뜻으로 여겨야 한다. 그래야 스트레스받지 않고, 마음이 평안해지고, 잠도 잘 올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믿고 맡기는 훈련이 잘되어 있지 않다는 거다. 항상 자신이 책임지려고 자세, 책임감이 강해서일까? 아니다. 맡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는 믿음 부족, 기억하라. 우주와 인생은 다 하나님 뜻에 달려있다. 그리고 그 뜻은 반드시 성취된다. 도무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왜 미련이 많은 줄 아나? 욕심 때문이다. 믿고 맡기지 못하면 인생 순례길 절대 편하게 갈 수 없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잘 주무시기를 축복한다.
“복되도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의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3-5절)라고 노래한다.
그리스 민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동물학교 소풍 가는 날, 엄마 토끼는 도시락을 빠뜨리고 간 자기 아이를 위해 도시락을 들고 부리나케 학교로 가는데, 거의 학교에 도착했을 즈음에 누군가 뒤에서 불러 돌아보니 다람쥐였다. 다람쥐네 아이도 도시락을 갖고 가지 않았다며 자기는 바쁜 일이 있으니 자기 아이 것도 좀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죠, 그런데 댁의 아이는 어떻게 찾죠?” 물으니 “그건 어렵지 않아요. 학교에서 가장 잘생긴 아이를 찾으면 돼요.” 그래서 토끼가 학교에 도착해 열심히 찾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다람쥐네 집에 들러서 도시락을 돌려주며 말한다. “미안해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 아이보다 잘생긴 아이가 학교에 없었거든요.”
토끼나 다람쥐처럼 부모에게 자녀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이다. 물론 ‘그건 아닌데’하는 부모도 있겠지만 제일 예쁘기를 기대하는 마음만은 다 같지 않을까? 성경은 자녀를 하나님의 선물이며, 기업이고 상급이라 한다. ‘기업’은 히브리어로 나할라(נחלה), 원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땅에 가리키는 데 쓰인 단어(출15:17, 신6:2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그 땅이 삶의 기초였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간 아브라함은 처음에는 땅 한 평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도 제비뽑기로 땅을 나누었다.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었다.
땅만 아니라 자녀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상급이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그랬다. 이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아들, 이삭은 언약을 이루는 축복의 통로였다. 이삭이 없었다면 아브라함의 축복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야곱의 열두 아들도 마찬가지다. 그 열두 아들로 인해 이스라엘이 번창했다. 번창한 야곱의 식구 칠십 명이 애굽으로 이주해서, 400년이 지난 후 모세 때 큰 민족을 이루었다.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고 상급이며, 선물이자 축복이다.
성경에 보면 부모의 얼굴을 빛낸 자녀들이 있다. 다윗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새의 말째 아들, 이새는 몰라도 다윗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인물, 다윗은 이새의 얼굴을 빛낸 축복의 자녀다. 또 다윗의 절친 요나단도 그런 자녀였다. 아버지 사울 왕은 불순종으로 버림받지만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으로 빛나는 축복의 자녀가 된다. 어떻게 사울 왕에게서 이런 아들이 태어났을까 싶을 정도다. 요셉도 마찬가지다. 형들에게 미움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면서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죽은 줄로 알았지만 어느 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극적 즐거움을 안겨 준 축복의 아들, 7년 대기근을 맞은 야곱에게 요셉은 구세주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 정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한 대인, 가문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반대로 가문에 먹칠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 자녀들도 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그랬다. 패역한 아들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마음대로 빼앗고, 성전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한다. 블레셋과의 전쟁 때는 언약궤를 가지고 나갔다가 둘 다 죽고, 민족의 자랑이었던 언약궤를 블레셋 사람들에게 탈취당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 엘리까지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는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도 마찬가지, 잘 생기고 능력도 있었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이복누이 다말을 근친상간하고, 이복형 암논을 살해한다. 그리고 다윗의 어정쩡한 용서와 화해로 괴롭게 지내다 쿠데타로 아버지의 왕위를 찬탈한다. ‘아버지 살해할 놈’(?)으로 기억될 아들, 압살롬은 아버지를 반역한 최악의 아들이었다.
먼 길을 떠났기 때문일까? 순례자는 자녀 생각이 더 난다. 그래서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상급임을 기억하며 부모 얼굴을 빛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된 자녀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4절), 아름다운 꽃이라고 하지 않고, 자식을 전쟁 무기인 화살에 비유한다. 의도적인 표현이다. 화살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무기, 칼이나 창과 달리 장거리 무기이다. 멀리서 적을 공격하는, 오늘날로 말하면 미사일과 같다. 파괴력이 강한 무서운 무기, 장거리 미사일에 핵무기까지 탑재한다면 상대가 누구든 떨게 하는 공포의 무기 아니겠나?
순례자가 왜 이런 비유를 했을까? 사는 곳이 치열한 영적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적을 이기는 강력한 무기라는 비유, 순례자는 지금 자녀가 화살과 같다며 멀리 내다보고 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자녀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자녀와 다음 세대가 선한 싸움을 계속 감당해야 한다는 거다. 축복으로 얻은 땅을 저들이 지키지 않으면 대적들에게 빼앗길 수밖에 없을 것, 그래서 자녀들이 그 역할을 잘 감당하기를 기도하는 거다.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와 함께 최초로 제물포항으로 들어와 한국에 복음을 전하고 연희전문학교 설립 등 종교, 문화, 언어, 정치, 사회에 공헌한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를 기억하나? 그도 훌륭하지만 그의 자녀들도 대단하다. 그들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한국에서 계속 선교했다. 6대까지도 변함없이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언더우드 가족들, 선교 100년이 지나면서 한국에서는 더 이상 역할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명예롭게 한국에서 철수했다. 아름답지 않나? 부모가 하던 일을 이어받는 자녀, 선한 일을 완성해주는 자녀, 그게 가장 큰 삶의 보람 아닐까?
시인은 5절 첫 부분에서 “이것이 화살통에 가득한 자는 복 되도다”, 다다익선(多多益善), 많을수록 좋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이 성문에서 그들의 원수와 담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성문은 출입문이면서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이자 법적 판단의 자리였다. 이런 곳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 자녀가 부모에게 힘이 된다는 거다. 자녀는 우리의 명예를 빛나게 해줄 힘, 공의가 강 같이 정의가 하수 같이 흐르는 세상이 되려면 의인의 자녀들, 믿음의 자녀들이 번창해야 한다. 솔로몬의 지혜가 절실한 때, 순례자들의 기도처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공동체, 자녀들이 번창한 신앙의 명품 가정과 나라가 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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