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쁨은 말씀에 기초한 기쁨이며, 복음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김양재)
들어가는 말(서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밀 - ‘이 책’에서 발견하시기를”(Marc Choi)
“예수 믿으면 참으로 기쁨이 충만한가요?” “정말 날마다 샘솟는 기쁨으로 살 수 있나요?” “답답한 일상의 삶 가운데서 ‘날마다 기뻐하며 살 수 있는 비결’이 정말 있을까요?” “가끔은 기뻐할 수 있지만, 어떻게 사람이 환경을 초월해서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나요?”
<기쁨으로 리셋 Reset with Joy>(QTM, 2024) 본서는 미국 오렌지카운티(OC) 어바인 베델교회, 김한요 목사의 빌립보서 강해다. 그는 일찍이 미국 동부 5개 명문대가 모여 있는 메사추세츠 앰허스트(Amherst, Ma)의 학원가에 뛰어들어 유학생 사역과 더불어 2세 대학사역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그는 다음 세대를 향한 징검다리 역할을 사명으로 여겨 세리토스(Cerritos, Ca)와 Irvine에서 영어사역을 키워 개척 시켰는데, 이는 현재 1세 사역과 더불어 공존하는 건강한 교회 모델로 제시되고 있다.
<세계 역사를 바꾼 복음>, <냅킨에 쓴 연애편지>, <다윗을 보면 예수가 보인다>. <강한 성도, 강한 교회>, <인생의 블루프린트 십계명(QTM)> 등 10여권의 저자이다. 최근에 베델교회 내에 기독사립학교를 세웠다. ‘클래시컬 커리큘럼’을 도입하여 Bethel Classical Acade- my를 4년째 운영 중이다. 첫 졸업생부터 탁월성이 증명되고 있다.
빌립보서 4 장/4PART의 각 제목부터 신선하다; 1부, ‘기쁨의 비밀, 복음으로 리셋!’, 2부, ‘이 생각을 품으라’, 3부 ‘함께 나를 본받으라’ 제4부 ‘샬롬 샌드위치’. 전체 26장의 탁월한 강해설교 제목들. 서평자는 각장에서 4개의 설교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서평 할 것이다.
1. 기쁨의 비밀, 복음으로 리셋(빌1:1): ‘복음이 행복의 가치라는 것을 리셋하라’
감옥에서 바울은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던진 메시지, ‘기뻐하라’다. 빌립보서가 ‘기쁨의 서신’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복음 때문이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바울 전도대(행17:6, 바울/실라/디모데/누가)가 빌립보교회를 리셋하였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빌립보교회는 유럽의 최초의 교회이다. 사도행전 16장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게도냐인의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 세운 교회! 바울과 실라는 기도 할 장소를 찾던 중, 강가에 모여 있는 루디아와 몇 여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교회 핵심 설립멤버 3인은 중소기업 여사장 루디아, 노예였고 귀신 들렸던 여인, 로마 군인출신 간수였다.
10여년이 지난 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다시 로마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회는 헌금을 모아 바울에게 보냈다. 그 헌금을 갖고 왔던 에바브라디도는 로마에서 중병에 걸려 앓아 누웠다. 그가 다시 빌립보로 돌아갈 때 그의 손에 빌립보 서신을 쥐어 주었다. 이 같은 빌립보 교인들 과의 애틋한 애정 관계로 인해 바울은 감옥에서 이렇게 고백하였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간구함은”(1:3-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어떻게 우리가 주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가?”: → 환경을 극복하는 기쁨은 ‘주님 안에’
“무턱대고 기뻐하라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기뻐할 이유가 있고, 기뻐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가졌다는 이유였습니다. 예수의 생명을 마음에 가진 자는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p. 25, 외적 환경이 아닌, 내 안의 복음의 가치 때문에)
바울은 여기서 우리에게 분명히 밝히는 메시지가 있다. 기쁨/행복의 조건은 환경이 아니라, 복음이 행복의 가치라는 것을 리셋하라고 하고 있다. 다른 것들은 솔직히 똥/오줌 같은 것들이다. 그는 복음의 실 이신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3:8)고 선언하였다.
“거추장스러운 환경의 조건들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좋은 것을 가졌기에 overrule(지배, 압도, 무효)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치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p. 27)
“성도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복음의 기쁨입니다. 만물의 창조자 되시고 지금도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크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셨다는 기쁨입니다. 이것이 리셋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기쁨이요, 나의 눈물과 아픔도 하나님 앞에서 기억되어졌다는 것이 기쁨입니다. 이것이 리셋입니다. 우리의 하는 일 하나하나도 우연이나 재수에 맡겨진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간섭 속에 지켜지고 있다는 것이 기쁨입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수고를 복음의 열매로 거두시는 하나님 자체가 우리의 기쁨입니다” (p. 29, 이 같은 ‘리셋’이 우리의 기쁨의 비밀이요 근원이다)
2. “이 생각을 품으라”(빌:1-8): ‘한 마음을 품는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의 비빌’
한 가족도 생각이 다르다. 한 교회 안에도 성도 수만큼 생각이 다르다. 어떻게 같은 생각을 품을 수 있을까? 같은 생각을 하려면 훈련이 반드시 필요하다. 오늘 본문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으라”(2:2) 여기서 ‘마음’은 heart가 아니라 mind다. ‘마음을 같이 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생각을 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쟁이가 되었다는 뜻은 ‘주님과 연합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곧 상대방의 생각에 내 생각을 맞추며 상대방을 섬긴다는 뜻이다. 이러한 마음을 바울은 ‘겸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무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2:3)가 가능한 것이다. 바울의 통찰이 놀랍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이다.
빌립보서 2장에서 그 예수님의 겸손을 3가지로 언급한다. 첫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 둘째는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 셋째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인자(人子)되신 예수님 자신이 친히 이렇게 선언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10:45, 예수님의 사명선언문이다. Amazing, amazing! 말씀)
‘ㅅ의 리셋’ →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생각을 품으라”
이를 깊이 깨달은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서 들려오는 분쟁과 다툼의 소식을 듣고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2:3b)고 권면하고 있다.
솔직히 서평자는 이 부분에서 할 말을 잃는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우쭐대며 잘난 체하기 좋아했다. 조그마한 자랑거리가 있으면 동네방네 나팔을 불었다. 예수쟁이가 된 후에도 지난 50년을 이렇게 살아 왔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삶이 아니라, ‘남을 낮게 여기며’ 살아왔다.
“’낮게’가 아니라, ‘낫게’, 받침이 ‘ㅈ’이 아니라 ‘ㅅ’입니다. 우리는 ‘내가 누군 줄 알라?’라고 주장하고 싶을 때, ‘ㅈ’으로 남을 밟기 십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로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ㅅ’(낫게)으로 리셋합시다. ‘ㅅ’의 리셋’은 주님의 겸손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pp. 115-116, ‘ㅈ’이 아닌, ‘ㅅ’의 리셋 인생)
3. 개조심!(빌3:13): “개들을 삼가라”(2); → ‘개 같은 설교자’가 될 수 있다
서평자는 본서를 읽으며 성경에서 개에 대한 부정적 표현들을 많음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한국인은 ‘개 팔자’, 곧 평생 걱정 없이 놀고먹는 삶을 은근히 부러워한다. 성경 기록당시 개의 이미지는 더럽고/사납고/주인까지 무는 존재였다. 그래서 신·구약에서 개는 아주 나쁜 이미지였다. 우리말에도 ‘개 자식’/’개 새끼’는 욕설이 아닌가?
‘개들이 나를 에워쌌다’(시22:1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마7:6a),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벧후2:22a)…. 심지어 ‘벙어리 개들(all silent dogs)’(사56:10)은 이스라엘의 파수군인 목자들 곧 잠자기를 좋아하며 탐욕만 부리는 자들이다. 곧 바울은 이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교회 안에 이간질 하여 어지럽히는 ‘개자식’이라는 것이다.
당시 헬라문화 중심지는 그리스 아테네였다. 바울일행이 복음을 전할 때 유행의 최첨단을 따르던 자들이었다.(행17:21). 그러나 예수쟁이는 새로운 유행을 따르는 자가 아니라, 언제나 진리를 따르는 자다. 그래서 바울은 “같은 말을 쓰는 것”(3:1)을 수고롭게 생각지 않았다. 이제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전도사나 초보 설교자들은 뭔가 새로운 설교를 시도하려 한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3:2,3)
‘주안에서’ 기뻐하라’(3:1)는 이미 2장에서 3번이나 반복하였던 명령이다. 곧 주안에서 머물라.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 자기 힘과/꾀와/경력으로 예수께 나올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위험하다. 오직 예수님 만 의지하며 자랑하라는 것이다.
할레당, 행악자(개들) → 하나님의 성령으로 ‘성전봉사, 예배하는 자’
개들/행악자는 누구일까? 저들은 할례를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유대주의자이다. 이들을 바울은 ‘거짓 사도’/’광명한 천사로 가장’하는 자/’사탄의 일꾼’(고후11:13-15)이라고 일갈하였다. 더 나아가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받을지어다”(1:8),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5:12)고 매우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서 가짜 복음/유사 복음에 단호하게 대처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설교자들은 매주 진리를 반복해서 전하는 자이다. 진리의 복음을 거듭해서 전해야 교회가 산다.
“매주 본문이 바뀌면서 새로운 설교를 준비하지만, 결국 같은 메시지의 반복입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은혜를 받는 자의 마음에는 이 똑 같이 반복되는 진리의 복음이 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게 들립니다. 만약 ‘늘 그게 그거다’식으로 설교가 들리기 시작한다면 이때부터 조심해야 합니다” (p. 181, 그래서 설교자는 언제나 영성이 펄펄 살아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4. ‘항상’ 군(君)과 ‘아무것도’ 양(孃) 던진 질문(빌4:4-6): “큰 기쁨의 하나님”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4). 정신없이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 아주 당황스런 말씀이다. 서평자도 솔직히 예수님을 영접한 후 본문을 처음 읽었을 때 말이 안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성경공부를 통하여 “큰 기쁨(극락)의 하나님”(시43:4)을 ‘맛보아 알면서(taste and see)’ 이런 놀라운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할렐루야!
대체적으로 남자들은 “당신은 항상 늦어”라고 과장(誇張)을 잘 하고, 여자들은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통 몰라”고 부정적(否定的) 말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김한요 목사는 위트 있게 ‘항상’군과 ‘아무것도’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과장된 말이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은 부정적인 표현일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까?’ 여기서 ‘기쁨’을 감정이라고 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지·정·의(知情意) 인격의 3요소는 서로 상호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작동한다. 시무룩한 사람에게 “기뻐하세요”라고 누가 명령한다고 없는 기쁨이 생길 리가 만무하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감정이 아닌, ‘의지적 결단’의 사랑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고전13:4a)에서 사랑은 의지적 결심(decision making)이 먼저다. 그 다음에 감정(感情, affection)은 그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쟁이는 점점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4:5a) ‘관용(gentleness, forbearing)’이라는 단어가 기쁨과 연결해서 바로 나옵니다. 그냥 히죽히죽, 비시시 웃는 것이 기쁨이 아닙니다. 관대함을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기쁨’입니다. 별로 기쁘지 않아도 꾹 참고,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친절히 대하는 것입니다. 꼭 웃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결심해야 하는 것처럼, 기쁨도 결심(decision making)해야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다.” (p. 256)
이렇게 바울의 계속되는 권면을 자세히 보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기쁨과 관용을 연결하더니, 또다시 바울은 관용을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와 연결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마라나타’(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인사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참으로 성경이 100%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음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경이로운 말씀의 세계가 아닌가!
기쁨 주께서 가까우시리라” (4:5) 바울의 논리는 기쁨→ 관용→ ‘주께서 가까우시니라’이다.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유력한 창립멤버(권사)들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바울은 이들의 실명이름을 거론하며 공개적인 가르침을 하고 있다(빌4:2, 3) 누구에게도 편들지 않으며 공평하게 권면하고 있다. “주 안에/주 안에서 같음 마음을 품으라”(1-2)고.
“우리가 고난 가운데 긍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계시를 받아 바른 정보를 축적하고, 그 정보에 따라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에 옮기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정보가 내 안에 접수되어 용해되기 전에 환경이 나를 컨트롤하게 두면 우리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밝히는 ‘계시’가 중요한 것입니다.” (p. 260, 여기서 ‘말씀의 바른 계시를 받고 축적하는 일’이 곧 우리의 일상의 큐티 생활이다)
나가는 말(결론):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In Christ’, 환경을 뛰어넘어 감사와 기쁨이 리셋 되어 극락의 하나님과 동행하라!
불교는 염불 수행을 통해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극락(極樂)의 기쁨’을 누린다고 한다. 서평자는 불교대학 3학년에 편입해서 불교개론/불교문화사를 공부했다. 불교쟁이 중 이런 극락의 기쁨을 누리는 자를 만나 본적이 없다. ‘극락(極樂, exceeding joy)’은 하나님께 있다. “나의 극락의 하나님(God my exceeding joy)”(시43:4), “내가 기뻐하는 기쁨의 하나님”이라 하였다. 빌립보서에서는 ‘극락의 하나님의 기쁨’이 이과수폭포수 처럼 넘치고도 또 넘친다.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자가 이런 극락의 기쁨을 누리면서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한다.
인생은 롤러코스터 타기. 내려갈 때가 있고 올라갈 때가 있다. 가끔은 뒤집히기도 하고 급하게 우회전/좌회전을 하기도 한다. 롤러코스트의 안전 책임자는 하나님이시다. 내 옆에 롤러코스터를 타고 계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주님 안에 있는 자, 예수쟁이는 어떤 형편에 있든지 자족(content)하며 감사하며 사는 자이다. 주님 안에서 자족의 비결을 배운 자이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고 담대히 나의 고백 하며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는 자가 예수쟁이다. 할렐루야!
<기쁨으로 리셋>을 거듭 읽으며, 서평자에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26개 강해설교의 제목들이다. ‘이 안에 너 있다’/‘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배설물(Dung) 설명회’/‘육각형 십자가 틀’ 등 설교 제목부터 위트와 호기심이 발동한다. 이민생활의 정서를 담아내는 익숙한 말 같으나 느낌은 신선하다. 독자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핀다. 듣는 귀와 마음을 상쾌하게 한다. 아울러 각 장(설교) 마지막에 있는 ‘적용질문’은 교회 내 소그룹에서 활용할 수 있어 완전 보너스다. 이 서평을 읽는 모든 선교사·목회자들께 ,<기쁨으로 리셋> 기쁨으로 강추하고 싶다.
“저는 이 책을 고난 중에도 기쁨을 경험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본질을 거듭 추구하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고상한 지식을 갈망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또한 빌립보서를 연구하고 강해하기 원하는 사역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강준민, LA. 새생명비전교회 담임, 추천사 중에서)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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