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 77주년이다. 제헌절은 1948년 7월 17일 대한민국 헌법이 공포된 것을 기념하는 동시에 국민 주권과 헌법 가치의 본질을 되새기는 날이다. 그런 제헌절이 올해는 공휴일 재지정이라는 화두에 가려 도리어 그 의미와 빛이 흐려진 느낌이 든다.
제헌절을 공휴일로 다시 지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매년 제헌절마다 제기됐다. 하지만 올해는 지난 9일 강대식 국민의힘 의원이 ‘공휴일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법률안’을 대표 발의하면서 급부상했다. 또 최근 곽상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제헌절의 명칭을 ‘헌법의 날’로 변경하는 내용의 법률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는 등 관련 입법 발의가 잇따르면서 특히 젊은 직장인들 사이에서 공휴일 재지정에 따른 관심이 고조되는 분위기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이런 분위기에 동조해 지난 14일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 필요성과 주요 논점'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조사처는 이 보고서에서 “국경일보다 상징성이 떨어지는 기념일 등도 공휴일로 지정된 현실에서 유일한 ‘비 공휴일 국경일’인 제헌절의 국경일로서의 위상 회복 필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한민국 헌법 제정을 기념하는 제헌절은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경일로 지정된 이후 줄곧 공휴일로 지켜졌다. 그러다가 주5일제 근무제가 도입되면서 2008년부터 공휴일에서 제외됐다. 연간 휴일 수가 늘어난 데 따른 기업 부담과 생산성 저하를 우려한 정부의 공휴일 수 조정 조치 때문이다. 당시 행정안전부는 “국경일의 의미는 유지하되, 실제 휴일을 줄여 사회적 비용을 절감한다”라고 공휴일 제외 이유를 밝혔다.
하지만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의 기초가 마련된 날을 기념하는 제헌절만 다른 국경일과 다르게 공휴일에서 제외한 조치가 형평성 차원에서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대한민국의 5대 국경일 3·1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 한글날 중에 공휴일이 아닌 날은 제헌절뿐이기 때문이다.
제헌절 공휴일 환원을 원하는 국민 정서도 무시할 수 없다. 나우앤서베이가 지난해 7월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88.2%가 제헌절을 공휴일로 재지정하는 데 찬성했다. 이는 2017년 리얼미터가 조사에서 78.4%가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에 찬성한다고 응답한 것보다 10%가량 상승한 수치다.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 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것도 이런 높은 국민적 요구를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법안을 발의한 강 의원은 “제헌절은 헌법의 가치를 되새기고 국민 주권의 의미를 되짚는 날로 공휴일로 재지정할 필요가 있다”며 “이번 개정안을 통해 국민의 헌법의 가치를 되새기고 우리 국민이 대한민국 헌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국민으로서 보호받는 국가를 체감할 수 있길 바란다”고 법안 취지를 설명했다.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 유족회도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에 힘을 보탰다. 유족회 측은 제77주년 제헌절을 앞둔 지난 11일 우원식 국회의장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입법 발의된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 법안의 조속한 처리를 건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창 진행 중인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열기 탓인지 제헌절 하루 전까지도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됐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고 있다. 통상 화요일에 개최되는 국무회의에서도 긴급 안건으로 다뤄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올해 제헌절 공휴일 시행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 논란은 한때 공휴일에서 제외됐다가 문화적 상징성과 여론을 반영해 지난 2013년부터 다시 공휴일로 돌아온 한글날의 사례처럼 사회적 화두로 대두되는 흐름이다. 따라서 이날이 지닌 특별한 의미와 함께 국민적 여론도 절대적인 만큼 올해가 아니더라도 공휴일로 재지정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그런데 최근에 불거진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 화두의 본질이 다른 국경일과의 형평성 차원에 기인한 건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제헌절의 위상과 가치 회복에 더 큰 비중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 점에서 5대 국경일이 모두 공휴일이니 제헌절을 공휴일로 재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하지만 공휴일로 지정해야 제헌절의 위상이 회복될 거란 논리는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다. 정치권 일각에서 제헌절이 공휴일에 되면 국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자연스럽게 성찰하고 체감하는 기회가 될 것이란 주장을 하고 있으나 공휴일과 민주주의 성찰 사이의 연관성이 멀게만 느껴지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제헌절은 자유민주주의 헌정 질서의 기초가 마련된 날이다. 제헌의회가 헌법을 제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틀이 잡혔다. 그런 헌법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는 뜻깊은 날이 여지껏 공휴일에서 제외됐다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제헌절이 공휴일이 아니라서 그 의미의 빛이 바랜 것은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을 피상적인 것에서 찾으려 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지게 된다.
헌법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법치주의, 삼권분립과 의회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이런 민주적 균형과 조화의 무게 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면 법치는 무너지고 만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로 규정한 헌법이 만들어진 지 77년이 흘렀다. 하지만 국회의 입법권 남용과 독주가 헌법정신을 뿌리 채 흔들고 있는 게 오늘의 정치 현실이다. 헌법정신이 지켜지지 않는 정치 환경에서 해마다 제헌절 공휴일 재지정 논란이 반복된들 제헌절의 진정한 위상과 가치를 회복하는 데 보탬이 되지 않을 것이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