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들레헴이라는 낯선 시골로 시어머니를 따라온 며느리 룻, 행운을 찾거나 행복을 누리려고 온 게 아니다. 하지만 이삭을 주우러 밭에 나갔다가 우연히 보아스를 만나면서 하나님의 헤세드(חֶסֶד)와 파카드(פָּקַד)를 경험한다. 헤세드는 ‘인애’라는 말이고, 파카드는 ‘돌보심’이라는 말이다. 헤세드와 파카드, 이 두 단어는 룻기에 숨어있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중요한 표현이다.
그런데 보아스와의 만남을 성경은 ‘우연’이라고 썼지만 히브리어 ‘미크레’(מִקְרֶה)는 계산된 만남이나 의도된 만남이 아니라 사람의 능력을 넘어서는 사건이나 사태를 일컫는 단어이다. 히브리인들에게 ‘우연’은 생소한 단어, 그들에게는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다. 그러니까 우리말 우연의 개념이 아닌 것,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룻은 아무 생각없이 ‘미크레’로 밭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은 그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시고 당신의 섭리로 이끄셨다. 그래서 이 부분은 우리가 ‘우연’이라 쓰고, ‘하나님의 섭리’로 읽어야 한다.
그 섭리는 야밤 기습 대시라는 무리수를 두며 펼친 룻의 프로포즈를 ‘반듯한 사나이’ 보아스가 조건부로 승낙하면서 꽃이 핀다. 이제 드디어 절차를 거치며 두 사람은 결혼 준비를 끝내고 결혼을 하게 된다. 행운이나 행복을 찾아온 것이 아니지만 절망적이었던 룻에게는 너무 뜻밖의 행운, 행복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건 어머니에게서 복음을 듣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며 영적 주파수를 맞추고 베들레헴까지 따라온 룻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다.
아무개 씨의 고엘 포기
열두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 각 공동체에는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몇 가지 제도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고엘 제도였다. 고엘(גאל)은 ‘무르다’ ‘되찾다’ ‘구속하다’라는 말, 영어로는‘redeemer’ 구속자, 우리 말 성경에는 ‘기업 무를 자’라고 표현했다. 룻기 전체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 중 하나로서 12번 나온다. ‘무른다’는 것은 “사거나 바꾼 물건을 원래 주인에게 도로 주고 돈이나 물건을 되찾다, 이미 행한 일을 그 전 상태로 돌리다”라는 의미이고, redeemer는 ‘저당 잡힌 것을 도로 찾는 사람’을 뜻한다. 원래는 땅과 관련된 용어였다.
가나안에 정착할 때 제비뽑기 형식이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분배받은 땅, 그 땅을 기업, 곧 ‘나할라’(נַחֲלָה)라고 했는데 ‘상속받다’ ‘약속을 취하다’ ‘차지하다’라는 의미니까 하나님이 주신 소유라는 뜻이다. 그 땅을 지키며 거기서 나는 열매로 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신앙을 ‘나할라 신앙’이라 한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땅을 팔아야 할 때가 있는데 그때 작동하는 제도가 바로 고엘 제도였다. 그 땅을 살 권리나 잃은 땅을 찾을 권리가 가장 가까운 친척에게 있다는 것, 이 제도는 가문의 땅을 지키려는 그들에게 꼭 필요한 조치였다.
룻의 결혼도 이 고엘 제도가 배경이 되었다. 특별히 고엘 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계대결혼, 형제가 자녀 없이 죽으면 다른 형제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여 자녀를 낳게 해주는 제도인데 룻기에서는 형제간 계대 결혼이 친척까지로 확대된다.
룻의 청혼은 보아스가 고엘이라는 사실을 안 시어머니의 거사 계획 때문이었는데 문제는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었다는 것이다. 보아스는 순서상 더 가까운 친척의 의사부터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절차를 중시한 보아스, 이게 중요하다. 과정이 어찌 됐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아니다. 결과가 중요한 만큼 과정도 중요하다.
보아스는 더 가까운 친척 아무개 씨와 2절에 보면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함께 앉는다. 법적 하자가 없게 재판을 한 것이다. 고대는 성문 앞 광장이 시장이 되기도 했고, 사람들의 모임 장소가 되기도 했고, 재판 장소가 되기도 했다. 거기 모여 마을 어른들이 마을의 대소사를 처리했던 것이다.
베들레헴의 유력한 부자인 보아스가 그 재판을 주도한다. 성경은 그때 아무개 씨가 마침 지나갔다고 했지만 사실 보아스가 사람을 보내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보아스가 그를 “아무개여 와서 앉으라”고 한다. 틀림없이 이름을 불렀을 텐데 성경은 ‘아무개’라고 했다. 그가 고엘 의무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내가 무르겠다고 했다. 하지만 보아스가 간결 명확하면서도 정중하고 설득력 있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발휘하자 겁이 났던지 고엘 의무를 포기한다. 입장을 바꾼 거다. 재산상 피해가 심각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인데, 시어머니까지 달린 것이 부담되었을 수도 있다.
6절에 보면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라고 하는데 히브리어로 ‘샤하트’(שָׁחַת), ‘망하다’ ‘흔적도 없이 치우다’ ‘무너지다’라는 뜻이다. 의무를 이행했다가는 망할 것 같다는 생각에 포기한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은 부담을 느낀 것이지만 기회를 놓친 것이기도 하다는 거다. 그런데 그의 포기는 보아스의 사랑과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것이란 믿음 때문일 수 있다. 포기가 쉬운 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는 고엘 의무를 지지 않을 경우 가문에서 쫓겨났다. 8절에 보면 아무개 씨가 스스로 신을 벗는 모습이 나오는데 가문에서 지워진 거다. 그래서 성경에 아무개 씨로 기록될 수밖에 없게 된 것, 의무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엘이 된 보아스
아무개 씨의 의무 포기로 우선권을 갖게 된 보아스, 장애물이 제거되자 자신이 그 의무를 지겠다며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당신들이 증인”이라고 선언한다(9-10절). 보아스가 이렇게 자신있게 나선 것은 재산도 넉넉했지만 룻을 향한 사랑 때문이었다.
드디어 룻과 보아스, 원하던 사랑이 이루어진다. 룻이 결혼하게 된 것이다. 보아스가 고엘 의무를 지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인데, 이보다는 룻의 대시, 야밤 기습 청혼이 더 결정적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둘 다 같은 마음, 결혼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게 아니라 꼭 이렇게 멋진 사랑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웬 행복인가? 보아스의 책임지는 사랑으로 이삭을 줍던 룻이 아예 밭 주인이 된다.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지도 못했던 일, 그저 ‘이삭줍기’만으로도 만족이었는데 하나님의 선물은 반듯한 신랑과의 재혼이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최고의 선물이다. 이거다. 하나님은 구한 것도 주시지만 구하지 않는 것도 주시는 분, 내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넘치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은 주는 분이시다(giver).
돌이켜보면 이삭줍기는 가볍게 여기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니 룻에게 있어서 이삭줍기는 슬픔과 절망을 이기는 특효약이었다. 낯선 땅까지 따라오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기가 막힌 상황, 그저 문 닫고 시어머니와 사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울고만 있었다면 어땠을까? 날마다 곡소리만 나는데 누가 좋아했겠나?
우리도 필요하다면 분위기를 바꿔야 한다. 가끔 어려움이 생기면 연락 끊고 잠수 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되나? 오히려 더 꼬이지 않나?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고, 외롭게 지내다 건강까지 잃을 수 있다. 그러면 진짜 대책이 없어진다.
혹시 룻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더라도 이삭줍기부터 시도해 보라. 룻은 밖으로 나와 이삭을 주웠기 때문에 밥맛도 좋아지고, 잠도 잘 오고, 고부간의 대화도 달라졌다. 그리고 결국 이삭 줍다가 좋은 신랑을 주웠다. 우리는 어디서 주워야 할까? 고민되나? 개인적으로 목사인 필자는 교회가 밭이었다. 교회가 포도원이었다.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도 대체로 같은 생각이다. 교회 와서 말씀의 이삭을 줍고, 은혜의 이삭을 줍고, 축복의 이삭을 줍고, 기적의 이삭을 줍는다. 신실하게 이삭을 주워 보라. 그러다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슬픔은 줄어들고 희망이 싹틀 것이다.
룻기는 한 여인 룻의 단순한 재혼 이야기나 나오미의 행복 회복 이야기가 아니다. 룻이 보아스를 만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진정한 웃음을 웃게 될 것이라는 복음, 강력한 복음이 담긴 구약의 복음서이다.
여기서 고엘 제도에 관해 소개하지 않은 한 가지 내용을 더 다룬다. 고엘 제도가 보아스와 룻의 결혼 절차를 진행하게 했는데 이 제도가 복수에도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가족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면 가족이나 친척이 복수하는 것, 고엘은 구속자이면서 또 피의 복수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동 지역이 지금도 늘 복잡한 거다. 그 복잡한 정세가 바로 이 고엘 제도와 관련이 있다. 잘 보지 않았나? 그들은 누군가가 자국민을 죽이면 의무적으로 복수를 한다. 많이 약화 되기는 했지만, 형제국인 중동 국가들은 서로 도울 의무가 있기 때문에 어느 한 나라가 공격을 당하면 형제국들이 일제히 반응하는 거다. 얼마 전까지 계속되었던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서로 공존의 길을 모색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룻기 말씀을 나누며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 했다. 맞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고엘이시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 고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가족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우리 죄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키셨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 그래서 마귀가 무시로 우리를 해코지하더라도 염려 없다. 왜냐하면 그 분이 우리의 고엘이 되시기 때문이다.
결혼과 축복
보아스가 고엘의 의무를 이행하겠다는 책임지는 사랑을 보이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결혼하는 보아스와 룻을 축복한다(11-12절).
드디어 결혼! 여자가 시집갈 때 어떤 사람을 만나 사느냐에 따라 팔자가 달라진다는 ‘뒤웅박 인생’ 룻의 팔자가 달라진다. 한 가문의 대가 끊어지는 것은 그 가문에서 일어나는 일 중 가장 큰 저주요 비극인데 보아스가 드디어 룻과 합법적으로 결혼하게 되었다.
이제 룻은 가게에 흐르는 저주와 가계에 이어진 비극을 끊고 베들레헴 유력자의 아내가 된다. 자기만 좋은 결혼이 아니다. 보아스와 나오미까지 맞게 된 하나님의 헤세드와 파카드의 클라이맥스, 결혼이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와 파카드의 절정이다. 꿈만 같다. 너무 좋다. 할 수만 있다면 필자도 축하를 위해 참석하거나 축의금을 보내고 싶은 너무 멋진 결혼식, 드디어 두 사람이 결혼한다.
1장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schicksal)이 들리고, 3장에서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An die Freude)가 들리더니 이제 4장에서는 멘델스존의 “한 여름 밤의 꿈”의 피날레 “결혼 행진곡”(Wedding March)이 울려 퍼진다. 어떤 교인이 “왜 2장은 노래가 없나요?” 물었다. 생각하다 2장 노래는 룻이 직접 부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
재판과 결혼에 증인으로 참여한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의 혼인을 축복하는데 특별히 룻이 라헬과 레아 같게 해달라고 축복한다. 룻을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처럼 되게 해달라는 것, 룻을 통해 상속자가 태어나서 가문이 명품 가문이 될 것을 기대하며 마음을 다해 축복한 것이다.
여기서 동네 사람들이 언니 레아부터 말하지 않고 이름 순서를 ‘라헬과 레아 같게 해달라’고 축복한 것은 아마 창세기 35:16-19절에 보면 라헬이 베냐민을 낳고 죽어 묻힌 곳이 바로 베들레헴 길이었기 때문일 수 있다.
마무리한다. 중요한 것은 사랑이 이긴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의 사랑은 희생이 따르는 사랑, 그래서 더 감동이 있다. 보라. 나오미를 향한 룻의 사랑은 희생이었다. 그리고 룻을 향한 보아스의 사랑도 희생이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 사랑, 그 사랑은 예수님의 희생이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룻기의 주인공들처럼 예수님과의 사랑을 꽃 피워보라. 그 사랑 때문에 활짝 웃는 진정한 웃음 회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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