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인생은 소풍처럼』이라는 책이 있다. 김달국 님이 쓴 책인데 이미 곁에 와 있는 행복을 몰라보면 안 되고, 지금 이대로를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라는 것을 때로는 깊이 있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쓴 책이다. 저자는 “인생을 소풍으로 생각하자”고 했다. 맞다. 어찌보면 인생은 소풍이다. 하지만 인생이 전쟁인 사람들도 많다. 아침부터 입시전쟁, 출근전쟁, 일터에서의 전쟁, 재테크 전쟁, 인간관계의 전쟁 등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며 산다.

가난한 룻의 인생도 전쟁이다. 과부 시어머니 모시고 사는 젊은 과부, 이삭줍기를 위해 매일 밭으로 나가는 게 소풍인가? 아니다. 전쟁이다. 그런데 이방인이나 과부에 대한 차별이나 편견이 전혀 없는 보아스라는 잰틀맨을 만나면서 인생 역전의 기회를 잡는다. 웬일? 보아스의 파격적인 배려로 인생이 전쟁이 아니라 소풍이 될 가능성이 보인다.

한편 며느리 룻의 이야기를 들은 시어머니 나오미는 마라의 인생, 쓸 뿐만 아니라 완전 빈손이었는데 룻에게 호감을 보인 보아스를 하늘이 내려준 동아줄, 구원자로 여기고, 청혼 작전을 세운다. 자기를 ‘마라’(쓰다)라고 하던 그 나오미가 아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다”(룻기 1:13)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다”(룻기 1:21)며 탄식하던 그 나오미가 아니다.

청혼 작전을 주도한다. 그런데 왕년에 연애 좀 하셨을까? 깜찍하게 대시하라는 건데 너무 지혜롭다. 왜 “한 명의 노인이 사라지는 것은 한 개의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는지 알 것 같다. 나오미는 향후 전개될 일을 빠삭하게 알고 있다. 언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지 디테일하게 대시 작전을 짠다.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며느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면 답이 있고, 사랑하면 길이 보인다는 말 그대로다.

야밤 대시

룻기는 성경이니까 무조건 고상하고 거룩해야 한다는 생각은 좀 내려놓고 읽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성경이 거룩한 경전(Holy Bible)인 것은 맞지만 마치 불륜처럼 보이는 사건들까지 적나라하게 다 기록해 놓았는데 룻기도 그런 전개이기 때문이다.

룻기 1장의 무대가 ‘길’이라면 2장은 ‘밭’이고, 3장은 ‘타작마당’이다. 2장과 3장은 낮과 밤의 대조가 인상적이다. 그 가운데 3장, 타작마당에서 타작하고 그 후에 잔치하는 것에 대해 잘 아는 나오미가 룻과 함께 그날을 D-day로 정하고, 청혼 작전을 펼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찐 먹잇감을 노리는 두 마리의 하이에나 같다(?)고나 할까? 작전의 목적이 명확하다. 룻의 안전과 자신의 노후보장, 이게 청혼이 목적이다.

아마 둘 다 보아스 잡을(?)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보아스는 좀 먼 친척, 의무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만큼 가깝지 않았기에 거절당할까봐 좀 불안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낮에 본인이 직접 만나 정중히 상의하기보다 밤에 치를 거사, 야릇한 청혼 작전을 구상한다. 이름하여 ‘타작마당 야밤 기습’, 깜찍하게 대시해 보자는 거다. 비록 음탕한 대시로 여길 위험 부담이 클지라도 단판 승부를 짓겠다는 매우 적극적인 작전이다.

방식은 성적 유혹, 가난한 나오미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런데 적나라한 육탄 공세, 19금 수준의 작전임에도 불구하고 평소 시어머니께 늘 절대 순종적인 룻이 군말없이 따른다. 작전은 디테일하다. 보리 추수를 마치는 날 잔치할 때 미리 목욕하고, 몸에 향수 뿌리고, 야시시한 옷을 입고, 타작마당 적당한 곳에 숨어있다가 타작이 끝나면 보아스가 눕는 곳을 잘 보고 술에 취해 누우면 보아스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라는 거다(3:4).

룻이 그 작전 명령에 그대로 따른다(5-6절). “어머니, 아무리 우리 형편이 어려워도 어떻게 그래요. 이건 아닌 것 같아요”가 전혀 없다. 드디어 작전 게시! 시어머니의 명령 하에 룻은 작전대로 실행한다.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더라”(7절). 후덕한 시어머니의 인격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사랑이었기에 따랐을 것이다. 거절당하거나 창녀 취급당할 수도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야밤 기습 대시, 그냥 옆에 누운 게 아니다. ‘발치 이불을 들고’라고 번역했는데 이불이 아니다. 히브리어로 ‘레겔’(רגל), 아랫도리를 들치고 누웠다는 것, 주도적으로 남자 품을 파고드는 노골적인 대시, 이건 도발이다. 사랑이 고팠을까? 아니 그것보다는 ‘미래의 안전’과 시어머니의 ‘노후보장’ 때문이다.

한편, 술에 취해 자던 보아스는 누군가 자기 몸을 더듬자 기겁하며 묻는다. “네가 누구냐?”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8절). 세상에, 자기 눈에 들었던 그 젊은 색시 아닌가? 대략 난감, 꿈도 아니고 완전 19금에 나오는 복장으로 자기 품에 누워있다. 보아스가 룻의 대시를 받아줬을까? 어떤 사람들은 두 사람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며 “잰틀맨 보아스, 현숙한 룻? 말도 안 된다”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룻을 알아본 보아스는 “오메 좋은 거” 그러지 않았다. 차분하다. 낮에 불렀던 그대로 “내 딸아” 그런다. 그리고 먼저 축복한다.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10절). 그는 여전히 관대하고 자상하다. 안전을 고려하고, 누가 보고 룻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낼까봐 충분히 배려한다. 새벽에 보내는데 그냥 보내지 않는다(13-15절). 창녀 취급하거나 서방질 취급하기는커녕, 곡식을 지워준다. 감동이다. 이게 진정한 사랑 아닐까? 사랑은 주되 더 주는 것, 보아스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히 수습한다.

물론 이 룻의 야밤 대시, 선한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걸 우리 시대, 우리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 우리 기준으로는 부도덕이고 불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사건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이 사건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를 드러낸다.

구약성경 창세기 38장에 보면 유다의 맏며느리 다말이 매춘녀로 변장하고 시아버지에게 접근해 동침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룻의 대시와 비슷하다고 할까? 우리 시대, 우리 기준으로 보면 무조건 부적절한 관계였지만 그때 태어난 아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로 이어진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쌍둥이)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마1:3). 다말의 행동이 결국 ‘의로운 파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말이 남편 엘을 악하다고 하나님이 죽이시자 그 동생 오난과 계대결혼을 하는데 오난 역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하나님이 죽이신다. 그런데 셋째 아들 셀라도 죽을까봐 시아버지 유다가 셀라와 계대결혼을 못하게 하자 다말이 기업을 잇기 위해 매춘녀로 변장해서 시어버지와 동침한다. 조선시대 기준으로 보면 짐승만도 못한 짓이다. 하지만 다말의 임신을 알고 불태워 죽이라며 노발대발했던 유다가 그 아이가 자기 아이란 사실을 확인하고는 다말이 옳다고 한다(창38:26).

룻의 야밤 대시가 비슷한 측면은 있지만 함부로 “보아스도 남자잖아” 그러면 안 된다. 신중한 보아스, 책임을 중시하는 보아스는 결코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야밤 대시에 대해 두려워하고, 미래를 불안해하는 룻을 안심시키고 칭찬해준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11절). ‘현숙한 여인’이라 한다. 마음과 행동이 조신하고 순결한 현모양처, 요조숙녀 같은 여인이라는 뜻이 아니다. 히브리어는 ‘하일’(חַ֖יִל), ‘힘이 있다’는 뜻이다. 조신한 여인이 아니라 의리 있고 집안을 잘 먹여 살리는 ‘힘있는 여장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보아스가 룻을 ‘현숙한 여인’이라고 한 것은 ‘넌 잘해낼 것’이라는 칭찬으로 볼 수 있다. 70인역에 의하면 ‘남자 같은 여자’로 번역한 ‘현숙한 여인’, 심지가 굳고 믿을만한 여인이라는 말이다. 집안을 일으킬만한 현숙한 여인 룻과 신중하고 관대한 잰틀맨 보아스의 타작마당에서의 깊은 만남, 그 운명적인 만남은 이렇게 룻의 야밤의 깜찍한 대시로 성사되었다.

승낙

보아스는 몰인정하게 내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룻의 초강수 청혼 요청을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받기 위해 왔구나” 그런다. 2장 12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었는데 3장 10절에서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한다. 보아스는 룻을 하나님의 헤세드(은혜)로 이끌고 있다. 그리고 더 가까운 아무개 씨 의사부터 묻고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조건부이기는 하지만 청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승낙한다(13절).

어떤 사람들은 보아스는 아무개 씨가 그 책임을 이행하지 않을 것을 계산했던 것 같고,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해서든 포기하게 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룻을 사랑했다는 뜻이기는 하지만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하면 안 된다. 자꾸 이상한 눈으로 보면 사람들이 다 이상해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잘못된 습관이 될 수도 있다.

단순히 기업 무를 책임을 지지 않으면 수치를 당할까봐 내린 결정이라기보다 그의 승낙은 사랑이다. 환대가 꼭 필요한 결정적인 순간, 보아스는 부담이기도 한 고엘, 구속자의 책임을 지기로 한다. 형식적 환대가 아니다. 결국 이 환대는 새역사를 창조한 온전한 환대가 된다. 여기서 다시 룻기의 주제가 반복된다. 그 주제가 바로 인간의 환대를 통해 하나님의 환대가 실현된다는 것이다. 두 단어가 이를 잘 드러낸다. ‘날개’(9절)와 ‘인애’(10절)라는 단어다. 먼저 9절에,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라고 했는데 말씀에 근거한 믿음으로 호소한 것이다. ‘당신의 옷자락’은 ‘당신의 날개’로 번역할 수 있는데 날개의 히브리어는 카나프(כָּנָף), 하나님의 보호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다. 야밤 침입자 룻의 날개가 되기로 한 보아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 예수님이 우리의 날개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서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10절), ‘인애’는 헤세드(חֶסֶד), 룻이 나오미에게 선대했던 것도 헤세드였는데(1장) 지금은 자기 몸을 바쳐 시어머니 나오미의 노후를 보장하려 한다. 나오미를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가 룻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보아스가 룻과 나오미에게 헤세드를 베풀면 이 헤세드가 보아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된다. 그렇다면 절망 가운데 사는 두 과부의 삶과 베들레헴 지주 보아스에게 결정적 터닝포인트, 울던 두 인생이 마음껏 함박웃음을 웃는 인생으로 바뀌고, 시골 지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상상도 못했던 빛나는 이름이 된다. 고엘제도가 보아스와 룻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된 것이다.

구원사 잇기

나오미와 룻의 청혼 작전은 가난한 여자가 부자와 결혼해 신분 상승하는 드라마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청혼 작전이 하나님의 구원사 잇기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부유한 지주였던 보아스는 룻을 ‘내 딸아’라고 불렀다. 보아스가 나이 든 어른이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룻과 결혼한 것을 볼 때 싱글남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일부다처제였기에 결혼남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현대적 기준으로 보아스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고, 또 룻을 신데렐라 콤플렉스의 전형으로 비하하는 것도 옳지 않다.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당시는 여성들의 활동이 제약되고,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거의 노예 취급을 받던 고대 사회였기 때문이다.

또 룻을 단순히 가부장제 하의 ‘효부, 순종적 여성’으로 보는 것도 그저 성경의 변두리라고 할까? 전혀 핵심이 아니다. 룻은 이미 베들레헴으로 따라나설 때 연령, 민족, 종교의 차이를 뛰어넘는 운명적 연대를 감행했다. 그리고 결코 ‘그른 선택’을 했던 동서 오르바나 밧세바, 마르다, 가룟유다 같은 ‘그림자 캐릭터’가 아니다. 룻은 필사적으로 오직 ‘생존을 위한 작전’을 펼쳤던 것이다.

이 행동을 여성신학자 필리스 트리블(Phyllis Trible)마저 “전적인 용기로 인한 구원”이라고 평가했다. 필리스 트리블은 우리가 가장 사악한 여인으로 평가하는 이세벨마저 가부장적 규범과 종교적 전통에 과감히 도전한 여성으로 높이 평가해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구약학자지만 맞는 말이다. 룻의 이 작전은 거절당할 수 있는 육탄 공세, 꽃뱀이나 창녀 취급당하거나 독한 여자로 낙인찍혀 쫓겨날 수도 있는 무모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평판이 나빠진다면 더 이상 베들레헴에서 살 수도 없었을 위험 부담이 큰 대시였다. 그러니 이 작전은 죽기를 각오한 용기 있는 행동, 모험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보아스가 누군가를 생각해야 한다. 룻기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어머니가 라합이다. 라합은 여리고의 창녀였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을 숨겨주며 자기 가족을 살리고 하나님의 구원사를 잇는, 예수님의 계보에 나오는 영웅이기도 하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마1:5).

그래서 룻의 이 청혼 작전을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은 용기와 모험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룻과 보아스의 만남이 그리스도와 우리의 만남을 상징한다고 본다. 룻의 청혼이 하나님의 구원사를 잇고 우리의 갈망까지 채우는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룻처럼 분명한 용기와 결단으로 주님의 품에 안긴다면 그게 바로 인생 최고의 행복이 될 것이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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