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딜런 버로스 박사의 기고글인 ‘문자 그대로 아담과 하와를 믿는 것이 중요한 이유’(Why believing in a literal Adam and Eve matters)를 1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딜런 버로스 박사는 스탠딩 포 프리덤 센터(Standing for Freedom Center)에서 글을 쓰고 리버티 대학교의 존 W. 롤링스 신학대학원(Liberty University’s John W. Rawlings School of Divinity)에서 겸임 강사로 일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미국 종교지도자 국가조사(National Survey of Religious Leaders) 결과에 따르면, 가톨릭 및 주요 개신교(메인라인) 교단의 목회자 중 오직 25%만이 아담과 하와가 실제 역사적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믿는다고 응답했다. 복음주의 계열 목회자들의 수치는 다소 높지만, 여전히 상당수가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대해 의문을 품거나 불확실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것이 성경 전체의 흐름 속에서 부차적인 신학적 쟁점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아담과 하와가 실존 인물이었는지 여부는 성경의 권위, 원죄 교리, 예수님의 가르침의 신뢰성, 그리고 복음의 기초와 직결된 중대한 문제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를 비유적 상징이 아닌,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창조하신 실존 인물로 묘사한다. 창세기 2장 7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고 기록한다. 이 구절은 신화나 우화의 문체가 아니다. 인류의 기원을 명확하고 의도적으로 서술한 내용이다. 창세기 2장 22절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묘사는 역사적 주장이다. 창세기의 언어는 명백히 묘사적이고 인격적이다. 아담과 하와를 허구적 원형으로 간주하는 것은 성경의 내러티브 자체를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해석이 기독교 교리 전반에 미치는 연쇄적 영향이다. 아담과 하와가 실존하지 않았다면, 타락도 없고, 원죄도 없으며, 따라서 구원자에 대한 필요도 사라진다. 사도 바울은 아담의 죄를 역사적 사실로 간주하며, 그로 인해 구원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로마서 5장 12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말한다. 이는 단순한 철학이나 은유가 아니다. 실제 사건에 기반한 신학적 주장이다.
바울은 두 실존 인물, 곧 불순종으로 죽음을 가져온 아담과, 순종으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조한다. 로마서 5장 19절은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한다. 만약 아담이 실제 인물이 아니라면, 바울의 복음 메시지 구조는 붕괴된다.
예수님 또한 창세기의 역사성을 인정하셨다. 마태복음 19장 4절에서 “창조주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 함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말씀하시며,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근거로 결혼의 신성함을 강조하셨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누가복음 3:38). 만약 아담과 하와가 허구라면, 성경의 족보와 복음서의 역사적 연속성은 단절된다.
그렇다면 왜 많은 목회자들, 특히 메인라인 교단 지도자들은 이러한 기초적 본문들을 재해석하려 하는가? 이는 종종 진화론이나 기적에 대한 현대적 회의주의와 성경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은 많은 기독교 대학과 신학교에서는 창세기를 역사보다 상징으로 읽도록 가르쳐왔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성경을 지적으로 더 수용 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와는 달리, 본문이 전달하려는 의미를 침식시킨다. 과학 이론과 충돌하는 부분을 상징으로 처리한다면, 우리는 성경의 일관된 진리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이것은 과학 대 신앙의 문제가 아니다. 성경 권위의 문제다. 잠언 3장 5절은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현대 문화의 압력에 따라 성경의 어느 부분은 문자로, 어느 부분은 상징으로 임의적으로 결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서 3장 1절은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고 충실히 가르칠 책임이 있다. 아담과 하와를 허구로 간주하는 것은 지성인들의 인정을 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성도들을 오도하며 구원의 메시지를 훼손한다. 성경의 첫 세 장을 믿을 수 없다면, 성경 전체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아담과 하와의 실존에 대한 믿음은 목회적으로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성도들이 인류의 첫 남녀를 상징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성경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의심은 바이러스처럼 확산된다. 창세기의 타락이 신화라면, 예수의 부활은 어떤가? 죄가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은유라면, 예수의 죽음은 왜 필요했는가? 아담이 없었다면, 죄도 없고, 은혜도 필요 없다.
NSRL 자료는 이 같은 현실을 보여준다. 메인라인 개신교 목회자들은 복음주의, 흑인 개신교, 가톨릭 목회자들에 비해 역사적 기독교의 핵심 교리에 대한 신념 수준이 훨씬 낮다. 예를 들어 성공회, 감리교 등 메인라인 교단 목회자 중 오직 70%만이 하나님을 확신 있게 믿으며, 예수의 몸의 부활을 믿는 비율도 75%에 불과하다. 지옥의 존재를 믿는 이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의 주권, 원죄, 성경 권위, 인간 본성 같은 가장 기초적인 교리조차 의심하거나 확신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성도들이 빠르게 신앙을 잃는 것은 시간문제다.
성경의 진리를 경멸하는 시대에, 우리는 신학의 기초를 결코 양보할 수 없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7절에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진리는 창세기의 사람 창조를 포함한다.
기독교는 실제 사건들인 창조, 타락, 성육신, 십자가, 부활에 뿌리를 둔 신앙이다. 그 역사성을 제거하면, 복음의 능력도 사라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가르치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필요하다(사도행전 20:27). 우리는 성경의 처음 아담부터 마지막 아담(예수 그리스도)까지, 전 성경의 진리를 확언하는 교회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아담과 하와의 실존을 부정하는 것이 단지 고대 역사에 대한 해석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을 흔든다는 사실을 아는 신자들을 필요로 한다.
이 싸움은 문화 전쟁에서 이기기 위함도 아니고, 회의론자들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에 충실하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신화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로 탄생한 첫 번째 남자와 여자이며, 죄가 세상에 들어온 통로였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인류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이야기를 위한 무대였다. 따라서 이 진리는 믿을 만한 가치가 있고, 반드시 지켜야 할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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