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빌리 통일 컨퍼런스
이덕주 박사가 강의하고 있다.©노형구 기자

주빌리통일구국기도회가 ‘광복 80년, 한국교회의 과거와 미래를 잇다’라는 주제로 6일 숭실대 한경직기념관에서 통일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이날 주제 발제자로 나선 이덕주 박사(감신대 명예교수,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사장)는 ‘통일 이후 한반도 신학 모색: 손정도 목사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그는 “길선주 목사는 평양 장대현 교회를 세웠다. 평양 부흥의 시작점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산정현 교회를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서 신사참배 거부 등 순교의 산실이었다. 손정도 목사는 남산현 교회를 세웠다. 이곳은 독립 운동가들의 산실이었다”고 했다.

이어 “손정도 목사는 한 기독교인의 전도를 받고 상투를 자르고 산당을 훼파했다. 가족들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고 평양 숭실학당에 입학했고,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을 경험했다. 성령과 거듭남의 체험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손정도는 학생 전도자가 돼서 인천 내리교회 부흥사로 활동했다. 손정도는 민족의식에 투철해서 남산현교회에서 새벽마다 기도를 하던 중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을 응답으로 받았다”며 “그는 이 말씀을 일본에 빼앗긴 대한제국의 국권이 회복될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고, 결국 예수 증인 사역이 나라 사랑의 핵심이라고 결심했다”고 했다.

아울러 “손정도 목사에게 땅끝은 만주와 중국이었다. 1910년 북경 선교사로 파송돼 중국인들을 상대로 복음을 증거했다. 그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독립운동을 허락하실 것으로 여겼다”고 했다.

주빌리 통일 컨퍼런스
이덕주 박사©노형구 기자

이 박사는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손정도 목사는 그러나 1925년 상해임정의 내부 분투에 질려 호조 운동을 시작했다. 즉 도산 안창호 선생과 함께 ‘네 것 내 것 가리지 않고 마을에서 함께 살고 물건을 통용하는’ 이상촌 운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또한 “주식회사인 농민호조사를 세워 10만 평 토지를 구입했고, 만주 유랑 동포들을 모아 농장을 운영했다”며 “그때 북한 초대 주석 김일성을 만나 사택에서 4년간 그를 도왔다. 당시 김일성은 유물사상을 접하기 전, 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때였다”고 했다.

그는 “손정도는 식민 통치로 자주권을 잃은 나라를 포기하지 않고 이념과 생각이 달라도 함께 사는 대동사회를 꿈꿨다”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꿈꿨던 샬롬 사상이다. 성경과 그리스도가 꿈꾸는 나눔은 공산주의와 달리 자발적 사랑에 기초한다”고 했다.

유관지 목사(북녘교회연구원 원장)가 좌장으로 나선 토론에서 하충엽 숭실대 기독교통일지도자센터장은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했지만 실패했다. 이덕주 박사는 기독교 사회주의가 남북 간의 화해와 일치가 필수 조건인 통일 이후 한반도 신학의 한 모형으로서 가치와 역할이 있을 것으로 제시했다”며 “사회주의가 한국 기독교계에 반감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손정도의 농민호조사를 통한 기독교 사회주의는 사도행전 2장에서 서로의 소유를 공유한 오순절 성령공동체의 발현으로 해소하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덕주 박사는 이것을 기독교 사회주의로 해석한 것이다. 손정도는 국권 회복을 위해 민족주의 사회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고 충돌을 완화하는 중재자 정신을 강조했는데, 이는 용서와 화해를 추구하는 기독교 정신으로서, 이와 같은 포용적 사고가 치열한 갈등을 겪는 한국교회에 시사점을 던진다”며 “분단을 통일로 전환할 포용적 인성을 갖춘 통일 지사가 한국교회에서 나타나길 바란다”고 했다.

주빌리 통일 컨퍼런스
(왼쪽부터) 하광민·하충엽 교수, 유관지·이덕주 목사©노형구 기자

하광민 총신대 통일개발대학원 교수는 “손정도 목사는 만주의 가난한 동포들을 위해 호조 정신을 바탕으로 한 물질적 나눔이자 이웃 사랑을 전제로 한 경제적 정의 실천 운동으로서 농민호조사를 설립했다”며 “이 운동은 △생산 협동 △교육 협동 △풍화 향상 △보위 안전의 네 가지 영역에서 전개됐고,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공동체 모델을 제시한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중심이 되어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마을공동체 등 대안적 경제 모델을 실험하고 발전시키는 데 영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손정도 목사와 비슷한 예로 1948년 여순사건의 가해자였던 빨치산의 시체를 지리산에서 앞장서서 묻어주었던 조동진 목사를 들 수 있다. 이는 북한과의 접촉을 통한 북한선교의 근간을 마련하는 경험을 하게 됐다. 한국교회가 통일 과정에서 남북 간의 대화와 화해를 위한 가교 역할을 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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