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내외 통상 현안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가운데, 최근 진행된 한미 관세 협상에서 미국 측이 한국의 소고기 수입 제한과 쌀 고율관세 체제를 '비관세 장벽'으로 규정하고 이를 철폐할 것을 강하게 요구한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정부는 관련 부처를 중심으로 협상 대응팀을 꾸려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대응에 나섰다.
복수의 관계부처에 따르면,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현지 시간)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린 한미 국장급 관세 기술 협의에서 미국 측은 한국이 유지하고 있는 여러 비관세 조치들을 문제 삼으며 그 해소를 요구했다. 주요 쟁점으로는 30개월 미만 소고기만 수입하도록 제한한 조치, 쌀에 부과되는 513%의 고율 관세 체제, 수입 차량에 대한 배출가스 규제, 정밀지도 반출 제한 등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자원부 고위 관계자는 지난 26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진행된 비공식 백브리핑에서 “이번 협상에서 미국 측이 자국의 국가별 무역장벽(NTE) 보고서에 언급된 비관세 장벽 문제를 주요 의제로 내세웠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난 3월 공개된 미국 무역대표부(USTR)의 NTE 보고서에는 ‘30개월 이상 미국산 소고기 수입 금지’가 미국 상품의 한국 시장 접근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비관세 장벽으로 지적돼 있다.
이 조치는 2008년 이른바 ‘광우병 사태’ 이후 도입된 것으로, 당시 한국 정부는 국민 불안과 수입위생 조건 등을 고려해 미국산 소고기의 수입 기준을 ‘30개월 미만’으로 설정했고, 현재까지도 이 기준은 유지되고 있다. 미국은 이 제한을 철폐하지 않으면 미국산 쇠고기의 수출 확대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쌀의 경우, 한국은 고율의 기본관세 513%를 유지하고 있으나, 세계무역기구(WTO)와의 협상 결과 저율관세할당물량(TRQ) 40만8700톤에 대해서는 5%의 낮은 관세를 적용하고 있다. 이 가운데 미국은 13만2304톤의 TRQ 물량을 배정받고 있으나, 그 이상의 수출에 대해서는 500%를 넘는 고율 관세가 적용돼 실질적인 수입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불만을 제기해 왔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지난달에도 한국의 쌀 관세율을 지적하며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출한 바 있다.
FTA 체결 이후 대부분의 품목에서 양국 간 관세가 철폐된 상황에서 미국은 이 같은 비관세 요소들을 새로운 통상 협상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산 농축산물의 한국 시장 확대를 노리는 움직임은 이번 협상에서도 분명히 드러났다는 평가다.
박석재 우석대학교 경영학부 교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은 ‘미국우선주의’를 앞세워 무역적자 해소를 위한 통상 압박을 본격화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과는 이미 FTA를 통해 대부분의 관세가 철폐된 만큼, 남은 비관세 장벽을 집중적으로 겨냥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산 소고기나 쌀은 국내 민감 품목이자 상징성이 큰 분야이기 때문에 더욱 협상 우위를 점하려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재정부 등 유관부처와 함께 대미 협상 대응팀을 꾸리고 구체적인 시나리오별 대응 전략을 마련 중이다.
농식품부 고위 관계자는 “미국 측의 요구가 TRQ 물량 확대인지, 고율관세 자체의 철폐 요구인지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내부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며 “정부는 국익을 우선으로 하되, 농업 분야의 민감성도 충분히 고려해 협상에 임하겠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이번 한미 관세 협상이 단순한 기술적 조정에 그치지 않고, 국내 농업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구조적 개방 압박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특히 쌀과 소고기처럼 국민 정서와 밀접한 품목에 대해 협상이 이뤄질 경우, 여론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이번 협상은 단순한 무역기술 협의가 아니다. 민감 품목에 대한 구조적 개방을 압박하는 흐름이 될 수 있다”며 “정부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레드라인'을 명확히 설정하고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고기 수입 개월령 완화나 쌀 관세 체계 변화는 국내 농가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며 “정부는 소비자 안전과 농업 보호라는 두 축 사이에서 신중한 균형점을 찾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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