롭 브루넌스키 박사
롭 브루넌스키 박사.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롭 브루넌스키 박사의 기고글인 ‘설교자 여러분께: 성경을 매력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Dear preachers: Stop trying to make the Bible attractive)를 지난 29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브루넌스키 박사는 애리조나주 글렌데일에 있는 데저트 힐스 성경 교회의 목사 겸 교사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설교자로서 필자가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주일은 부활절 주일이다. 부활절은 평소에는 교회 문턱조차 넘지 않던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날이기에, 예배당은 1년 중 가장 많은 인파로 가득 찬다. 나는 여전히 죄 가운데 죽어 있고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이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을 누린다.

그러나 해마다 많은 목회자들이 부활절 설교의 중압감 아래 무너지는 모습을 본다. 회중과 연결되기 위해, 십자가의 거침을 줄이기 위해, 혹은 불신자들을 믿음의 고백으로 이끌기 위해, 목사들이 강단에서 심각한 발언을 하기도 한다.

어느 부활절 주일 예배에서, 한 목사는 '파스칼의 내기(Pascal's Wager)'를 중심으로 설교를 전했다. 이 철학적 주장에 따르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결과적으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틀렸다면, 믿는 이들은 죽은 뒤 그저 존재를 멈추는 것일 뿐 손해볼 것이 없다. 하지만 기독교가 참이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 이후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 믿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필자는 훗날 깨달았다. 파스칼의 내기는 사람들이 단순한 위험 분석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오해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지옥 불을 피하기 위한 보험에 드는 것이 아니다. 회심은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죄인의 마음이 변화되어 그리스도를 단순한 보험이 아닌, 영광스럽고 아름답고 거부할 수 없는 구주로 인식하게 되는 사건이다.

신앙이 어린 고등학생이라면 이런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목회자에게 그런 무지는 용납되지 않는다.

또 다른 부활절 예배에서는, 한 목사가 기독교 교리를 복잡하게 느끼는 회중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예배 후 한 청년이 제게 와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삼위일체를 꼭 믿어야 하나요?’ 그 청년은 몰몬교에서 자랐고, 교리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어요. 저는 이렇게 말했죠. ‘아니야. 예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을 위해 죽으셨고, 당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으면 돼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그는 회중에게 삼위일체 신앙이 예수님을 믿는 데 필수가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다.

복음에 불필요한 장벽을 제거하려는 열망은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어떤 장벽은 꼭 필요하다. 삼위일체는 그런 필수 교리 중 하나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피조물도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보다 열등한 신성한 존재도 아니다. 그분은 '참 하나님으로서 오신 말씀'이시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삼위일체를 완벽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 누구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 교리를 믿어야 한다. 만일 어떤 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삼위일체를 부정한다면, 그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유명한 메가처치 목사 앤디 스탠리는 최근 부활절 설교에서 회의론자들에게 호소하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축소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성경이 그렇게 말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부활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훌륭한 책을 갖게 된 것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성경도 없고, 교회도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태처럼 부활을 직접 목격한 이가 1세기에 그것을 기록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는 이어 다른 목격자들의 이름을 나열하며 그들 모두가 부활에 대해 기록했음을 강조했다. 그의 주장은 성경 자체보다는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이 믿음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의론자들이 성경을 회피하더라도, 목격자들의 증언만큼은 무시할 수 없게 만들려는 전략이다.

그러나 스탠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간과했다. 그가 언급한 목격자들의 증언은 오직 성경 안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마태, 마가, 베드로, 누가, 바울, 요한, 야고보 등 그 어떤 사람의 기록도 신약성경을 벗어나 존재하지 않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접근이 인간의 증언을 하나님의 영감보다 더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우리가 마태나 바울, 베드로의 증언을 신뢰할 수 있는가? 사람의 증언에는 언제나 오류가 섞이기 마련이다. 베드로조차 이를 인식하고, 베드로후서 1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LSB) 그는 변화산에서의 체험을 말한 뒤, 그 체험보다 더 확실한 것은 성령께서 감동하신 예언의 말씀이라고 강조했다. 즉, 사도들의 증언이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성령의 감동 아래 기록한 영감된 성경이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인간의 증언을 성경과 분리하려 하면서 오히려 성경의 신뢰성을 약화시키고 말았다. 비록 회의론자들을 설득하려는 의도가 있었겠지만, 그의 방식은 결함이 있고, 위험하며, 파괴적이다.

이 세 가지 사례는 부활절 주일마다 반복되는 심각한 문제를 보여준다. 설교자들이 영혼을 얻기 위한 부담감에 사로잡혀 중요한 교리들을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설교는 불분명하거나 심지어 비성경적으로 흘러가며, 회중은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 더 큰 혼란을 안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설교자들은 부활절이든 그 어떤 주일이든 이런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 1:16) 구원의 능력은 설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 자체에 있다. 설교자는 위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압박, 진리를 불쾌하지 않게 전달해야 한다는 압박, 교리를 축소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낄 필요가 없다. 단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명확하게 선포하면 된다. 복음을 분명히 전할수록 설교는 더 강력해진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교묘한 말재주가 아니라,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다.

다가오는 부활절, ‘관련성 있게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 ‘재미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으라. 가득 찬 예배당을 제대로 활용하고 싶다면, 단순히 복음을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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