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입니다.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입니다. 당신 나지막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콧노래 한 구절이면/ 한 아름 바다를 안은 듯한 기쁨이겠습니다” 나태주님의 ‘선물’이란 시다.

‘선물’이라는 또 다른 시에서 ‘하루하루가 선물’이라 했던 시인은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밝은 햇살과 새소리, 맑은 바람과 푸르른 산을 선물로 여겼고, 서럽게 뱀꼬리 흔들며 사라지는 강물을 보면서도 선물로 여겼으며, 한낮의 햇살 받은 잎사귀 넓은 나무들과 길가에 깔린 이름 없는 풀꽃 하나하나도 다 선물로 여겼다.

그런데 이 시에서도 ‘오늘이 가장 큰 선물’이라 했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눈물로 맞은 부활절도 그랬을 것이고, 유대인들이 두려워 모인 곳의 문을 닫고 있다가 다시 살아난 몸으로 찾아오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제자들이 맞았던 그날도 그랬을 것이다.

‘가장 큰 선물인 오늘’에 이어서 시인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이라 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던 막달라 마리아나 제자들이 고백할만한 표현이다. 예수님은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이라고 노래한 나태주 님의 바로 그 당신, 최고의 선물이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선물을 들고 오셨다. 어떤 선물인가?

평강

19절에 보면,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셨다’고 했다. 그렇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은 찾아오신 것이다.

본래 예수님은 기다리는 분이 아니라, 찾아다니시는 분이다. 이 세상에 오신 것도 죄인들을 찾아오신 거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32), 제자를 부를 때도 먼저 찾아가셨다. 바닷가로, 세관으로... 무엇을 말하나? 우리 만남의 주도권이 주님께 있다는 거다. 돌이켜 보면 언제나 주님이 먼저 찾아오셨다. 우리를 사랑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주님이 먼저,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손잡아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로 사는 것이다.

부활 이후에도 주님은 먼저 제자들을 찾아주셨다. 본문은 유대인들이 두려워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제자들을 예수께서 찾아오신 이야기다. 그런데 빈손이 아니다. 선물을 들고 오셨다. 그 첫 선물이 바로 ‘평강’이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샬롬 알레헴”, 19절과 21절에 두 번 연거푸 말씀하신 것, 평강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히브리어로 ‘샬롬’(שָׁלוֹם), 헬라어로 ‘에이레네’(Είρήνη),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인사말로 쓰는 단어지만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던 제자들에게는 최고의 선물이다. 분위기를 확 바꾸는 말씀, 공포가 기쁨으로 바뀌었다.

오래 되기는 했지만 ‘직장 생활’과 ‘감옥’을 비교한 유머가 있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현실이다. “감옥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로 8피트 세로 10피트의 방에서 보내는데 직장에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보다 더 작은 칸막이에서 보낸다. 감옥에서는 하루 종일 TV 보고 게임을 즐길 수 있지만 직장에서는 그렇게 하면 짤린다. 감옥에서는 품행이 좋으면 더 많은 자유시간을 얻지만 직장에서는 품행이 좋으면 더 많은 일거리가 주어진다. 감옥에서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만 쇠사슬에 채우지만 직장에서는 항상 쇠사슬에 매여 있다. 감옥에서는 경비원이 문을 열고 닫아주지만 직장에서는 내가 열고 닫아야 한다. 감옥에서는 하루 세끼를 꼬박꼬박 먹지만 직장에서는 바빠서 굶기를 밥먹듯이 한다. 감옥에서는 가족과 친구들과 면회를 할 수 있지만 직장에서는 친구들과의 잡담조차 눈치를 봐야 한다.” 40세에 이혼한 후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에 사업실패로 파산지경까지 몰렸다가 뉴멕시코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성경을 파고 들었던 로리 베스 존스(Laurie Beth Jones)의 『Jesus CEO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공감하는 직장인이 많다. 그래서 직장에 나가는 사람들은 기쁨도 없고 의욕도 없는 것 아닌가?

대체로 직장은 마치 제자들이 문을 닫고 숨어 있던 다락방처럼 분위기가 무겁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도 그렇다고 한다. 갑갑해 숨이 막힐 지경이라는 거다. 달라져야 한다. 그 방법이 본문에 나와 있다.

본문의 시작은 어두움, 가라앉은 분위기, 공포 분위기다. 극도의 불안과 공포로 떨고 있는 제자들, 그들은 문을 닫고 있었다. 예루살렘에 득실거리는 대제사장, 바리새인, 로마군병, 총독. 헤롯의 세력들, 그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문을 잠근 거다. 폐쇄성,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은 제자들의 마음 상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곳에 예수님이 오셨다. 누가 문을 열어드렸는지 예수님이 닫힌 문 사이로 아무 흔적 없이 들어오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은 부활의 주님께 닫힌 문은 하등의 장해가 되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주석가 매튜 헨리(Matthew Henry)는 “‘어떤 문도 그리스도의 임재를 막을 수는 없다”고 했다.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오시자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거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4P 중 하나인 Peace를 주신 거다. 더욱이 20절에 보면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추측건대 잠시는 놀람이었을 것, 그런데 이제는 기쁨이다. 평강이 넘친다. 이게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주님, 제자들을 찾아주셨던 것처럼 저를 찾아 주십시오” 그래야 한다. ♬ 내 주님 없인 난 못 살아 내 주님 없인 안돼 닻 없는 배처럼 흔들려 주님 없인 난 못살아, 예수 오 예수 당신은 아는가 그를 아시는가 오 예수 오 예수 주님 없인 난 못살아 ♬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 그렇다. 예수님이 아니면 안 된다.

재물은 편리함을 가져다 주지만, 참된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옛 소련의 스탈린은 밤마다 두려워서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그의 저택에는 그의 전용 침실만 8칸이 있었는데 날마다 방을 바꿔 가면서 잤고, 그 집만으로 부족해서 곳곳에 많은 별장을 만들어 놓고 옮겨다니면서 살았단다.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그의 인생은 잘 지은 감옥과 같았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 불안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거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샬롬이라는 선물을 들고 찾아와 그 끊어진 관계를 이어주신다. 화병에 담긴 꽃 되지 말고 대지에 뿌리내린 꽃이 되자. 그래야 꽃이 지고 잎이 떨어져도 걱정이 없다. 뿌리를 내린 꽃은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바람이 불더라도 두려움과 걱정 근심을 이기고, 평강을 누려야 한다.

죄 사함

제자들의 마음이 두렵고 무거웠던 이유는 예수님을 잃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돌아가셨다. 너무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빌라도와 대제사장의 세력이 너무 두렵다. 자신들도 잡히면 예수님처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것, 자신들의 죄가 더 큰 문제였다. 비겁하게 사랑하던 선생님을 버리고 도망친 것, 모두가 다 배신자다. 심지어 베드로는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미래도 불투명하다. 예수님 한 분 바라보고 살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예수께서 평소에 부활을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지 못했다. 이제는 믿어도 예수님을 찾아갈 수 없다. 무슨 염치로 찾아가겠나?

그런데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절), 부활하신 예수께서 놀라운 선언을 하셨다. 죄 사함! 예수님은 제자들의 죄를 씻어주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누구든지 용서하면 그 죄가 사하여질 것이라고 하신다.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4P 중 하나인 Pardon, 용서해 주신 거다.

훗날 일어나는 일이지만 스데반 집사님이 돌에 맞아 순교하실 때 바울 사도가 그 증인이었다. 순교하실 때 스데반 집사님은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 중보기도 하셨다. 이런 말도 있기는 하다. 누군가가 한 말인데 스데반 집사님이 천국에서 “하나님, 저 바울을 꼭 천국에 오게 해 주세요. 절대로 지옥에 떨어지면 안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간절히 기도하셨고, 드디어 기도가 이루어져 바울이 천국 문에 이르렀단다. 천사가 스데반에게 “저기 바울이 온다”고 알려주자, 스데반 집사님은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바울에게 뭔가를 냅다 던져 바울의 코피를 터지게 만들었다단다. “자, 맛 좀 봐라. 내가 이 기회를 얻으려고, 네 녀석이 반드시 천국에 오게 해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데...” 황당한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보여 주는 게 있다. 용서가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다.

용서? 정말 어려운 거다. 그런데 보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죄책감으로 몸부림치는 제자들에게 죄 사함을 말씀하셨다. 그들이 그렇게 애원하는 은총을 베푸시고, 다시 제자의 자리로 컴백하게 하셨다. 죄로 인해 고민하지 말라.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으라. 용서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성령

이제 승천을 앞두신 예수님은 곧 제자들을 떠나신다. 그렇다면 제자들만 남게 되는 것, 괜찮을까? 누가 봐도 불안하지 않나? 그래서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님께는 대책이 있으셨다. 그 대책이 바로 ‘성령’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호하고 인도할 성령님을 선물로 준비하고 찾아오셨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절). 이 말씀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의 말씀과 일치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22절의 ‘숨을 내쉰다’는 단어는 창세기 2장의 ‘불어넣는다’와 동일한 단어이다. 하나님의 호흡이 이제는 성령으로 바뀐 것이다. 굳이 구분한다면 창세기가 육적 생명의 탄생이라면 요한복음은 영적 생명의 탄생이다. 새 생명의 탄생,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향하여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는 겔37:9의 외침이 있자 그 뼈들이 살아나 여호와의 군대가 되었던 것과 같다. 여기서도 ‘숨을 불어넣다’가 요한복음과 일치한다. 요한은 마치 마른 뼈를 향해 숨을 불어 살리는 사건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성령,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던(3:5) 바로 그 성령이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던(4:24) 바로 그 성령,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는(7:38-39) 그 성령, 우리를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하고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16:13) 바로 그 성령이시다.

하나님의 영이시자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은 떠나시는 게 아니라, 이제는 보이지 않는 영으로 함께 하신다. 이 말씀이 사도행전으로 이어진다. 사도행전 1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4절), 그 약속하신 것이 성령이시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을 받으라’고 했다. 여기서 ‘받으라’는 헬라어로 ‘라베테’(Λάβετε), 부정과거 명령형, 반드시 받으라는 강한 명령이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결국 성령이 제자들에게 강림하신다. 그 후 제자들의 삶은 완전 다른 삶, 목숨을 건 증인의 삶이 된다.

부활의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의지해야 한다. 성령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누군가 병원과 성령님을 비교한 글을 줄여봤다. “병원과 달리 성령님은 휴무가 없고, 24시간 근무하고, 부재중인 때가 없고, 예약도 접수도 없이 바로 진료가 가능하고, 치료비도 필요 없고, 힘있는 사람이 따로 필요하지도 않다. 또 의사와 달리 언제나 강건하고, 귀가 밝아 다 듣고, 모든 인생의 병을 다 고치고, 집으로 돌아가도 계속 함께해 주는 분이시다.”

성령님은 능력이시다.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하고, 슬픈 자를 기쁘게 하고,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평강을 누리게 하는 능력. 예수님이 ‘성령’을 선물로 주셨다. 과연 주님만 주실 수 있는 4P 중 세 번째인 Power, 능력을 주신 것이고, 한 가지 더 Purpose 삶의 목적까지 주신다.

이날 이후 두려움과 완전 결별은 아니지만 제자들이 문 걸고 숨는 일은 없었다. 아니 평강도 누리고 기쁨도 회복했다. 그리고 재출발을 위해 갈릴리 바다를 찾아가기는 했지만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10), 제자들의 갈릴리 재방문은 주님의 계획,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주님의 제안 때문이었다. 죄책감과의 결별은 아니지만 그래도 죄 사함이라는 선물로 인해 이제는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달라졌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사람들로 바뀐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주신 선물 때문이다. 그 선물이 제자들에게만 주어지나? 아니다. 우리도 받은 선물, 그렇다면 우리도 제자들처럼 딴사람이 되어야 한다. 선물 받은 사람답게 확 달라져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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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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