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 가톨릭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대신하는 존재와 자리, 그리고 직분을 만들고, 다른 중보자를 세우고, 죄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인간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대체물들을 만들며 교회를 완전 혼합주의, 짬뽕 종교가 되게 하고, 인본주의로 변질되게 하자 종교개혁이 일어났었는데 지금 이 시대에도 교회개혁이 절실한 것 같다.
교회만 타락한 게 아니라 흑사병까지 유럽을 휩쓸며 사회 구조가 다 붕괴되었을 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 엄청난 위기를 본질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초청장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로마 가톨릭의 잘못된 신학과 부패상황을 고발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했다.
핵심은 라틴어로 ‘아드 폰테스’(ad fontes),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것,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는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근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세의 봉건적 잔재를 떨어내고 근세를 구분 짓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다”고 했다. 종교개혁의 영향력이 엄청났다는 말이다.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5대 강령(Five Solas)으로 삼았는데 교회개혁도 이를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기초 강령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이 강령을 요한복음 17장의 예수님의 대사장적 기도와 연결해 본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절), 예수님의 기도는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이는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속하지 말고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고 밝히신 예수께서 이제는 제자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며 그래서 미움을 당한다고 하신다(14절). 16절도 같은 기도의 반복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세상,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세상이다. 예수님은 이 기도를 통해 세상과 명확한 분리를 선언하신다. 십자가를 앞둔 상황이라 이렇게 기도하셨을까? 아니다. 이미 요한복음 서문에서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라며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을 선언하셨다. 혈통으로 육정으로 사람의 욕망으로 세상은 우리를 묶어두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근본이 다르다. 그래서 세상에 속하지 말고 다르게 살아야 한다.
전 세계 1억 명 정도가 관람한 인기 뮤지컬 ‘라이온 킹’(The Lion King)에 보면 어린 라이온 킹은 사자 왕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를 잊고 다른 짐승들과 어울려 풀이나 죽은 고기를 먹고 산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 ‘문제 없다’ ‘걱정 없다’ ‘모든 게 잘 될 거야’라는 뜻의 스와힐리어이다. 이처럼 일상성에 빠져 살아가던 라이온 킹이 어느 날 물속에 비친 자기의 모습을 보며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때 “네가 누구인지 기억하라. 넌 나의 아들이다. 유일한 참된 왕이다”라는 음성을 듣는다. 각성한 라이온 킹, 그 동안의 삶은 무의미한 삶이었다.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 왕의 자리를 되찾는다.
세상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제자들, 그렇다면 삶의 가치관이 다르고, 먹는 양식이 달라야 한다. 성경은 말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5-16). 세상의 양식은 육신의 정욕에서 비롯된 것, 육체를 배부르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이 목표다. 안목의 정욕은 눈에 끌리는 욕심이나 무지나 편견이나 호기심이고, 이생의 자랑은 헛된 명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것들을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어거스틴(Augustine)이 쓴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은 기독교 국가였던 로마제국이 쇠퇴하고 망하자 세상 사람들이 비판했기 때문에 쓴 책이다. 어거스틴은 기독교의 목표가 이 땅의 도성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다고 했다. 로마인들은 돈 모으고, 별장 짓고, 전쟁에서 이기는 것을 귀하게 여겼지만 기독교는 이런 것들을 하찮게 여겼다. 그보다는 이웃을 사랑하고, 겸손과 자선을 실행하고,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긴 것이다.
이런 게 세상으로부터 미움 당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14절), 왜 안티 불교나 안티 천주교는 없고, 안티 기독교만 있을까? 기독교는 타협하지 않는 고집불통, 독선이기 때문이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과 함께 살면 안티가 없다.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 딴소리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죽든 살든 같은 방향으로 같이 가면 좋겠는데 자꾸 딴 길을 얘기하는 사람들, 그래서 밉상,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미운 사람들이다.
파송된 사람답게
예수께서는 아직 제자들을 데려가실 생각이 없으시다. 하비만 그들이 세상에서 악에게 빠지지 않고 보전되기를 위해 기도하셨다(15절). 소속이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 예수님은 그 세상으로부터 제자들을 이제는 옮겨달라고 기도하실 법도 한 데 그러지 않으셨다. 아직 그들이 서야 할 곳은 세상이라 하신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제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그저 복음송 중에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요” 그런 곡만 불러야 할까? 아니면 과거에 모세, 엘리아, 요나가 기도했던 것처럼 찬송가 273장 “나 이제 갑니다. 내 집을 찾아”를 부르며 즉시 옮겨달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해야 할까?
모세는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5), 혼자 이 백성을 감당 못하겠다고 즉시 죽여달라고 기도하고, 엘리야는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왕상19:4), 이세벨이 사신을 보내 자기를 죽이겠다고 하자 광야로 도망가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여달라고 기도한다. 또 요나는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4:3),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회개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에 화가 나 죽여달라고 기도한다. 요나는 4장에서 또 스스로 죽기를 구하며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4:8)고 한다. 투덜거림이 가장 심했던 사람이 요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내용이 성경에 단 한 번도 없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를 좋아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교회나 어떤 성도들은 일종의 거룩한 동호인들처럼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산다. 예를 들어 미국 필라델피아, 오하이오, 인디애나주 등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아미쉬(Amish) 공동체’가 그런 사람들이다. 아미쉬 빌리지를 방문해 봤는데 그들은 TV도 거부하고 휴대폰도 전화기도 없이 산다. 교통수단도 마차, 전기도 쓰지 않고 수도시설도 없다. 현대문명을 철저히 거부하며 사백 수십 년 동안 농사와 수공업을 하며 살지만 그래도 부엌에 가보면 냉장고도 있고 빵 반죽 기계도 있고 전등도 달려 있다. 가스 내지는 압축공기로 돌리는 거다.
현대 기독교의 대안적 삶이라는 평가도 있고 좋아보이기도 하지만 제자들을 세상에 머물게 하신 주님의 뜻이 과연 이런 삶일까? 그렇다면 굳이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15절)라는 기도가 필요했을까? 또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리 바로 데려가시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요한복음은 신앙인이라면 종말의 때, 즉 주님의 재림만 기다리며 살기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논조다. 결코 산속으로 들어가고, 세상일에 대해 모른 척하며 살기를 권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인이라면 적극적으로 세상일에 개입하다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 존재가 되라는 거다.
그래서 그들이 악에서 보존되기를 기도하셨다. 정확히는 ‘악한 자로부터의 보존’, 악한 자들의 실력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에게서 보호되기를 기도하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 세상에 남기는 이유를 언급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18절), 제자들이 그냥 남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주님이 보내신 사람들, 하늘나라에서 세상으로 파송된 사람들, 선교를 위해 남은 사람들, 사명을 위해 남은 사람들, 제자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편에서도 말씀의 시제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18절도 똑같다. “나도 그들을 보내었고”, 단순 과거형이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제자들을 파송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이는 훗날의 요한 공동체나 파송되어 도처에서 사역하는 제자들을 보내셨다는 말씀이다. 미래를 내다보며 확정된 사실처럼 과거형으로 기도하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세상에 남겨진 사람들이라기보다 하늘나라에서 파송된 사람들이다.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1:5), 예레미야가 이미 뱃속에서부터 파송받았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고백하고 파송된 자답게 살아야 한다.
거룩한 삶 살기
예수님은 이어서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절)라고 기도하셨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을 ‘거룩’이라 한다. 거룩은 히브리어로 ‘카데쉬’, 헬라어로 ‘하기오스’, ‘나누다’‘구분하다’‘분리하다’‘특별한 용도로 사용하다’ 그런 뜻이다. 세상에서는 낯설고 독특한 개념, 그래서 거룩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make holy, 분리하소서” 더 기도해야 한다. 우리 힘으로는 안 될 것이다. 밀려오는 세속 물결을 이기고 거룩하게 산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 수도 있다.
어릴 때는 라디오 연속극도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TV가 들어오면서 재미가 달라졌다. 흑백 TV, 크지도 않은 것이었지만 저녁 식사도 끝나기 전에 벌써 연속극 보기 위해 집으로 오시는 동네 어른 몇 분들과 가족들이 둘러앉아 본 연속극이 ‘여로’였다. 사상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는 연속극이었는데 주인공 이름이 영구였다. 젊은 사람들은 영구 그러면 심형래 씨, ‘영구 없다’로 생각하지만 심형래 씨의 연기는 여로의 주인공 장욱제 씨 연기를 흉내낸 것이었다. 그때 아씨는 태현실 씨, 주제가는 이미자 씨가 불렀다. 아마 당시에는 전 국민이 다 시청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흑백 TV만 해도 전 국민을 눈물짓게 하고, 함박웃음을 터뜨리게 했는데 과학물질 문명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제 4차 산업혁명시대, 인천공항 가서 안내를 받는 것도 로봇, 대형 식당 가서 음식을 주문할 때도 음식이 나올 때도 로봇이 다 한다. AI, 메타버스(Metaverse) 시대다. 메타버스, 혹시 타고 다니는 버스를 생각하나? 아니다. 메타(Meta)는 ‘저 너머’란 뜻이고, 버스(verse)는 유니버스(Universe), 세계 우주를 의미한다. 그래서 메타버스는 저 너머 새로운 가상공간, 가상현실공간이라는 말이다.
10대, 20대 디지털 원주민들은 금방 알아듣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은 이주민, 유목민 세대라 “무슨 소리여?” 할 거다. 어쨌든 BTS는 이미 메타버스 안에서 공연을 하고 있고, CCC는 2021년에 이미 메타버스를 활용한 여름 수련회를 했다.
메타버스, 갈릴리 가서 베드로도 만나고, 예수님도 만난다. 물 위를 걷기도 하고 걷다가 빠지기도 한다. 실제와 똑같이 느끼는 거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세상은 재미있는데 진리는 질린다는 반응이다. 주님은 이런 세상이 올 것을 아셨기에 간절하게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기도하셨을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진리로 무장해야 한다. 우리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주님의 기도를 보면 진리가 우리를 거룩하게 한다.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19절).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연꽃이 더러운 연못에 살지만 뿌리는 항상 깨끗한 물이 나오는 쪽으로 뻗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연꽃 자태를 나타내듯 우리도 더러운 세상에 살지만 뿌리를 항상 말씀에 내리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말씀이 힘이다. 주님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15:3), 말씀으로 깨끗하여졌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로 무장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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