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성 박사
양기성 박사

지00이 쓴 ‘과학과 신학의 화해’(기독교사상 2024년 6월호 권두언) 글을 보면 그가 신학자인지 사회학자인지, 또는 과학자인지 알 수 없는 인상을 준다. 그가 그의 글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을 보면 정말 성서를 바로 알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첫째, 그는 인간의 지유의지를 하나님의 자유성과 동등시 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마저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라 말하며, 그런 의미의 인간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자유란, 또는 하나님의 자유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학에서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성을 말한다. 즉, “자유케 하는 이(하나님)의 자유성”이 자유다. 인간은 하나님으로 부터 그 자유성을 은혜로 받아 행사한다. 하지만, 글쓴이는 자유를 인간 스스로가 자연적으로 가질 수 있는 당위적 차원에서 자유를 말하고 있다. 신학적 자유론과는 배치되는 주장인 것이다.

인간은 자유성을 가진 존재인가? 신학이나 철학적 관찰은 지면상 그만 두고 단 한마디로 현실론적으로 말하자면, 인간 목숨이 다하는 순간 죽음을 면하고자 하는 자유를 가졌다 해서 죽지 않는 존재가 되는가? 거부하는 자유를 주장하다 오히려 자유를 상실한 것이 인간임을 성경는 말하고 있다. 이는 “인간은 하나님의 것이라도 부인하고 거부 할 수 있다”는 논리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둘째, “이성이나 과학은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다”라는 문구다.

바르게 말하자면, “이성이나 과학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해야 맞는 말이 된다. 모든 것은 내가 생각하고, 그 결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 즉 이미 존재해 있는 것을 찾아냈지, 전구 빛을 그가 만든 것이 아닌 것과 같이 이성도 자연법적으로 인간이 소유하게 된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라고 말했다. 중요한 것은 과학이나 이성은 일정부분 신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학문이라는사실이다.

셋째, “신학과 과학의 화해”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화해(Reconciliation)는 거룩한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형상이다. 그런데, 지 목사의 화해는 신과 인간의 대등한 관계 속에서의 화해를 말하는 인상을 주고 있다.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특징은 신과 인간을 동등한 관계, 또는 성품을 섞어 놓았다는 것이다. “신이 인간이고 인간이 신이다”라는 포이에르바하(Feuerbach)가 대표적이다. 이런 모습을 바르트(Karl Barth)가 신학적 변증론으로 막아 섰다. “신은 신이고 인간은 인간은 인간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인간은 땅에 있는 존재, 신은 거룩하시되 인간은 죄인, 신은 무한한 존재(Infinite Being)지만 인간은 한계(Finite Being)를 가진 존재다” 등. 화해는 오로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지 인간 의지로 요구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유한한 과학이 어찌 무한한 하나님과 화해하여 동등성을 갖겠다는 것인가? 신학자 샤딘(Pierre Teilhard de Chardin)은 진화론에 심취하여 어떻게 인간이 진화역사를 갖게 되었는가를 탐구하기 위해 수차례 중국만주와 몽골의 고분을 파헤쳐 인간 두개골들을 살펴보다 그가 속한 교단으로 부터 파면당했다. 쫒겨나다시피 하여 미국으로 간 후 타계 할 즈음, 그 생애 최후에는 “내가 아무리 진화론을 증명하려 해 보았으나, 증명하지를 못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무엇인가 말로 할 수 없는 신비하고 존엄, 거룩한 현상이 존재하고 있음을 체험했다”라는 고백을 하기도 했다. 지금은 한계를 가진 인간철학적 주장을 하고 있지만, 유한성을 가진 인간은 언젠가는 자신의 유약성을 고백할 때가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신앙이 아니겠는가.

화해하자는 것은 대화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고, 화해하려면 실제로 대화해야 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고 이루어 지는지에 대한 한 세계적 신학자의 예를 들어 보자. 안병무 박사가 유럽신학 및 철학계의 거물들이 모이는 학회에 참석했다. 거기서 그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Heidegger)에게 물었다:

안병무: “신학이 철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대화 할 수 있는 접촉점이 무엇인가?”
하이데거: “신학은 철학에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론적인 것에는 대화가 가능하다.”

이 말은 신학은 철학이나 과학과의 대화에서 의미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철학, 과학은 신학의 계시나 섭리를 섭렵할 수 없음으로 철학입장에서 무한성의 신학과 대화시도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철학의 이론으로는, 논리적으로는 대화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00의 글에는 신학과 과학을 동등한 수준임을 근간으로 하여 대화/화해 해 보자는 인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지00은 철학사조 사유로 신학과 대화하자, 화해하자 한다. 그는 철학, 과학으로 하나님과 대화하여 보자는 겁없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는 그의 인간학적 사유의 오만함을 보게 하는 부분이다.

근자에 이르러 유신진화론이란 주장들이, 마치 몇 년 전 갑작스레 코로나가 발생한 것 같이, 느닷없이 나타나 신학계, 소위 보수계열의 학교에 등장하여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튀어야 눈에 띄어 살아 남을 수 있는 세상,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보겠다는 것인지 의심이 든다. 이미 지난 수백년 동안 논쟁하고 싸워 정립된 신학사상계에 느닷없이 주장하고, 또한 이를 동조하는 세력들이 나타난 것이다. 학문의 자유를 말하지만, 한계성을 가진 인간들의 자유이기에 윤리, 도덕적, 또는 성서적 차원에서 믿고 신뢰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음을 깨닫는다. 지00의 글은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인상을 준다. 신학자라기보다 자연주의 종교인에 가깝다.

이러한 주장은 교단 정체성과도 연관되어 있다. 교단이 주장하고 강조하는 헌법, 강령을 따르겠다 한 후, 반대하거나, 성경적 내용을 변질되게 가르치면 그것은 자기자신을 속이고, 영적으로는 성령을 속이는 일이 된다. 교단정책을 따르겠다 하고 그렇게 하지 않고 반대되거나 금지된 것을 가르치면 그것은 천직으로서의 봉사, 헌신이 아니다. 이런 논쟁들은 한가한 가운데서 발생한다. 자기 주장 분명하게 1회성으로 던지고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권고해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까마귀 보고 까치소리 내라면 그것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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