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한때 “느그 아버지 뭐하시노?”라는 말이 유행한 적 있다. 2001년에 개봉되었던 장동건 유오성 주연의 ‘친구’라는 영화에서 나온 유명한 대사였기 때문이다. 장동근의 아버지의 직업은 장의사, 당시 장의사는 천한 직업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일까? 장동건은 선생님으로부터 뺨을 무수히 맞았다. 금수저였다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 흙수저였기에 선생님이 막 대한 것이다.

그런데 20여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다를까? 흙수저가 무시당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도 우리 사회는 불공정이 심하고 불평등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개천용이 나는 시대는 아니다. 아니 개천용은커녕 그들이 뛰어놀 개천마저 다 메른 시대다. 그래서 젊은 세대를 향해서 ‘밀레니얼 푸어(poor)’라는 말까지 사용한다. 밀레니얼 세대는 1980년대 초~2000년대 초에 출생한 세대, 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는 Z세대, 묶어서 MZ 세대라 하는데 이 세대는 비교적 소득이 적기 때문에 ‘밀레니얼 푸어(poor)’라고 부른다.

신자유주의 강화에 따른 치열한 경쟁, 거대 기업으로의 구조 개편, 코로나로 인해 더 심화된 경제위기, 컴퓨터와 전자산업, 4차산업의 발전으로 인한 인력 절감 등으로 일자리도 축소되고 좋은 일자리들이 사라졌다. 당연히 직격탄을 맞은 것은 청년 세대, 취업이 하늘의 별따기다. 일자리가 생겨도 그저 노인 일자리다. 그러다 보니 지금은 이웃이나 아버지마저 자기 일자리를 빼앗는 위협세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아버지가 부유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래서 아버지가 뭐하시냐가 너무도 중요하다.

아브라함의 자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라고 자부했다. 대단한 자부심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다”라고 하시니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39절). 예수님이 그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안다”고 하셨다(37절). 육적으로는 인정하신 셈, 그런데 말씀을 계속 보면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다”고 하신다. 근원이 다르다는 말씀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주장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에는 위대함과 편협함이 모순적으로 얽혀 있다.

마치 고대 로마인들이 트로이의 후예라고 자랑하고, 그리스는 알렉산더의 후예, 몽골은 칭기스칸의 후예, 북구는 바이킹의 후예 또는 오딘 신의 자녀들이라고, 우리가 단군의 후예라고 말하듯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이의를 제기하신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하려면 아브라함이 했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39절). 동질의 믿음이어야 하고 동일한 행사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했나? 아브라함은 그저 이스라엘 민족의 건국시조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통하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영적으로 거듭난 하늘나라 사람, 그의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과 동일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끄시는 곳이면 어디든 갔다(창12:1,4, 히11:8). 하나님의 주도에 언제나 반응은 즉각적이고 철저했고 믿음으로 가득했다. 그는 세상 어떤 사람이나 재물보다 하나님을 사랑했다.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도 대단했지만 이삭을 바치는 순종은 하이라이트였다. 확증된 신앙(창22장), 순종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께 순종했다.

그 순종이 이 세상을 초월하고 하나님의 도성을 사모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했다(히11:10). 아브라함만큼 하나님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또 있을까?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는 인정을 받았다. 모세도 엘리야도 심지어 다윗도 받지 못한 인정이다. 유일하다. 행함이 있는 신앙을 강조한 야고보도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약2:23). 또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의 저자 헨리 블랙가비(Henry T. Blackaby)는 『Created to be God’s Friend』(How God shapes those he loves)라는 책을 썼다. 『아브라함 하나님의 친구』(요단, 2003)로 번역된 책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을 아브라함에게는 열어 보이셨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창18:17), 소돔에 관한 말씀을 주실 때 속마음을 털어놓으신 거다. 결국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과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창18:18). 땅을 주고, 위대한 민족을 이루고, 다른 민족을 복되게 하는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 이런 신앙이라야 아브라함이 아버지가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근본이 다른 유대인들은 다시 우긴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1절).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실 때 난리쳤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다. 우긴 것이다.

지금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예라고 할 때 그 강조점이 다르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복의 근원이 되어 세상 모든 민족을 복되게 하려는 뜻이었다면 예수님은 이를 인정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는 하면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협함을 보인다. 훗날 바울은 유대인들의 특권이 된 율법과 싸운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자들이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 이를 근거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구분없이 함께 하는 ‘온 이스라엘’을 꿈꾼 사람이 바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편협함을 버려야 한다.

마귀의 자식

예수님은 진리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은커녕 아예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판단력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꼬시는 존재, 마귀의 정체는 살인자, 거짓말쟁이다(44절). 그들이 마귀의 자식인 이유는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고, 마귀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사단은 원래 그런 존재였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때 행복했던 아담, 에덴동산이라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동산의 모든 실과를 마음대로 먹으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따라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며 자유를 만끽했다. 그러나 사단의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는 거짓말,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났을 때,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기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기로 한 순간 자유가 박탈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하나님과의 교제권에서 멀어지는 영적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창2:17). 사단은 처음부터 거짓말로 첫 인간들을 살해한 존재다.

요한은 그 마귀를 ‘거짓의 아비’라 했다. 마귀의 일의 특징은 욕심대로 행하고, 살인하고, 거짓을 행한다는 것이다. ‘거짓’이라는 말이 반복된다. 코로나 펜데믹 시절 우리 사회는 한국교회를 거짓말하는 집단으로 몰았다. 오미크론 감염 때 러시아 교포 목회자 부부 중 사모가 방역 택시를 탔느냐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던 것, 교회에 어려움을 줄까봐 판단을 잘못해 거짓말한 것이 확인되면서 받은 오명이다.

여기서 진짜 마귀의 일이면서도 잘 주목하지 못하는 것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소위 이념의 죄라는 거다. 이념의 죄는 거짓으로 집단적 사기를 치는 것이다. 유대 랍비들이 무슨 거짓말을 했겠나? 그들은 대부분 마음씨 좋은 선량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율법이라는 이념에 사로잡혀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다른 민족은 배제하고 차별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무서운 죄, 이것은 살인이나 다름없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죽였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살인은 민족 이념으로 인한 민족 간의 전쟁, 종교 교리로 인한 마녀사냥, 이념으로 인한 전쟁과 숙청 작업에서 저질러졌다. 자본주의 이념은 무정함과 인간의 무한 탐욕을 정당화한다. 부동산 투기를 하는 사람들이 죄책감이 있나? 없다. 내 돈으로 내 집 사서 재산을 불리려는데 그게 무슨 죄냐? 그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위기로 몰리고 살해를 당한다면 그건 죄가 될 수 있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란 유태인 학자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란 책에 보면 한 사람이 어떻게 마귀의 자식이 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책의 부제가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라고 붙어 있다. 아이히만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친위대 장교로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와 학살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인물이다. 아이히만은 전쟁 후 아르헨티나에 피신해 있다가 15년 만에 잡혀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아이히만이 전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은 신 앞에서는 유죄일지 모르지만 법 앞에서는 무죄라고 주장했다. 그는 네 아이의 사랑스러운 아버지였고, 단지 충실한 국가공무원이었을 뿐이라고 강변했다. 그는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며, 유태인들을 좋아했지만 국가의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수행했다고 변명했다. 잔인하게 살해되느니 당시 ‘안락사’라고 일컬어지는 가스실의 죽음이 훨씬 덜 잔인하고 인간적일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살아남았던 유태인 중 한 사람이 법정에서 이런 아이히만을 보고 기절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분노해서 그랬을 것이라 예상하며 그 사람에게 기절했던 이유를 물었을 때 그 사람은 전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아이히만이 저렇게도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저토록 평범한 인간이 그 많은 사람을 가스실로 몰아넣었군요. 나 자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는 것,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이 책을 썼던 한나 아렌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에 의해서 벌어지는 엄청난 죄악을 보며 그들의 잘못을 이렇게 정리했다. “아이히만은 개인적인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로 하여금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그렇다. 생각하지 않으면 어느새 마귀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깨어 기도해야 하는 이유다. 자기를 끊임없이 부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리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니 어느새 악마의 자녀가 되어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평범한 이웃이 마귀의 자식”, 이 말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놀랐고 분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본질이고 실상이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 다시 말해 죄의 노예가 된 아담을 부르셨을 때 아담의 응답은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였다. 공포와 수치심, 이게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빛으로 비추어 깨닫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진리다. 그리고 그 진리는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 구속해 준다. 하나님은 예수님이라는 비싼 값을 치르고 사단의 손에서 구출해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절).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처하며 온갖 종교적 자만심에 도취되어 살던 유대인들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충분한 말씀이다.

분명히 알 것은 요한복음은 이미 첫 시작부터 인종이나 혈통의 가족이나 민족 개념이 없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12-13).

기독교는 그 출발부터 혈통의 신화를 깬다. 인간의 취미와 성향으로 모인 어떤 사교집단이나, 사람의 뜻이 집단적으로 집약된 이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 거하는 자가 바로 내 형제요 내 자매라고 한다.

이거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8절),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절). 누구의 말을 듣고 있나? 말씀이 잘 들리나? 중요한 것은 그게 우리의 아버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마귀의 속삭임이 아니라 진리 안에서 진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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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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