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혁주의연구소 제5차 내한 선교사 심포지엄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제5차 내한 선교사 심포지엄 참석자 기념 사진.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제공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 오덕교 박사)가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소재 유나이티드문화재단에서 ‘헌트가와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제5차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행사는 (재)유나이트드문화재단(강덕영 이사장)·갈렙바이블아카데미가 후원했다.

이날 발제에는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석좌교수)의 사회로 ▲박응규 교수(ACTS 역사신학)가 ‘한위렴(William Hunt)의 재령선교’ ▲이은선 교수(안양대 명예교수)가 ‘한부선(Bruce Hunt)과 신사참배 반대운동’ ▲이상규 교수(고신대 명예교수, 백석대 석좌)가 ‘한부선과 고신, 고려신학교’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한위렴의 재령선교 핵심, 장로교회의 전통적 신학과 청교도 신앙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제5차 내한 선교사 심포지엄
박응규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제공

먼저, 박응규 교수는 “미 북장로교 선교부는 평양선교를 위해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을 1890년에 파송하였다. 그 후 1897년에는 황해도 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한위렴(William Brewster Hunt, 1869~1953)을 재령선교를 위해 파송하였다”며 “한위렴은 마포삼열과 더불어 서북지역의 기독교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다. 한국의 선교를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선교사들 가운데, 대를 이어 후손들이 한국의 선교사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장로교 선교사 가문을 꼽으라고 한다면, 언더우드(Underwood) 가(家)와 모펫(Moffett) 가(家), 그리고 헌트(Hunt) 가(家)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재령지역의 기독교회는 기대 이상으로 발전하였으며, 평양과 함께 한국 장로교회의 기반을 조성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며 “‘재령선교의 아버지’ 한위렴 목사의 한국 선교 25주년을 맞아 재령을 방문했던 미 장로교 해외 선교위원회의 서기인 아더 브라운 박사는 ‘한국과 미국, 양국의 많은 친구들이 헌트 목사에게 쏟는 지대한 사랑의 관심을 직접 알게 되어 기쁘다. 이같이 강대국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으며 세계정세의 전략지역인 조선에서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로 한 세기의 사분의 일을 섬김은 위대한 일이다’라고 기술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교회는 더 이상 성장이 둔화되고 영적 활력을 상실한 가운데 새로운 활로를 시급하게 모색해야만 하는 시점에 놓여있다”며 “한위렴의 재령선교의 핵심은 장로교회의 전통적 신학과 청교도 신앙이었으며, 복음전도와 선교지향적 교육과 의료 선교 등을 병행하면서 전도와 사회적 관심을 적절하게 적용하였다”고 했다.

또 “한국 장로교회의 자립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재령은 소래에서 시작된 자생적 한국교회의 신앙을 계승하면서도 평양과 함께 서북 기독교의 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며 “그리고 재령에서의 한위렴의 선교사역은 다른 지역으로 성경적 신앙을 파급하는 통로의 기능을 효과적으로 감당했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했다.

아울러 “그런 면에서, 바른 신학적 토대 위에서 비롯되는 ‘개혁에서 비롯되는 부흥’이 절실한 한국장로교회의 현실을 고려해 볼 때 한위렴의 재령선교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며 “왜냐하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면서 성경적 신앙과 장로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타협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를 교회의 역사는 여실히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 한부선 선교사,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수감된 대표적인 인물

이어 두 번째로 발제한 이은선 교수는 “한국에 와서 활동했던 선교사들 가운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던 선교사들은 많지 않다”며 “그런데 선교사 신분으로 만주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수감되어 고난을 당했던 대표적인 인물이 한부선(Bruce F. Hunt, 1903~1992)”이라고 했다.

이 교수는 “한부선은 한국에 왔던 한위렴 선교사(William B. Hunt, 1869~1953)의 아들이므로 그러한 의미에서 2세대 선교사였다”며 “그는 1936년부터 만주에서 한국인들을 상대로 네비우스 선교방식으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처음에 1928년부터 북장로교 소속으로 청주에서 선교활동을 하였고, 7년간 선교활동을 한 후에 안식년을 맞아 1935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했다.

이어 “그가(한부선) 미국에 건너가 일 년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과정을 공부하였다. 그가 공부하던 시기에 메이첸을 중심으로 북장로교회에서 신학적인 이유로 분립한 사람들이 미국장로교회를 조직하였다”며 “신학사상에서 메이첸(Gresham Machen)을 따르던 한부선은 이 분열과정에 직접 참여하면서 북장로교 선교사 신분을 사직하고 미국장로교회에 가입하였고, 1936년 7월에 독립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국내로 귀국했을 때, 한국장로교회는 그가 미국장로교회로 이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총회 소속 선교사로 받아주었다”며 “그는 북장로교회에서 사직한 상태에서 청주에 가서 북장로교 선교사들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한국에 파송한 4개 장로교단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만주로 가서 활동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했다.

더불어 “그가 만주로 가서 활동하는 동안에 1938년 9월에 총회가 신사참배 참여를 결정하였고, 만주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며 “그는 신사참배는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우상숭배라고 확신하여 1940년 1월에 그의 뜻에 동조하는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한국장로교회 언약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이 언약에 참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총회에서 분립한 교회들을 돌보았다. 그러다가 1941년 10월에 체포되었고 1942년 8월에 포로교환으로 미국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이은선 교수는 “한부선 선교사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만주에서 선교를 하면서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 시행을 결정할 때 반대하였고, 동시에 종교단체법이 총회에서 결정되고 만주국이 그러한 법령을 공표했을 때 반대하였다”며 그는 1939년 9월 봉천노회에서 신사참배에 반대하고 종교단체법을 거부하는 것 때문에 면직을 당했다. 그는 그 이후에 자기 집에서 성도들을 만나며 새로운 협회를 조직해 나갔다”고 했다.

이어 “그는 그러한 새로운 협회 모임을 위해서 신앙생활과 지도자 선정을 위한 신조 작성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그래서 1940년 1월 그의 집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대표자들과 북만주에서 한인들의 모임의 지도자들이 모여 7가지 내용으로 되어 있는 장로교 신조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신조작성은 한국장로교 전통에서 성도들의 자발적인 언약작성의 첫째 사례이며 우상숭배를 범하는 타락한 교회에서 분리하여 올바른 신앙을 지키는 기준과 교회와 국가의 구분을 명확하게 제시하였고, 성도들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였다”고 했다.

또한 “이들의 신앙은 오직 성경의 원리와 스스로 서명하는 만인제사장의 원리와 개혁주의 신학의 정수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요리문답을 신앙의 표준으로 처음으로 수용하였다”며 “그리고 이들의 언약문서는 만주를 넘어 국내에까지 확산되어 참다운 신앙을 지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와 함께 이 문서를 작성하는데 그의 친구였던 보스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 장로교 신조를 작성한 후에는 이 신조를 따르는 모임이 성장하여 1941년 10월경에 23개의 모임에 777명이 모이는 규모로 성장하였다”며 “이러한 모임의 성장에 따라 경찰의 박해도 심해져서 이 서명자들 가운데 70명 이상이 1940년 10월까지 체포되어 14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가운데 김윤섭과 안영애 등은 순교하였다”고 했다.

아울러 “한부선과 바이람 선교사 부부는 1941년 10월에 체포되었다가 잠시 풀려났다. 그는 12월 7일에 다시 체포되었다가 6월에 포로교환의 형식으로 아프리카를 거쳐 8월에 하와이로 돌아왔다”며 “그는 감옥에서 성경말씀을 암송하며 전도하며 고난송을 작곡하며 신앙으로 모든 것을 극복하였다”고 했다.

◆ 한부선, 고신교회·고려신학교에 절대적인 존재

마지막 세 번째 발제를 맡은 이상규 교수는 “한부선(韓富善, 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는 고신, 고신교회, 혹은 고려신학교와 가장 근친한 서양인 선교사였고, 해방 이후 1970년대까지 고신의 행로에서 그가 끼친 영향과 역할, 기여는 절대적이었다”며 “그는 해방 이후 1946년 11월 내한한 이래로 1976년 한국에서 은퇴할 때까지 만 30년간 고려신학교와 고신교회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지지자였고, 대변자였다”고 했다.

이 교수는 “초기 고신 혹은 고려신학교를 이념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인도하는 이는 박윤선·한부선·한상동 등 세 사람이었다고 볼 수 있다”며 “이 세 사람의 헌신이 오늘의 고신의 정신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한부선은 흔히 교수 사역이나 재정적 후원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상 한부선은 고려신교 경영 전반에 관여하였다. 교사 이전, 전산건물 접수, 건물 구입, 교사 신축, 건축 자제의 확보, 미군부대의 협력에까지 관여하였다”고 했다.

또 “그의 교수 과목도 어느 한 영영이나 전공에 국한되지 않았다. 다른 이가 할 수 없는 과목은 다 그가 감당해야 할 과목이었다”며 “신학교에 필요한 도서 확보도 그의 과제였다. 이렇게 볼 때 한부선 선교사의 기여와 역할을 가히 절대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했다.

그는 “평양 출생의 한부선은 평양외국인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대학과 신학교육을 받은 후 1928년 내한 한 이래로 청주(1928~1935), 만주(1936-1941)에서 사역했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7개월간 갇혀 있던 중 포로교환 형식으로 1942년 본국으로 돌아갔다. 1946년 10월 다시 내한하여 한국동란으로 1950년에서 1952년까지는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1952년 다시 내한한 이래로 1976년 은퇴할 때까지 50여 년간 선교사로 봉사하였다”고 했다.

이어 “고려신학교에서 일한 기간은 30년이었다. 1957년 안식년으로 본국에 돌아갔을 때는 정통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며 “그는 1973년 6월 은퇴해야 했으나 한국에서의 그의 사역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한국에서 2년 더 일하도록 투표로 결정하여 준 일도 있었다. 한국에서 50여 년의 사역을 마친 한부선은 1976년 5월 한국에서 은퇴하였다”고 했다.

또 “그의 은퇴를 앞두고 5월 17일에는 부산 남교회당에서 환송예배가 드려졌고, 5월 19일에는 고려신학대학이 주관한 환송예배에서 한국에서의 마지막 설교를 했다”며 “그는 고린도후서 4장 16절에서 18절까지를 본문으로 그가 사랑했던 한국교회와 한국의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였다”고 했다.

아울러 “한국에서 은퇴한지 3년이 지난 1979년 9월 3일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여 그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본국에 돌아간 후에도 여러 한인교회를 순회하며 설교로 집회로 도왔다”며 “한부선 목사는 기력이 쇠해지자 펜실바니아주 콰리빌에 있는 장로교회가 설립한 양노원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92년 7월 26일 8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한편, 행사는 오덕교 목사(횃불트리니티 총장)의 최종발언과 정리 마침기도로 모두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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