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심포지엄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제4차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심포지엄 참석자 기념 사진. ©장지동 기자

한국개혁주의연구소(소장 오덕교 박사)가 22일 오후 서울 강남구 소재 유나이티드문화재단 지하 1층 더글라스홀에서 ‘제임스 게일과 초기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제4차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발표회는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사회로, 강덕영 장로(유나이티드문화재단 이사장)의 환영사, △이은선 교수(안양대 명예교수, 역사신학)가 ‘게일의 한국사 연구’ △이상웅 교수(총신대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가 ‘제임스 게일의 선교사역과 종말론 연구’ △정성민 교수(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가 ‘게일의 창세기 1장 번역 탐구’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 게일의 한국사 연구에서 주목해야 할 세 가지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제4차 심포지엄
이은선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장지동 기자

먼저, 이은선 교수는 “게일과 헐버트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한국의 역사와 종교, 문화 등을 연구하면서 서양학문의 기준에서 한국의 독자적인 성격, 내지는 민족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며 “이것은 당시 소중화를 자처하며 우리 민족의 고유한 것을 별로 주목하지 못했던 시대상황에서 우리의 고유성을 연구하는 출발점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그와 동시에 이들은 기독교와 서양문명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며 “그러므로 이들은 우리나라의 역사 연구를 통해 우리의 종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다.

이 교수는 “게일의 한국사 연구는 세 가지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먼저, 게일은 선교사로 우리나라에서 사역을 하면서, 서구 지식인의 입장에서 한국과 한국사의 독자성을 탐색하기 시작했다”며 “그는 「동국통감」의 역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역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나 “1900년에 헐버트와 논쟁할 때, 중국의 한국에 대한 영향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래서 단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며 “반면에 헐버트가 삼국유사에 근거하여 단군을 우리의 고유성의 출발점으로 적극적으로 인정하자, 게일은 토론부에서 동국통감을 인용하고 단군은 신화적 인물이라고 지적하여 헐버트의 입장을 반박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1901년 「그리스도 신문」에 단군에서부터 시작하여 통일신라까지 역사를 소개했는데, 여기서 「동국통감」의 단군관련 기록을 번역하여 소개했다”며 “그렇지만 단군을 외국에서 온 인물로 해석하여 신화적인 요소를 거부하고 한국의 정치적 지도자로 제시했다”고 했다.

그는 “둘째로 한국의 종교적 관념을 추구하여 1918년에 가면 한국에도 서양의 관점의 종교가 존재한다고 인정했다”며 “게일은 한국의 한문문헌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한국문헌들에 나타나 있는 한국인들의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러한 독자적인 정신세계를 보여주는데 단군의 중요성을 인정했다”며 “그리하여 단군을 종교적 시원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 때의 한국 종교는 하나님의 초월성뿐만 아니라 내재성을 인정하는 종교였다”고 했다.

이어 “셋째로 그리하여 그는 1924년에 한국민족사를 저술하면서 단군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반영하여 단군에서부터 우리나라의 역사를 저술한다”며 “그 때 그는 단군을 우리민족의 정치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종교지도자였고,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유비를 보여주는 인물이었다고 했다”고 했다.

아울러 “게일은 한국문헌에서 이러한 유비를 찾아냈다”며 “그러므로 그는 한국역사의 독자성을 인정하였고, 한국문학의 독자성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했다.

◇ 게일의 종말론적 경향, 전천년설적 입장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제4차 심포지엄
이상웅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장지동 기자

이어 두 번째로 발제한 이상웅 교수는 “제임스 게일(한국명은 奇一)은 주류 선교부에 속한 선교사로서가 아니라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YMCA 파송 평신도 선교사로 1888년에 입국하여 사역을 시작했다”며 “1892년 초에 이르러서야 북장로교회 선교부 파송으로 소속 변경을 하게 되어 1927년에 한국을 떠나기까지 40년간 선교사역을 수행한 선교사다. 그의 사역은 다방면에 걸친 사역이었고, 여러모로 결실이 많은 사역으로 인정받아 왔다. 게일은 선교사이자 학자이자 작가였다”고 했다.

이 교수는 “토론토대학 재학기간 동안 만난 YMCA와 학생자원운동과 같은 선교 단체의 영향으로 교단적인 색채보다는 선교라는 목표에 더 집중하게 되었으며, 원래 파송기관도 초교단적인 토론토대학 YMCA였다”며 “이 배경은 한국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도 한국 장로교 선교를 주도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나 남장로교 선교사들과 협력하여서도 선교 사역에 매진할 수 있게 했고, 1892년 초에는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의 추천으로 소속을 북장로교 선교부로 옮길 수 있게 되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그가 연동교회 담임목회(1900~1927)라는 주된 사역이 있었지만, 어학과 문학에 대한 관심과 조예에 힘입어 한국어와 역사 등을 서구권에 알리거나 서양 문헌을 한국어로 소개하는 일에서 더욱 더 강력한 빛을 발휘하였음도 사실”이라며 “그러나 선교자체 보다는 언어와 문학에 너무 빠져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일각에서는 그가 한국학과 중국문헌에 경도되어 있다 보니 신학적인 개방성도 보인다고 하는 긍정의 평가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상웅 교수는 게일의 종말론적 경향에 대해 “19세기 말 D. L. 무디와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으로 한국 선교사가 되어 동일한 영향 하에 한국에 온 대부분의 초기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처럼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종말론을 전천년설이라는 이름하에 성경적인 종말론으로 취하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인정하는 사실”이라고 했다.

아울러 “게일이 자신의 종말론적 입장을 밝히거나 설명하는 공식적인 인쇄물을 찾기는 어렵다”며 “비교적 최근에 발굴된 사신들 속에서 그의 전천년설적인 종말론 성향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도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했다.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제4차 심포지엄
정성민 교수가 발제를 하고 있다. ©장지동 기자

다음 마지막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정성민 교수는 창세기 1장을 중심으로 게일이 번역한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정 교수는 “게일은 번역에서 일관성 있는 전략을 구사했으며, 그의 번역에는 가독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행사는 오덕교 박사의 최종 발언와 정리 그리고 마침기도로 모든 일정을 마쳤다.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제4차 심포지엄
한국개혁주의연구소 초기 내한 선교사 탐구 제4차 심포지엄이 진행되고 있다. ©장지동 기자

한편, 발표회에 앞서 개회예배에서 설교를 맡은 박응규 교수(ACTS 역사신학)는 “엘리야의 겸손한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며,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기대감”이라며 “이 믿음의 기도를 통해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 영적인 기근의 때에 낙담하지 말고, 우리의 직무에 충실하므로, 영적인 가뭄을 해갈시킬 큰 비를 통해 우리의 모든 분야에 아름다운 역사가 일어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환영사를 전한 강덕영 장로는 “대한민국은 선교사의 터전 위에 세워진 나라다. 그런데 현재 기독교는 열세에 놓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 기독교적 문화가 어떻게 뿌리 내릴 것인지가 과제”라며 “자유민주주의 기초는 기독교이며, 역사성 위에 기독교가 있다. 역사성을 인식할 수 있도록 크리스천들을 깨우는 심포지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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