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6장에 예수님의 기적이 두 번 연이어 나온다. 2만 명 정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하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였던 사건을 연상케 하는 기적이고, 이어서 나오는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위를 걸으시는 기적은 홍해를 맨땅 같이 걸어간 모세의 출애굽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기적이다.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은 꼭 욥기에 묘사된 하나님 같으시다. “그가 홀로 하늘을 펴시며 바다 물결을 밟으시며”(욥9:8) 하나님은 ‘바다의 물결을 밟으시는 분’이신데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동질(同質)이라는 것이다. 물을 가르고 건너는 것과 물 위로 걸어서 건너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쉬울까? 둘 다 어렵다. 그래서 기적이다. 오병이어 기적이 군중 앞에서 행한 공개적인 기적이라면 바다 위를 걸으신 기적은 제자들만 본 내부적인 기적이다. 중요한 것은 이 기적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오신 분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본문은 갈릴리 바다 위에서 풍랑 만나 힘겹게 노 젓던 제자들이 체험한 기적 이야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큰바람과 싸우고 있는 제자들, 그들의 상황을 보고 친히 바닷물을 밟으며 걸어오신 예수님은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일한 소망이 되신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께서 오병이어 현장을 급히 떠나셨음을 강조했다(마14:22, 막6:45). 둘 다 ‘즉시’ ‘재촉하사’라는 표현까지 쓰며 예수님이 서둘러 떠나셨다고 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현장에서 본 무리들이 ‘메시아의 만찬’으로 해석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요6:14-15).

예수님은 육적 필요가 아니라 영적 구원을 위해 오셨다. 그래서 군중들의 잘못된 메시아관을 거부하고 급히 제자들을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며 자신은 홀로 산으로 피하신 것이다. 마태와 마가는 ‘기도하러 가셨다’고 했고(마14:23, 막6:46), 마태와 요한은 ‘혼자’ 가셨다고 했다. 기도로 마음을 다스리신 것, 이것은 우리에게 크고 작은 성공 후에 찾아오는 유혹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습 같다.

요한은 환호하는 군중을 피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한밤중에 바다 위에서 힘겹게 노 젓는 제자들을 보시는 예수님, 또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리고 그들을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심한 풍랑과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힘겹게 노 젓는데 어떤 사람이 그 거친 바다 위를 걸어온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그분이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님이시다. 여기서 “내니”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 신적 언명이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듣는 사랑의 음성이 되면 좋겠다.

고달픈 인생을 향한 말씀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인 14장 24절과 마가복음 6장 48절을 보면 바람 때문에 힘겹게 고생하는 제자들을 예수님이 보셨다고 했다. 이해인 시인이 “몸이 아프고/ 마음이 우울한 날/ 너는 나의/ 어여쁜 위안”이라 했던 그 바람이 아니다. “창문을 열면/ 언제라도 들어와/ 무더기로 쏟아내는/ 네 초록빛 웃음에 취해/ 나도 바람이 될까” 노래했던 그 기대할 만한 바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17절의 ‘이미 어두웠고’와 18절의 ‘큰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라는 표현은 제자들의 고달픔을 말하는 것, 예수님이 보고 계신 그 순간에도 제자들은 고달프다.

마태와 마가는 ‘바람이 거스른다’고 했다. 지중해의 수면보다 200미터나 낮은 갈릴리 바다, 사방이 고원지대여서 시시때때로 돌풍이 불고, 수심도 깊은 곳은 200m 정도나 되는데 그날 밤에도 갑자기 풍랑이 일어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멀리 산에서 예수께서 이 모습을 보셨다. 예수님이 보셨다는 것, 그 자체가 복음이다. 우리에게도 그렇다. 예수님이 수상보행(水上步行)이란 기적으로 그들을 찾아가셨던 것처럼 고달픈 우리를 보고, 우리를 돕기 위해 오신다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고 하신 말씀 그대로다.

그런데 오늘 말씀 가운데서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는데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하거나 회피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오히려 그 명령에 순종하여 건너편으로 가다가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 그들이 주님 몰래 움직인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들은 오병이어의 기적 현장에 더 오래 남아 먹고 쉬면서 몰려든 군중들에게 자기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재촉으로 어쩔 수 없이 배를 탔는데 광풍을 맞은, 순종했다가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성경에는 이처럼 순종하다가 어려움을 겪은 사례가 많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고, 예레미야와 같은 구약의 인물들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바울과 같은 신약의 인물들도 그랬다. 순종하여 사명의 길을 가다가 만사형통은커녕 수많은 장애와 역경에 부딪혔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십자가라는 끔찍한 장애물을 만나셨다. 순종해도 역경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다. 욥도 그랬다. 까닭 없이 겪은 엄청난 시련, 하루아침에 귀중한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자녀와 종, 재산과 건강을 잃고, 아내도 떠났다. 끝은 해피엔딩이지었만 상상을 초월한 끔직한 시련을 당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2-13)고 했다. 오히려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은혜 체험의 기회로 삼으면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며 주님이 다가오실 것이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한 말씀

누군가 바다 위로 걸어오는 모습을 본 제자들의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마태는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마14:26)이라 했고, 마가도 비슷하게 표현했다(막6:49). 오병이어의 기적을 봤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바닷물 위로 걸어오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 이건 둔한 거다. 그래서 놀랐고, 유령인 줄 알고 소리를 질렀다. 공포에 떤 것, 귀신이 나타났다고 난리친 제자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예수님의 부재(不在)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재가 문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2만 명이 배불리 먹는 놀라운 축복을 경험했는데, 예수님이 부재하시자마자 바로 맞은 것이 풍랑이다. 죽을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신다. 마태와 마가는 그때가 밤 사경이라 했다. 3시에서 6시 사이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7~10시간, 죽을 고생을 했기 때문일까? 오해로 인해 지른 비명이 “유령이다!”였다.

오해는 예나 지금이나 늘 있는 것, 예수님 당시에 목숨 걸고 따랐던 제자들이 있었던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내쫓는다는 식으로 예수님을 왜곡하고 모함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는 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비아냥거렸는데 공산주의자들은 예수를 아편이라고 말하며 기독교의 가르침을 건전한 이성을 마비시키고 중독시키는 마약쯤으로 폄훼한다. 요즘은 더하다.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교회는 한결같이 이상한 곳, 조롱의 대상이다.

교회가 정말 이상한 곳인가? 교회가 그렇다고 하는 세상은 어떤가? 세상 스스로 세상이 미쳤다고 한다. 돈에 미치고, 권력에 미치고, 섹스에 미치고, 정상이 비정상, 비정상이 정상처럼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미친 세상이 교회를 미쳤다고 난리 치면 교회가 미친 건가?

물 위로 걸어오신 예수님은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태와 마가는 먼저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놀란 마음을 안정시킨 격려의 말씀, 정말 평강을 주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안심하라”, 그래서 나는 등심보다 안심을 더 좋아한다.

마태는 예수님을 확인한 순간 순박한 베드로가 돌발행동을 했다고 기록했다.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마14:28) 예수께서 “오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다고 했다. 바다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베드로의 최초의 수상스키 체험이랄까? 물 위를 걷는다. 어떤 청년은 이 말씀에 은혜 받고 한강에 나가 자기도 물 위로 걷겠다고 발을 내딛었는데 빠지고 말았다. “믿음이 있는데 왜?” 목사님께 물었다. 목사님은 “예수님이 자네더러 물 위로 오라고 하시던가?” “아뇨” “그러니 빠지지”...

그런데 베드로도 빠졌다. 성경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다가 빠졌다고 했다(30절). 의심이 생긴 거다. 그래도 우리보다 낫다. 우리는 아예 바다에 뛰어들 생각도 안 하는 것 아닌가? 베드로는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예수님이 즉시 손을 잡아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며 책망하셨다. 이 표현은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의 다른 표현이다.

마태는 그 난리 후 예수님이 베드로를 데리고 배에 오르셨다고 했다(31절). 마가도 그렇게 썼는데 예수님이 배에 올라 제자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쳤다고 했다(막6:51). 재미있는 것은 마가가 베드로 얘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이 베드로가 그 이야기 거론을 싫어했기 때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나도 갈 건데 먼저 가라”고 하셨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시든 예수님으로 생각했어야 했는데 전혀 믿음 없는 자들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 대한 책망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책망하셨다. 이 책망이 우리를 향한 책망일 수도 있기에 우리는 바른 믿음과 강한 믿음으로 살아야 하겠다.

기쁨으로 영접하게 한 말씀

배에 접근하신 예수께서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안심시킨 후 배에 오르신다. 그러자 “배가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고 했다. 요한은 중간을 생략했지만 마가는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막6:51)라고 했고, 마태도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14:32) 사납게 불던 바람이 잔잔해졌다고 했다. 요한은 이 부분을 뺐지만 예수님 앞에서는 자연도 순종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살다 보면 자연재해를 당할 때도 있고, 그보다 더 큰 인생 풍랑을 만날 수도 있다. 갈릴리 바다의 역풍이 제자들의 길을 방해했던 것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인생길을 방해하는 수많은 바람이 일 수 있다. 질병이라는 풍랑, 사업의 풍랑, 가정 파탄의 풍랑이 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제자들을 괴롭히고 뱃길을 가로막던 그 풍랑조차도 예수께서 배 안으로 들어오시니 이내 잠잠해진 것, 우리 인생에 이는 풍랑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거세도 주께서 함께하시면 반드시 잠잠해질 것이다. 더욱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있지 않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날이 갈수록 끔찍한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세상은 점점 사랑이 식어가는 각박한 생존경쟁의 정글이 되고 있지만 예수님의 자리에 예수님이 계시기만 하면 문제 없다. 인생 풍랑은 거의 다 예수님의 부재로 인해 일기 때문이다.

3세기의 전설적인 순교자 크리스토퍼(St. Christopher)는 중년에 은혜를 받고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여 세상을 섬기기로 헌신을 작정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물이 거세게 흐르는 강에서 약한 사람들을 업어 건너게 해준다. 그런데 어느 날 한센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그의 앞에 섰다. 망설였다. 이 더러운 환자를 업으면 전염될 것 같아 차마 등을 들이댈 수 없다. 그런데 그때 문득 십자가에 달려 모진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 생각이 났다. 주님은 나병균보다 몇천 배 더 흉칙한 온갖 인류의 죄짐을 다 지고 나무에 달려 그 지독한 모욕을 다 당하셨는데 못할 것 없다는 마음으로 그 환자를 업었다. 그날따라 물살이 너무 거세 자칫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강 건너편까지 건너 환자를 내려주고 조금 후에 보니 나환자는 간 곳 없고 찬란한 주님이 거기 서 계셨다.

그렇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모든 풍랑을 밟고 찾아오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기쁨으로 영접했다. 마태는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마14:33)라고 기록했다. 사도행전에 보면 폭풍 가운데 역시 죽을 고생했던 바울은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27:25)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님, 기쁨으로 영접하고 절대 신뢰해야 한다.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시107:29-30), 이 시를 우리의 노래로 삼아야 한다. 모펫(Moffatt)은 21절을 “제자들이 일심으로 주를 배에 영접하니 그 배는 즉시 그들이 소원하는 곳에 도착했다”고 번역했다. 상징주의의 꽃을 피운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Paul Valéry)의 명시 중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Le vent se lève... il faut tenter de vivre!)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살길은 오직 주님, 주님과 함께 항해하는 멋진 새해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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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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